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것이 날카로운 근기이며, 어떤 것이 둔한 근기입니까?

2019. 11. 22. 09:48성인들 가르침/초기선종법문


[본문]

묻는다.

"무엇을 순박한 마음이라고 합니까? 무엇을 교위심(巧僞心)이라 합니까?"

답한다.

"문자언설을 교위(巧僞)라 한다. 색(色) 비색(非色) 등. 행주죄와(行住坐臥)의 거동, 이 모든 것들이 순박(淳朴)이다.

내지 모든 고통과 즐거움 등의 일을 만나서 그 마음이 부동(不動)한 것, 이를 순박한 마음이라 한다. ​

[해설]

문자어언은 분별로 지어진 것이다. 반면에 일체 현상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들은 물이 흐르되 흐른다고 작위함이 없고, 흐른다고 함도 없이 흐르듯이 본래 무심하게 그럴 뿐이어서 순박하고 순박하다.

고통과 즐거움에서 본래 흔들림없는 본심의 자리를 흐트러뜨리지 않으니 고통과 즐거움은 단지 물속의 달과 같을 뿐이다. 본심은 어느 때든 흔들림없어 순박하다고 한다.

[본문]

묻는다.

"무엇을 올바름(正)이라 합니까? 무엇을 삿됨(邪)이라 합니까?​

답한다.

"마음으로 분멸함이 없는 것을 올바름이라 하고, 마음에 법을 해(解)함이 있는 것을 삿됨이라고 한다.

내지 삿됨과 올바름을 생각하지 않아야 비로소 올바름이라 할 수 있다.

경에서 이른다. '정도(正道)에 머무는 자는 삿되다. 올바르다 분별하지 않는다. "

[해설]

법을 해(解)함도 삿됨이라 한 것은, 분별이 있는 까닭이다. 본심은 분별함이 없다.

분별함이 없는 것인데 분별함이 있으니 삿됨이라 한 것이다. 그래서 법을 해(解)함이 먼저 필요하고, 중요하지만 해(解)하고 나면 여기에 머물거나 취찯핮 말아야 한다. 어떠한 법문을 듣고 지해(知解, 알음알이, 지각(知覺)) 가 되어야 하되 그 지해에 머물러 빠져서는 안된다. 길을 갈 때 똑바로 가야 하는데 옆에 놀라운 광경이 일어나 여기에 빠지면 똑바로 가던 행이 흐트러져 버리는 것과 같다. 아무리 뛰어나고 놀라운 깨달음이 이루어졌다 하더라도 그 지해에서 무심할 수 있어야 더욱 진전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지해(知解)에 걸려 장애가 되어 버린다.

[본문]

묻는다.

" 어떠한 것이 이근(利根: 날카로운 근기)이고 둔근(鈍根: 둔한 근기)입니까?

답한다.

" 스승의 가르침에 말미암지 아니하고, 사(事)에서 법을 보는 자를 이근(利根)이라 한다.

스승의 언교(言敎)에 따라 해(解)하는 자를 둔근(鈍根)이라 한다.

스승의 가르침에 따라 법을 듣는 경우에도 또한 이근과 둔근이 있다.

유(有)에 집착하지 말라는 스승의 가르침을 듣고 바로 불유(不有)를 취하지도 않고,

상(相)에 집착하지 말라는 가르침을 듣고는 바로 무상(無相)도 취하지 않으며,

생(生)에 집착하지 말라는 가르침을 듣고는 무생(無生)을 취하지도 않으면 이 사람은 이근인이다.

도를 듣고 범부심을 내지 아니하고,

내지 성현의 마음도 또한 내지 아니하며,

범(凡),성(聖)을 함게 끊으면 이는 이근인이니,

도를 듣고 재색(財色)을 애착하지 아니하고,

내지 불(佛)의 깨달음에 대해서도 또한 애착하지 않는다.

(도를 듣고 그 가르침에) 애착하여 바로 어지러움을 버리고 고요함을 취하며, 

우치함을 버리고 지혜를 취하여 (凡,聖을) 함께 끊지 못하고 무애(無涯: 걸림없음)하지 못한다면 이는 둔근인이다.

(도를 들은) 바로 그 자리에서 훌훌 털어버리고 모든 범(凡),성(聖)의 경계를 뛰어 넘으며,

도를 듣고 탐욕심을 내지 아니하고,

내지 정념(正念), 정사유(正思惟) 또한 내지 아니하며,

도를 듣고 성문심을 내지 아니하고

또한 보살심도 내지 아니하면 이를 이근인이라 한다. "

[해설]

사(事: 現前의 사물이나 일들)에서 바로 진리를 보기 어렵기 때문에 언설에 의지하여 이(理)를 설하고 이를 해(解)하게 한다. 이러한 이해(理解)는 길 없는 길을 가는데 지남이 되는 까닭에 중요하다.

그런데 불법(佛法)의 이(理)를 올바로 깊히 통달한다면 그 이법(理法)에 향하거나 염(念)하거나 취착함이 없게 된다.

유(有)에 집착함을 치유하게 해 주기 위해 불유(不有)라는 유(有)가 있고, 공(空)이라는 유(有)가 있게 되어 유(有)에 대한 집착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 된다. 이러한 자는 둔근 가운데 둔근이다.

유(有)가 불유(不有)임을 설명하였을 때 그 뜻을 온전히 알았다면 불유(不有)에도 취착함이 없어야 한다.

그래서 그 뜻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아무리 이법(理法)을 해(解)함이 중요하다 하여도 그 이법이 법상(法相)으로서 마음에 떠오른다면, 이는 곧 마음을 가리는 것이 된다. 본래 무심인데 그 법상으로 인해 마음이란 것이 일어나 버리고, 천연 본래의 어디에도 없는 마음이 어디에 걸리는 마음이 되어 버린다. 어떠한 한 법도 얻을 바 없다는 것이 대승의 요의이다.

수행한다 하면서 무슨 특별한 마음을 발하려 하는 것이 보통이나 이는 둔근인 자들이 하는 행이다.

당념 당처의 즉심(即心)에 모든 진리와 공덕이 다 갖추어져 있음을 알아야 한다.

단지 그러한 자리가 대상으로서 있는 것이 아닌지라 염(念)할 바 없는 것이다.

염할 바 없으니 사(事)에 즉(即)한다. 즉심(卽心)에 사(事)에 즉(卽)하면 이근인(利根人)이다.

이러한 최상의 이근인은 매우 드물지만 스승의 가르침 따라 깊히 이해하여 유(有)를 불유(不有)라고 설할 때 그 불유에도 취착하지 않는 이근인은 되어야 할 것이다.

정념(正念), 정사유(正思惟)의 마음도 내지 말라고 한 것은 전술한 바와 같이 한량없는 마음에 일부분의 특별한 구역을 만들어 버리는 것이 되며, 정념,정사유로 한정된 마음을 세우니 그렇지 못한 마음도 함께 생하여 분별짓는 행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무슨 마음이든 지으면 이미 어긋나는 것이다.

짓지 아니하고 있는 가운데 이미 본심이 구현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 담림편집,박건주 역주 <보리달마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