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10. 1. 19:18ㆍ성인들 가르침/라메쉬 발세카
-- 이원론(二元論) 에서 이원성(二元性) 으로 돌아가는 것 --
질문자: 동물도 자신이 다른 것들과 분리되어 있다고 느끼나요?
라메쉬: 분리된 개체로서는 아닙니다. 동물은 포식자와 먹이로만 분리되어 있다고 느껴요. 인간도 관찰되는 객체과 관찰하는 객체로 분리되는 이런 기본적인 이원성을 경험해요. 하지만 인간은 이원성이라는 기본적인 분리에서 한 걸음 더나아가서 "나"를 그외의 모든 것과 심적으로 분리시킵니다. 바로 이 마음 속에서 "나"와 그외의 모든 것이 분리되는 일이 일어나지요. 이렇게 이원성에서 다시 이원론으로 분리되는 일이 일어납니다. 이원성이라는 기본적인 분리는 참의식 자체에서 일어나는데, 나타나는 세상을 인식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일이예요. 어떤 것이든지 나타나서 존재하려면 반드시 관찰되어야만 해요. 관찰하는 일이 일어나려면 관찰되는 객체와 관찰하는 객체가 있어야만 해요. 이렇게 관찰하는 객체와 관찰되는 객체로 분리되는 이중성은 현상세계의 기본이 되는 분리예요. 인간은 여기서 더 나아가서 "나"를 그외의 모든 것과 분리하는 이원론으로 빠져들지요. 관찰하는 객체는 자신이 '절대' 또는 참전체성 또는 신만이 될 수 있는 주체인 체하면서 "나는 주체이며 나머지 세상은 내가 보는 대상이다."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순간 "나"와 그외의 모든 것으로 분리되고 이원성은 이원론으로 또 다시 분리됩니다. 관찰하는 객체는 자신이 관찰하는 주체라고, 경험자라고, 행위자라고 생각하지요. 깨달음이란 그저 가짜-주체가 분리된 개체란 있을 수 없고 자신의 몸-마음은 참전체성이 나타낸 세상 안에서 단지 하나의 도구로써 기능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우쳐가는 과정일 뿐입니다. 주체 행동 의식이 사라지면 이원론은 이원론의 바탕이 되는 이원성으로 회복됩니다. 이원성은 현상세계가 일어나는데 꼭 필요한 구조예요. 깨달음이란 이원론에서 이원성으로 돌아가고 주체 행동 의식이 없어지는 과정일 뿐이지요. 깨달음에는 개별 개인은 독립된 개체가 아니고 참전체성 또는 신이 기능하는데 쓰이는 하나의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깊디 깊은 깨우침이 있어요. 자신이 행위자라고 생각하다가 이런 주체 행동 의식이 사라지게 되는 변화가 깨달음이 뜻하는 모든 것입니다.
질문자: 얽매임이 핵심이라는 사실을 알겠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무엇에 얽매이나요? 다른 개체나 과정에 얽매이는 개체가 있나요? 하지만 어떻게 그럴 수 있죠? 어디에서 실수한 거죠?
라메쉬: 아니예요. 실수한 것이 아닙니다.
질문자: 이런 "나"는 도대체 왜 생겨난 걸까요? 왜 이중성에서 이원론으로 다시 분리된 걸까요?
라메쉬: 이원성에는 신 또는 참전체성 말고는 주체란 없어요. 무엇을 인식하든지, 눈이 무엇을 보든지, 귀가 무엇을 듣든지, 혀가 무엇을 맛보든지, 코가 무슨 냄새를 맡든지, 일어나는 모든 일은 비개별적 작용이예요. 다른 말로 하자면, 내가 하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완전하게 이해한다는 말이예요. 내가 듣는 것이 아니라 듣는 일은 이 몸-마음 유기체에 붙어 있는 귀를 통해서 일어나는 겁니다. 이원론은 없고 단지 인식만이 있어요. 하지만 이렇게 비개별적으로 일어나는 인식이 아니라, 내가 개인으로서 뭔가를 본다고 하는 순간 곧바로 판단이 일어나요. 내가 보는 것을 좋아하거나 싫어하지요. 내가 듣는 것을 좋아하거나 싫어해요. '있는 그대로'를 개인적으로 판단하는 주체 행동 의식이 "나"와 그 이외의 모든 것을 갈라놓는 이원론의 바탕이 됩니다.
-- 자연스러운 삶에 문제가 일어나는 까닭 --
질문자: 저는 일상 생활을 내가 숨쉰다고 의식하지 않고, 내가 걷는다고 의식하지 않고, 내가 물을 마신다고 의식하지 않으면서 살아갑니다.
라메쉬: 언제부터 누가 숨쉬는지 궁금하기 시작했을까요? 확실히 말하건데, 숨쉬는데 문제가 생기면서부터죠! 문제가 있으면 숨쉬는 것을 의식하지요. 소화과정에 문제가 있으면, 그때서야 소화과정을 의식하지요.
질문자: 하지만 정말 제가 숨쉬는 것이 아니죠. 전 행위자가 아닌 걸요.
라메쉬: 제 말은, 보통은 이런 모든 자연스러운 과정은 의식하지 않는다는 말이예요.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복잡한 조직인 신경조직이나, 소화와 호흡조직들은 스스로 알아서 작용합니다. 이런 것들은 뭔가가 잘 못 되기 전까지는 전혀 의식하지 않아요. 여러분에게 이렇게 물어보죠. "왜 그렇게 삶을 살아가면서 문제를 의식할까요?" 왜냐하면 사는데 뭔가 완전히 잘못 됐기 때문이죠! 호흡과정이나 소화과정이 부드럽게 진행되듯이 자연스럽게 살아간다면 전혀 문제가 일어나지 않아요. 자연스럽게 살지 않기 때문에 살아가는데 문제가 나타나는 겁니다. 자연스럽게 살지 않기 때문이죠. "나"라는 관점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살면서 문제를 일으킵니다. 다시한번 말하지만, 이것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고 누구의 죄도 아닙니다. 참의식 자신이 각각의 몸-마음 구조체와 동일시하고서는 이 몸-마음으로 하여금 참의식 또는 신이라는 주체를 몰아내고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게 만든 겁니다. 이렇게 해서 재미있는 놀이가 시작되는 거지요.
-- 선과 악 --
질문자: 저는 삐뚤어진 사람들과 조직들을 바르게 고치려고 노력하면서 인생의 대부분을 보냈습니다. 제가 이 일을 그만둘 수나 있을지 모르겠군요. 꼭 뭔가가 기본부터 잘 못 되어 있어서 바로 잡아야만 했습니다.
라메쉬: 종교에서는 근본적으로 자신이 선하다고 생각해요. 자신은 나쁘지 않죠. 이런 생각이 뿌리 깊게 자리잡으면서 선함을 추구하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라고 생각하게 되지요. 하지만 전혀 그렇지가 않아요. 선과 악은 공존해야만해요.
질문자: 악이나 나쁜 사람, 나쁜 조직, 나쁜 선택 같은 것이 없다는 말씀인가요?
라메쉬: 그럼요! 정말 그래요. 습관은 참으로 무섭죠. 습관에서 벗어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압니다. 하지만 왜 선과 악이 공존해야하는지를 살펴보는 일은 쉬운데, 위가 없이는 아래가 없고, 앞면이 없으면 뒷면도 없어요. 위와 아래, 앞면과 뒷면은 서로 연관된 반대되는 말들이죠. 다른 하나가 없으면 의미를 잃어버려요. 이렇게 서로 상반된 양극성은 아주 기초적이고 단순하고 명백하지만 우리는 습관에 길들여져서 이 사실을 보지 못해요. 그래서 상반된 양극 사이를 왔다갔다하는 변화가 삶의 가장 근본이 된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 첫 걸음이예요. 이 사실을 확고하게 받아들이면 아주 큰 진전이 있습니다.
질문자: 어떤 것도 영원히 선하거나 악한 것이 없다는 말씀이군요.
라메쉬: 바로 그렇습니다. 낙태를 예를 들어 봅시다. 수년 전 까지만해도 낙태는 범죄였어요. 지금은 개발도상국에서 낙태를 권장해요. 그래서 좋고 나쁜 것, 범죄와 범죄가 아닌 것은 모두 그때 그때 처한 상황에 따라 달라져요.
질문자: 나쁜 정부도 있고 나쁜 정책도 있으며, 저로서는 정말 참기 힘든 역겨운 짓을 해대는 무리들도 있습니다. 이런 조직이나 집단은 비개인적으로 볼 수가 없네요. 개인들은 비개인적으로 보는 것이 쉽지만, 제3제국 집단인 담배회사 같은 조직을 보면, 이들을 참전체성이 나타난 것으로 보기가 참 힘들군요.
라메쉬: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라마나 마하리쉬께서는 개인과 같은 것은 있지도 않고 모든 것이 다 비개별적이라고 강조하셨지요. 그리고 그분은 개별 찾는 이가 몹시 비참해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자비로운 마음으로 보시고는 찾는 이의 비참함을 묘사하는 11 구절의 시를 쓰셨어요. 개인의 입장에서는 마음이 이미 내면으로 향해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가장 큰 격려가 되기 때문에 마하리쉬께서는 "당신의 머리는 이미 호랑이 입 속에 들어가 있다. 빠져나갈 길은 없다."라고 말씀하셨지요. 오늘은 이해하기가 어려울 수 있겠지만, 이해가 서서히 깊어가면서 당신의 내면으로 스며들어가서 예전에는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사실이 곧 명백해지는 것을 보고 놀랄 겁니다. 모든 개인과 모든 집단은 신 또는 참전체성이 특정한 특징을 가지고 창조한 것이고 이렇게 타고난 특징들 때문에 이들은 특정한 행동을 하게 되는데, 이들은 이것이 자기 자신이 하는 행동이라고 착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될 거예요.(8mal)
- 리쿼만 편집, 김영진 번역<라메쉬 발세카와의 대담, 참의식이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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