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가현각선사의 지관(止觀) 법문(4)

2020. 5. 29. 23:52성인들 가르침/초기선종법문

(2) 연지(緣知) 2 :반성적 자기지

 

[본문]

만약 스스로 지를 안다 해도 이 또한 무연지가 아니다. 

마치 손으로 스스로 주먹을 쥐면 주먹 안 쥔 손이 아닌 것고 같다.

若以自知知 亦非無緣知 如手自作拳 非是不拳手

 

[해설]

'이자지지(以自知知)'는 '자신을 앎으로써(以自知) 안다'로 읽을 수도 있고,

'자신으로써(以自), 즉 스스로 지를 안다'로 읽을 수도 있다. 

후자처럼 읽어도 알려지는 대상인 지(知)가 결국 아는 자신인 자(自)이므로 전자와 크게 다르지 않다. 

어떻게 읽든 여기에서는 마음이 대상으로서의 적(寂)을 아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적(寂)을 아는 자가 자기 자신을 안다고 해도, 이 지(知) 또한 대상지이지 

대상이 없는 무연지가 아니라는 것이다. 

다만 대상이 외적 대상에서 그 대상을 아는 자기 자신으로 바뀌었을 쁀이다. 

마음 안에서 다시 주객분별이 일어나 결국 자신을 대상화 해서 아는 것이기 때문에 

그 대상을 아는 것이기 때문에 그 앎 또한 주객분별지인 연지(緣知)에 그치고 마는 것이다. 

 

이는 곧 마음 자체를 아는 지는 대상을 아는 마음에 대한 반성적 지도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스스로 마음을 대상화해서 반성적으로 아는 '반성지'가 아니라 마음 자체를 직접적으로 아는 '직접지'어어야 하는 것이다. 이는 마치 여의(파리채)를 쥐지 않고 주먹을 쥔 손이라 해도, 그렇게 주먹 쥔 손을 아는 것은 손 자체를 아는 것과 다른 것과 같다. 손으로 여의를 쥐면 주객분별이 성립한다. 그런데 여의를 쥐지 않고 주먹을 쥐어도, 결국 손이 손 자체를 쥐는 것이 되어 주객분별이 된다. 주먹 쥔 손은 주먹지지 않은 손자체가 아닌 것이다.  

말하자면 손이 손을 알고자 대상화하면, 결국 대상화된 손이 알려질 뿐, 손자체가 알려지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성성적적의 마음은 일체의 대상화를 떠난 마음의 직접적 지각성을 뜻한다. 

 

행정은 이렇게 말한다. "다시 능지로써 그 자기 마음을 알면, 비록 앞의 경계를 벗어난다 하더라도 아직 무연이 아니다. 경에서 '자기 마음으로 자기 마음을 취하면 환(幻)이 아닌 것이 환법이 된다.' 고 하였다. 

마음 자체는 본래 환이 아닌데, 마음이 마음 자체를 알고자 대상화 하는 순간, 그 대상화에 의해 마음은 대상화 된 마음인 환으로 바뀌는 것이다. 그래서 마음이 마음을 인식대상으로 취하면 결국 '환 아닌 것이 환이 된다,고 말한다. 주먹의 비유에 대해 행정은 "여의를 이미 떠나면 주먹 쥔 손이 비게 된다. 만약 이 주먹을  잊으면 득입(得入)이라고 할 수 있다. 고 말한다. 주먹을 잊어야, 즉 대상화를 멈추어야, 손이 손자체를 직접 아는 무분별지 내지 무연지가 성립한다는 말이다.  

 

(3) 무연지(無緣知) :영지(靈知)

 

[본문]

또한 '적(寂)을 아는 자'도 아니고 또 '스스로 지를 아는 자'도 아니라고 해서 지(知)가 없다고 할 수는 없다. 

자성이 밝아서 목석과 다르기 때문이다.

亦不知知寂, 亦不自知知, 不可爲無知, 自性了然故, 不同於木石,

 

[해설]

마음이 주객분별상태에서 대상을 아는 지는 연지이지 무연지가 아니다. 

그 대상이 마음 이외의 것일 수도 있고 마음 자체일 수도 있지만, 

일단 대상화의 방식으로 앎이 성립하면 그 앎은 무연지가 아니다. 

그러나 대상화 아닌 방식으로, 

즉 대상이 없이 어떻게 앎이 있을 수 있는가?

여기서는 대상이 없다고 해서 지(知)가 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한다. 

즉 '외경(고요)을 대상으로 알거나 (知知寂), 

아니면 그렇게 '대상을 아는 자기 자신을 대상으로 아는 것'(自知知)이 아니라고 해서 무지인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나 다른 대상을 아는 것도 아니고, 자신을 대상으로 아는 것도 아니라면, 

도데체 무엇을 알기에 무지가 아니라는 것일까?

외경이든 자신이든 대상화 해서 알 때 그렇게 알려지는 대상의 앎 이외에 

그렇게 아는 자기 자신에 대한 직접적 앎이 있다는 것이다.

대상화 되기 이전의 앎, 순수한 직접적 자기지가 존재한다는 말이다. 

일체 대상을 아는 마음은 그러한 대상화에 앞서 자기 자신을 안다. 

그래서 '자성이 밝아 목석과 다르다'고 말한다. 

목석과 달리 자각성(自覺性)을 갖고 있다는 말이다. 

이러한 본성의 본래적 자기지를 기신론은 '본각(本覺)이라고 부른다. 

중생 누구나가 이미 갖고 있는 그 본각을 원효는 '성품이 자신을 신묘하게 안다.'는 의미에서 '성자신해(性自神解)라고 부르고, 지눌은 '비어 적적한 마음의 신령한 앎'이라는 의미에서 '공적영지(空寂靈知)]라고 부른다. 

행정은 "위의 두 가지를 다 벗어나니, 좌망(坐忘)하여 비춤을 버린다. 

경에서 '생멸이 이미 멸하니, 적조가 현전한다'고 하였다."라고 말한다. 

성성적적의 마음이 갖는 본각 내지 영지의 빛을 고요하게 비추는 '적조(寂照)'라고 부른 것이다. 

 

[본문]

손이 여의를 잡지 않고 또 스스로 주먹을 쥐지 않는다고 손이 없다고 할 수 없다. 

손이 편안하게 있기 때문에 토끼뿔과는 다르다. 

手不執如意, 亦不自作拳, 不可爲無手, 以手安然故, 不同於兎角

 

[해설]

여의를 잡은 손은 외경에 대한 대상지를 뜻하고, 

주먹 쥔 손은 반성적 자기지를 뜻한다. 

그러나 이 두 손은 다 손 자체가 아니라, 이미 주객으로 분별된 손이다. 

손 자체는 그렇게 분별되기 이전의 손, 분별 너머의 손이다. 

여의를 쥐거나 주먹을 쥐지 않아도 손이 손 자체로 존재하므로 

그런 손을 마치 토끼뿔처럼 없는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게 여의도 쥐지 않고 주먹도 쥐지 않은 손 자체가 존재하는 것처럼, 

분별적 대상지나 분별적 자기지 너머에 주객분별 이전의 순수한 무분별지가 존재한다는 것을 강조한 말이다. 

 

불교에서는 무아를 논할 때 흔히 집착된 자아를 토끼뿔이나 거북털에 비유한다.

범부는 오온으로서의 현상적 자아만 있을 뿐인데, 그 오온 안에 상일주재하는 자아가 있다고 생각하면서 아상을 일으켜 그 자아에 집착한다. 

그런 자아는 토끼뿔이나 거북털처럼 개념은 있지만 거기에 상응하는 실재가 없다. 

그렇게 내가 나라고 여기며 집착하는 그런 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자성이 밝은 지인 영지(靈知)가 토끼뿔과 달리 분명히 있다고 말한다. 

불교의 무아설에서 상일주재의 자아가 없다는 것이 무연지로서의 영지가 없다는 말은 아닌 것이다. 

각자의 말나식이 '나는 나다'라고 집착하는 개별적 자아가 있지 않다는 것이지, 개별 자아의 심층에 자타분별을 넘어서는 전체로서의 마음인 일심 내지 진여심이 없지 않고, 그, 일심의 자각성인 본각 내지 공적영지가 없지 않은 것이다. 이 일심이 곧 진여 법신이고, 영지의 자각이 곧 반야지혜이다. 

각자 자신 안의 본각을 자각하는 시각(始覺)을 얻고 결국은 구경각(究竟覺)에 이르는 것, 

이것이 대승불교가 지향하는 것이다. 

 

행정은 "손은 영지를 비유되니, (앞뒤문장을) 합해 보면 알 수 있다."고 말한다. 

분별적 대상지나 분별적 자기지 너머 무분별적 자기지, 그 성성적적의 마음이 바로 영지이다. 

 

                               -한자경 지음, <선종영가집 강해> 불광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