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5. 15. 21:19ㆍ성인들 가르침/초기선종법문
[본문]
문 : 6바라밀이 능히 일체지(一切智)를 나오게 합니까?
답 : 바라밀이란 자타가 없는데 누가 받고 누가 얻겠는가?
여러 생류의 중생들이 공업(共業)으로 과보를 받음에는 분별(차별)없이 복을 주고 형상을 준다.
경(유마경)에서 이른다.
'(유마힐 거사가 영락(瓔珞;구슬목거리)을 2분(分)하여 ) 난승여래(難勝如來)와 회중(會中)의 한 최하(最下) 걸인 등에게 (고루 1분(分)씩 보시함에 평등한) 대비(大悲)로 법시(法施)를 구족하였다.
이 까닭에 단바라밀(檀波羅蜜 : 보시바라밀)이라 한다.
무사(無事) 무인(無因)하고, 즐겨하거나 싫어함도 없으며, 체성이 여여(如如)하여 궁극이 아님이 없고, 누가 진실을 구하든 시비가 일어나지 않으니 계체(戒體)가 청정하여 시바라밀(尸波羅蜜 :지계바라밀)이라 한다.
마음에 내외와 피차가 없는데 어디에 기댈 것인가?
음성의 성품이 염착됨이 없고 평등함이 허공과 같은 것과 같으니 (이를) 찬제바라밀(羼提波羅蜜: 인욕바라밀)이라 한다.
여러 감각기관(根)의 인식을 떠났고, 구경(究竟:궁극)이 열리어 모든 상에 머무르지 않으니 (이를) 비리야바라밀(毗梨耶波羅蜜 :정진바라밀)이라 한다.
삼세기 무상(無相: 無常)하여 참나도 머무르는 곳이 없고, 현전의 사(事)에 처하지 아니하여 고요함과 어지러움의 어느 때나 본성의 여(如)함이 이어지니 (이를) 선정바라밀이라 한다.
열반 진여(眞如)의 체(體)는 볼 수 없어 희론(戱論) 일으키지 아니하고 심(心 :제8식),의(意: 제7식), 의식(意識: 제6식)을 떠나 방편에 머무르지 않음을 이름하여 여여(如如)라 하고, 용(用)할 바 없다고 하며, 용(用)하되 용(用함이 아니라고 한다. 경(유마경)에서 이르길 '지혜방편에서 해탈함이다'고 하였다. 이 까닭이 반야바라밀이라 한다.
[해설]
심지(心地)법문으로서 6바라밀을 설하였다. 이 중 맨끝의 반야바라밀 가운데 '모든 식을 떠나 방편에 머무르지 않는다.' 한 것은, 곧 법상(法相 : 佛說의 敎法, 방편의 지혜 법문)에 의지함도 버림을 말한다. 이를 가리켜 '능지(能智)의 버림'이라 한다. 지혜법문은 곧 방편이고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다. 달을 보기 위해서는 손가락을 버려야 한다. 그 법문의 뜻을 올바로 알았다면 그 법문의 상도 버리게 되어 있다. 그런데 자칫 그 법상을 붙잡고 있게 되는 경향이 많다. 법상도 머리에 떠오른 영상으로 있어서는 안된다. 이 법상을 잡아 이를 용(用)하면 마음이 일어나게 되어 부동심(不動心)이 되지 못한다. 또한 마음으로 마음을 어덯게 하려는 것이 되어 능소(能所)로 이분(二分)된 식(識)을 떠나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모든 식(識)을 떠나 방편에 머무르지 않는다."고 하였다.
용(用)하지 않지만 오히려 그 법상의 뜻이 올바로 제대로 구현하는 까닭에 그 법상이 용(用)되는 뜻이 있다.
그래서 " 용(用)하되 용(用)이 아니다. "고 하였다.
[본문]
문 : 무엇을 해탈이라 합니까?
답 : 마음이 색(色)이 아닌 까닭에 색에 속하지 않는다. 마음이 색이 아님도 아니니 비색(非色)에 속하지도 않는다. 마음이 비록 색을 비추나 색에 속하지 않는다. (이하 <천순분>에 의거해서 해석함)
[마음이 비록 비색(非色)을 비추더라도 비색에 속하지 않는다. 마음은 색상(色相)으로 볼 수 없다. 마음이 비록 색(色)은 아니나 공(空)도 아니다. 마음이 비록 비색(非色)이나 태허(太虛)와 같지 않다. 보살은 뚜렷이 공(空)과 불공(不空)을 비추어 보는데, 소승은 비록 공을 비추어 보지만 불공을 비추어 보지는 못한다. 성문(聲聞)은 비록 공을 얻었으나 불공을 얻지는 못하였다.]
[본문]
문 : 어찌해서 모든 것이 유(有)도 아니고 무(無)도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까?
답 : 심체(心體)는 체(體)가 없다. 마음은 색(色)이 아닌 까닭에 유(有)도 아니다.
용(用)함이 있어 폐(廢)가 되지 않으니 무(無)도 아니다.
또한 용(用)하되 항상 공(空)이니 유가 아니다.
공하되 항상 용(用)하니 무가 아니다.
또한 자체(自體)가 없어 유(有)가 아니며, 연기(緣起)로부터 생긴 까닭에 무(無)가 아니다.
범부는 유(有:有見)에 머무르고, 소승은 무(無: 無見)에 머무르며,
보살은 유와 무에 머무르지 않는다.
이는 (有無의 見은) 자심에서 분별한 망상이다.
[<천순분> : 색(色)은 색이 아니어서 색에 물들지 않는다. 색은 비색(非色)이 아니어서 비색에 물들지 않는다,]
또한 견(見)을 견함이 없고, 불견(不見)을 견함이 없는 것, 이를 이름하여 법을 견(見)함이라 한다.
지(知)를 지함이 없고, 부지(不知)를 지함이 없는 것, 이를 이름하여 법을 지(知)함이라 한다.
[해설]
색(色)에서 색을 얻을 수 없으니 색에 물듬이 없다. 색(色)이 비색(非色)도 아니니 비색에 물들지 않는다.
견(見)함이 없고, 지(知)함이 없는 것이 심성(心性)이다.
그런데 그렇다고 지해(知解)함은 이미 심성에 어긋난 것이니 바로 망상에 떨어진 것이다.
진실이 그러하되 그렇다고 생각함도 떠나야 한다.
그래야 지(知)함도 없고, 견(見)함이 없는 자리를 체증(體證)한다.
그래서 진실을 밝히고는 그렇게 아는 것도 망상이라 할 것이다.
또한 그러하기에 알았다면 마음을 어디에 둘 수가 없고, 말의 길이 끊어졌다고 하는 것이다.
(心行處滅 言語道斷)
[본문]
심(心)에 즉하여 무심(無心)이니 마음이란 무심(無心)인 심(心)이다.
무심인 심인 까닭에 이름하여 법심(法心)이라 한다.
지금의 행자는 이 법으로 모든 미혹을 부순다.
마음이 허공과 같아 파괴할 수 없는 것이다. 까닭에 금강심이라 한다.
마음은 머무름 없이 머무르며, 머무르지 않음에도 머무르지 않는다. (까닭에) 반야심이라 한다.
심성(心性)이 광대하여 그 운용이 어디에나 있다. 까닭에 마하연(대승)심이라 한다.
심체(心體)가 어디에나 모두 통하여 걸림이 없다. 까닭에 보리심이라 한다.
마음은 끝이 없고 또한 처소가 없다.
마음은 무상(無相)하여 경계선이 없다.
용(用)함이 끊어지지 않는 까닭에 경계선이 없는 것도 아니다.
끝(邊際, 변두리,경계선)이 있지도 않고 끝이 없지도 않으니 (이를) 실제심(實際心)이라 한다.
마음은 다르지도 아니하고, 다르지 않은 것도 아니다.
심(心)에 즉하면 체(體)가 없다.
다르지 아니하되( 다르지 않은 것도 아니다)
마음에 즉하여 체(體)가 없되 체가 없지도 아니하다.
다르지 않음도 아니고, 다름과 다르지 않음도 없으니 이름하여 진실하게 머무는 자리(眞住處)라 하고,
법계에 머무는 자리(法界住處)라 하며, 또한 법계심(法界心)이라 한다.
심성(心性)은 비유(非有)이고, 비무(非無)이며,
고금(古今)에 변하지 않는 까닭에 이름하여 법성심(法性心)이라 한다.
마음은 생함이 없고 멸함이 없어 이름하길 열반심이라 한다.
[<천순분> : 다르지 않되 체(體)가 없지도 않다. 다르지 않음도 아니며, 다르고 다르지 않음도 없다.
까닭에 진여심(眞如心)이라고한다.
마음이 즉하여 변함없음을 이름하여 '이(異)'라고 한다.
사물에 따라 변함을 이름하여 '무이(無異)'라 하고 또한 진여심이라 한다.
마음에는 내외(內外)와 중간(中間)이 없으며, 또한 어디에도 있지 않고, 마음은 머무르는 곳이 없다.
이것이 법(法)이 머무르는 곳이며, 법계가 머무르는 곳이고, 또한 법계심(法界心)이라 한다.
심성(心性)은 유(有)도 아니고 무(無)도 아니며, 고금(古今)에 개변(改變)되지 않았다.
까닭에 법성심(法性心)이라 한다.
마음은 생함도 없고 멸함도 없다. 까닭에 열반심이라 한다.]
만약 이렇게 해(解)를 짓는다면 이는 망상이고 전도(顚倒;거꾸로 됨)이며,
자심의 현전(現前) 경계를 요지(了知)하지 못한 것이니 이름하길 파랑심(波浪心:파도치는 마음)이라 한다.
[해설]
올바로 깨닫고 증득하였다 하더라도, 처음에는 그 지해(知解: 알음알이)가 있게 된다.
수행으로 인해 얻어진 지견(知見)인 까닭에 그 자리에 머물기 쉽다.
그러나 그 자리도 특별한 자리로서 여타의 자리와는 구분되는 자리가 되어 버렸다.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이거늘 무슨 자리, 다른 자리가 각각 따로 있었겠는가 !
이러한 자리는 평등의 뜻에 어긋난다. 또한 얻을 바 없다는 뜻에 어긋난다.
'본래무일물'인 까닭에 무엇이라 이름 붙일 수도 없다.
현전(現前) 경계에 즉(即)한 깨달음이어야 하는데 이런 저런 법상(法相)으로 이해되었다 해도 아직 즉사(即事)의 깨달음이 아니다. 즉사(即事)는 즉심(即心)이 되어야 하고, 즉심이 되려면 일체의 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큰 깨달음의 지해(知解)라도 상이 남아 있다면 이는 망상임을 알아야 한다.
즉 마음에 어떠한 상이라도 있으면 이것은 마음이 일어난 것이어서 파랑심(波浪心)이고, 망(妄)이다.
-담림 편집, 박건주 역주 <보리달마론>운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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