참의식이 말한다(11)

2020. 9. 4. 23:09성인들 가르침/라메쉬 발세카

-- 운명 --

 

질문자: 운명에 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라메쉬: 그 말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싫어하는 사람도 있지요. 운명에 관한 아주 오래된 중국 이야기가 하나 있어요. 대량 살상 전쟁이 늘 벌어지던 시대에 살았던 한 농부의 이야기입니다.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농부에게 말 한 필이 있었는데 하루는 말이 달아나 버렸어요. 작은 마을 이었던지라 이웃들이 모두 와서 농부에게 "운이 없군."하고 위로의 말을 건냈어요. 농부는 고맙다고 말하고 나서 "그럴지도 모르죠."라고 말해요. 얼마 뒤에 사라졌던 말이 여러 야생마들을 데리고 돌아왔어요. 이웃들이 모여서 "운이 좋군!"하고 농부를 축하해 주었어요. 농부는 다시한번 "그럴지도 모르죠."라고 말해요. 하루는 농부의 아들이 야생마들중 한 마리를 잡아 타고 길들이려다가 낙마해서 다리가 부러지고 말아요. 또 다시 이웃들이 들러서 아들이 낙마해서 다리가 부러진 것을 보고 참으로 안 좋은 일이라고 말해요. 농부는 "그럴지도 모르죠."라고 말해요. 얼마 지나지 않아서 군인들이 건장한 젊은이들을 징집해가려고 마을로 들이닥칩니다. 군인들이 농부의 아들을 보고 튼튼하고 건장해 보이지만 부러진 다리 때문에 그냥 두고 떠나요. 이웃들이 들러서 아들이 징집을 피하게 되서 참으로 좋은 일이라고들 말해요. 또 다시 농부는 "그럴지도 모르죠."라고 말해요. 운명은 이 이야기와 같아요. 우리는 모르죠. 한 순간 받아들일 만한 일이 어떤 때는 그렇지 못할 수도 있어요. 어떤 때는 받아들이지 못하던 일이 다른 상황이 닥쳤을 때는 받아들이기 쉬워질 수도 있어요. 

 

질문자: 선생님은 어떻게 하다가 마하라지를 찾아뵙게 됐습니까? 그것도 운명인가요? 

 

라메쉬: 질문에 "어떻게 하다가"라는 말이 있는 것이 재미있군요. 어떻게 하다가 마하라지를 뵙게 됐냐고요? 제가 마하라지를 '어떻게 하다가' 뵙게되었다는, 즉 제가 마하라지를 찾아가겠다고 선택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그 질문 속에 들어 있어요. 아주 뜻 깊은 말입니다. 우리 모두는 어떻게 하다가 찾는 이가 되었을까요? 천국이나 영적인 찾음 따위에 관심 없이 평범하게 잘 살고 있던 사람을 불행한 찾는 이로 바꾸어 놓은 그 특별한 충동이나 힘이 무엇일까요? 오랜 세월을 알코올 중독자로 살던 어떤 사람을 한 순간 느닷없이 "내 인생을 가지고 난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건가? 참 어리석구나!"라고 묻게하는 심오한 느낌을 가져다 준 힘이 무엇이었을까요? 이 사람이 내내 후회했을지는 몰라도 한 번도 알코올 중독에서 제대로 벗어난 적은 없었어요. 그러다가 느닷없이 하루아침에 무엇인가가 이 사람을 흔들었고, 그 사람은 술을 끊고 알코올 중독자 모임에 가입했고 그 이후로 전혀 술을 마시지 않게 되었어요. 제 말의 요점은, 우리가 찾는 이가 되겠다고 했을까요? 아니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혀 손을 대지도 않고 몇몇 사람만을 찾는 이로 변화시키는 어떤 힘이 있는 것일 까요? 만일 찾는 이로 변화시킨 것이 바로 그 어떤 힘이라면 찾는 일이 자신의 책임이라고 생각할 까닭이 어디 있어요? 만일 그 힘이 여러분을 찾는 이로 만들었다면 자신을 어디로 데려갈지, 그리고 순간 순간 자기에게 필요한 사다나 따위를 하도록 만드는 것도 바로 그 힘이 책임진다고 생각하는 것이 더 합리적이지 않겠습니까? 자신이 하는 일이 옳은지 그른지, 맞는지 틀린지 생각하고 걱정할 필요가 있을까요? 좀 더 나아 지려고 한다는데, 도대체 누가 나아질 수 있다는 말입니까? 

 

-- 예정된 운명, 숙명 (宿命) -- 

 

질문자: 운명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라메쉬: 운명은 개인의 관점에서만 존재합니다. 개인의 마음은 일어나는 일들을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이 자신에게 전혀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아요. 개인의 분리된 마음은 자유의지가 없으면 자신의 삶이 엉망이 될 거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이와 반대로, 수십 억이나 되는 모든 세상 사람들이 자유의지를 갖고 있다고 생각해보면 세상이 얼마나 혼란스러워질지 상상이나 할 수 있겠어요? 

 

질문자: 개념상으로는 운명이 일어나는 개인이 여전히 있군요. 

 

라메쉬: 그렇죠. 그래서 운명이라는 말은 개인에게만 해당되지요. 개인을 생각하지 않으면 운명이란 말은 필요가 없죠. 그래서 장자는 자신의 스승 노자에 관해서 "스승님은 오실 때가 되었을 때 오셨다. 스승님은 일이 자연스럽게 흘러가듯이 그렇게 떠나셨다."라고 말했던 겁니다. 장자에게 운명이란 말은 필요가 없어요. 흐름을 따라갈 뿐이죠. 

 

질문자: 그것이 "주의 뜻"과 같습니까? 

 

라메쉬: 그것이 바로 "주의 뜻"이예요. 하지만 자신이 독립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주의 뜻"을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되어 있고 자신에게 의지가 있다고 고집하기 때문에 모든 일이 운명지어진 대로 일어난다고 말해주어야만 알아듣지, "주의 뜻"이라고 하면 무슨 말인지를 모릅니다. 

 

질문자: 선생님께서 이전 질문에 답을 하시면서 숙명도 없고 자유의지도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잠시뒤에 선생님의 점성술 예언에 관해서 말씀하실 때는 그 예언이 숙명이었다고 말씀하셨어요. 

 

라메쉬: 맞아요. 개인의 관점에서 볼 때는 숙명이 있지만 개인을 떠나 비개인적 관점에서 보면 숙명은 없어요. 숙명은 어떤 행동이 꼭 일어나야 한다는 관점에서 비롯됩니다. 그래서 이런 행동이 일어나도록 하기 위해서 몸-마음 유기체가 만들어지지요. 그래서 보면, 유기체와 행동은 연관되어 있지요. 운명지어진 어떤 행동이 일어나기 위해서 몸-마음 유기체가 만들어져요. 유기체가 창조되는 일과 행동이 창조되는 일은 서로 연결되어 있어요. 그래서 잉태되어 유기체가 창조되는 일도 일어날 행동만큼이나 숙명의 일부예요. 

 

질문자: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정하는 어떤 지적 존재가 있습니까? 

 

라메쉬: 그럼 있죠! 하지만 우리가 신이라고 부르는 그런 지적 존재는 인간의 지능으로는 감히 짐작 조차도 못해요. 

질문자: 어떻게 개인에게는 숙명이 있는데 참전체성에게는 없을 수가 있습니까? 

 

라메쉬: 참전체성 입장에서는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습니다. 참전체성은 그림 전체를 보지요. (라메쉬가 책 한 권을 들고 개미 두마리가 각자 반대 방향에서 책의 한 모서리로 기어가는 것을 보여주면서) 여러분이 개미 한 마리가 한 쪽에서 오고 다른 한 마리가 반대쪽에서 오는 것을 보면 여러분이 관찰하는 지점에서는 몇 초안에 개미들이 만날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죠. 하지만 개미들에게는 숙명이죠. (웃음) 

 

질문자: 그럼 그 점성술사는 그 순간, 전체를 보았지만 우리에게는 일이 순간 순간 펼쳐지고 있는 거군요. 

 

라메쉬: 바로 그말입니다. 그 점성술사에게는 그림 전체였죠. 딱히 좋은 말이 없으니, 그냥 점성술사의 재능이라고 합시다. 그 점성술사는 그림 전체를 본 반면 우리는 그림의 조각 조각을 보지요. 

 

질문자: 그럼 점성술사는 그 순간 전체를 본 반면, 우리에게는 그 전체가 시간에 따라 조금씩 펼쳐진다고 말하면 되겠군요. 

 

라메쉬: 바로 그거죠! 

 

-- 카르마는 비개별적 인과관계다 -- 

 

질문자: 전 우리가 명상을 아주 열심히 하면 전쟁을 막을 수 있다고 믿습니다. 

 

라메쉬: 명상을 해서 전쟁을 막을 수 있다면 예전에 명상하던 사람들이 전쟁을 피하려고 해보지 않았겠습니까? 그럼 왜 아직 전쟁이 멈추지 않을까요? 전쟁이 멈출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예요. 전쟁이 멈추어야 한다면 멈출 것입니다. 다만,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한 경우가 아니라면 전쟁이 멈추는 것은 '당신'이나 다른 유기체가 원했기 때문은 아니죠. 참전체성 작용의 일부일 겁니다. 

 

질문자: 사람들이 사악하고 잔인한 행위라고 일컽는 부정적인 것도 참전체성 작용의 일부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 하는 사람들이 우리들 중에 있습니다. 

 

라메쉬: 물론이죠! 하지만 "부정적인 것"은 선한 것과 연결되어 있는 상반된 것이고 이 둘 다 참전체성 작용의 일부지요. 이 점을 완전히 받아들이면 의문이 생기지 않아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말하자면, 받아들이게 될지 안 될지도 개인에게 달려 있지 않아요. 이것 또한 참전체성 작용의 일부지요. 

 

질문자: 술집에서 술에 쩔어서 싸움이나 일삼는 사람들이 자신의 행동에 갇혀 있는 것만큼이나 선량하고 아주 도덕적이며 책임감 있는 사람들도 자신의 행동에 갇혀있기는 매한가지인 것 같군요. 

 

라메쉬: "갇혀있다"는 표현이 참 좋군요! 여러분은 찾는 이가 될 수 밖에 없게 갇혀있죠. 다른 대부분의 사람들은 안 그렇지만. 

 

질문자: 꼭 좋지만은 안군요. (웃음) 

 

라메쉬: 바로 그래요. 요점은, 마음이 내면으로 향하면서 완벽히 행복하고 만족스럽게 살던 사람이 찾는 이가 되면서 비참해진다는 점입니다. (웃음) 자신이 비참해지려고 선택한 것이 아니죠. 해리가 꽤 정확하게 묘사했는데, 우리 모두는 현재 자신의 모습으로 갇혀있어요. 어떤 사람은 큰 돈을 구하고 어떤 사람은 구원을 구하지요. 만일 여러분이 선택할 수가 있다면, 그럴리는 전혀 없지만, 저는 큰 돈을 구하라고 권할 겁니다. 큰 돈을 얻었을 때는 돈을 쓰면서 즐기는 누군가가 있을 테지만, 깨달음이 일어날 때는 어떤 것이든 즐길 "누군가"가 없기 때문이죠. (웃음) 

 

질문자: 정말로 갇혔군요. 

 

라메쉬: 여러분은 어떤 식으로든 "갇혀"있어요. 그래서 제가 멋진 표현이라고 하는 거예요. 제가 정직하고 진실하게 다시한번 말하자면, 이것은 아주 간단한 문제예요. 지능이 문제를 어렵게 만들 뿐이죠. 기본적으로 참 간단해요. 개인으로서 우리는 갇혀있어요. 하지만 일단 우리가 개인의 관점에서 생각하기를 멈추고 자신이 갇혀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 참전체성의 관점에서 생각하기 시작할 겁니다. 개인적인 것에서 멀어지면서 비개인적인 것으로 바뀌고 문제는 일어나지 않아요.(7 high)

 

                         -리쿼만 편집, 김영진 번역<라메쉬 발세카와의 대담, 참의식이 말하다>-

 

 

 

'성인들 가르침 > 라메쉬 발세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참의식이 말하다(12)  (0) 2020.09.11
임제스님의 경책(10)  (0) 2020.09.10
참의식이 말하다(9)  (0) 2020.08.21
참의식이 말하다(8)  (0) 2020.08.14
참의식이 말한다(7)  (0) 2020.08.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