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상(相)은 연기(緣起)로 인하여 나타난 것이기 때문에 환화(幻化)이다.

2019. 12. 13. 10:09성인들 가르침/초기선종법문


[본문]

보살심은 법계를 집으로 하며, 사무량심(四無量心: 慈,悲,喜,捨의 네 가지 한량없는 行)을 계장(戒場)으로 한다.

모든 행위가 끝내 법계심을 벗어남이 없다. 왜 그러한가? 체(體)가 법계인 까닭이다.

네가 마음대로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뛰어다니며, 밟고 다니고, 넘어져도 모두 법계를 벗어나지 못하며, 또한 법계에 (새로) 들어오지도 않는다. 법계로서 법계에 들어오려 한다면 이는 바로 어리석은 사람이다.

보살은 명료하게 법계를 본 까닭에 법안(法眼)이 청정하다고 한다.

법에 생주이멸(生住異滅)이 있음을 봄이 없어 또한 법안이 청정하다고 한다.

經(유마경 제자품 제3)에서 이르길, "어리석음과 애착을 멸하지 않는다" 고 하였다.

어리석음과 애착이 본래 생한 바가 없어 지금 멸할 수 없다.

어리석음과 애착을 내(內)와 외(外)와 중간을 향해 찾아 보아도 볼 수 없고 얻을 수 없으며, 내지 시방(十方)으로 구해 보아도 터럭 끝의 상(相)도 얻을 수 없다.

즉 (어리석은 애착을) 꼭 먼저 멸하고 나서야 해탈을 구하는 것이 아니다. (36)

[해설]​

어리석음(無明)과 애착도 법계심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다. 법계를 떠나 어리석음과 애착이 없는 자리가 어디 따로 없다. 어리석음과 애착도 수중월(水中月)과 같아 언제 들어 온 바도 없고, 온 곳이 없으며, 얻을 바도 없고, 버릴 바도 없다. 항상 법계심 그 자리일 뿐이다. 어리석음과 애착을 멸하여 해탈을 얻으려 함은 수중월을 잡으러 물속에 들어가는 것과 같다. 수중월(水中月)이 수중월인 줄 알면 수중월에 걸리지 않는다. 즉 바로 해탈이 된다. (36)

[본문]

: 세간사람들의 갖가지 학문으로는 어찌해서 도를 얻을 수 없습니가?

: 자기(自己)가 있다고 보는 까닭에 도를 얻지 못한다. 만약 능히 자기를 봄이 없으면 바로 도를 얻는다.

기(己)란 아(我)이다. 성인이 고난을 만나서도 근심하지 아니하고 즐거움을 만나서도 기뻐하지 않는것은 자기를 봄이 없는 까닭이다. 고락(苦樂)을 모르는 까닭은 자기가 있다는 견(見)이 없기 때문이다. 허무에 이르게 되어 자기 또한 스스로 없어졌는데 다시 어떠한 것이 있어 없어지지 않았겠는가! 능히 자기를 잊은 때에는 일체가 본래 없는 것이다.

자기란 것이 마음대로 분별하니 바로 생로병사의 미혹에 빠지고(생로병사를 받는다), 근심하고 슬퍼하며 고뇌한다.

추위와 더위, 비바람 등 모든 불여의(不如意)한 일들, 이것들이 모두 망상으로 나타난 것이며, 환화(幻化)와 같은 것으로 나오게 된 것이다.

가고 머무름이 자기에 말미암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연기(緣起)하여 된 까닭이다. 환화(幻化)가 멋대로 생긴 것인데 그 가고 머무름에 거역하고 듣지 않으려 한다. 때문에 번뇌가 있게 된다. 자기를 집착하는 까닭에 가고 머무름이 있게 된다. 가고 머무름이 자기에게서 연유한 것이 아니어서 아소(我所 : 인식의 대상이 되는 것)가 환화(幻化)임을 알면 (아소(我所), 자기(自己) 등 모든 환화의 경계에) 머무를 수 없는 것이다. 만약 환화(幻化)의 경계에 거역하지 않으면 경계(사물)를 접함에서 걸림이 없다. 능히 변화(변화의 경계)에 거역하지 않는다면 사(死)에 접하여 후회함이 없다.(37)

[해설]

모든 사물의 거래(去來), 변화하는 자리에 나라고 할 자리가 따로 없다. 이를테면 무지개는 공중의 물방울,빛, 바람, 기압, 등 수많은 요소가 어울려져 된 것인데, 무지개가 '나'라는 생각을 낸다면 참으로 우스운 일이다.​ 

만약 무지개가 '나'라는 생각을 낸다면 이는 망령이며, 햇빛이 강해져 물방울이 사라져 가면 그 오색 형상이 흐려지기 시작하고 그러면 내 몸이 늙어간다 생각하고, 죽음을 두려워하는 생각도 하게 될 것이다.

중생의 몸과 심식(心識)도 이와 같아 '나'라는 생각을 내니 바로 이를 망령이라 한다.

내 몸과 심식(受想行識)의 무수한 구성요소가 신속히 전변하되 그러할 뿐 거기에 '나'라고 할 것이 따로 있지 않다.

물이 흐르다 바위에 부딪치되 물이 바위를 보고 화를 내거나 아파함이 없다.

흐르는 그 자리에 물이 '나'라고 할 여타의 자리가 없는 것이다. 컴퓨터의 여러 부속품들이 '나'라는 생각없이 무심의 작동을 할 뿐이다.

일체 현상이 모두 환화(幻化)인데 그 환화가 갔다가(멸하였다가) 생겨서 머무르는 것을 보고는 수행인은 자칫 그 경계로부터 벗어나고자 거역하려 한다. 여기에서 거역한다고 함은 그것은 번뇌이고 버려야 할 것으로 생각하여 제거하려 하고, 회피하는 것이다. 그러나 환화인 까닭에 본래 그것이 어디에 가는 것도 아니고 머무르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그것을 버리고 회피하려 하면 그 환화를 실재의 것으로 보아 집착하는 것이 되어 버리고 번뇌가 따른다. 모든 경계의 생(生:起),주(住),멸(滅,去)은 일체법의 연기(緣起)일 뿐 자기가 거역할 것도 없고, 일부러 따를 (順) 필요도 없다.

거역함(逆)과 따름(順) 어느 쪽도 취할 것이 아니다. 경계를 일반 중생과 같이 그대로 따라가 버리면 경계에 흔들리고 오염되어 버리며, 한량없는 행업(行業)을 짓게 된다. 그래서 역(逆)도 아니고 순(順)도 아닌 자리를 알아야 한다. 경계를 접하여 머무름 없음이 바로 그 자리이다. 머무름 없으니 무심(無心)이고, 마음을 잊음(妄心)이다.

이 단락은 바로 그 뜻을 일깨우고 있다.


                                                -담림 편집,박건주 역주<보리달마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