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名)에 즉(即)하면 명(名)이 아니고,상(相)에 즉하면 상(相)이 아니다

2020. 1. 2. 19:45성인들 가르침/초기선종법문


[본문]

: 모든 것이 이미 공(空)인데 누가 도를 닦습니까?

: 누군가 있으면 반드시 도를 닦게 된다. 아무도 없다면 도를 닦음도 없을 것이다. '누구'라고 한 것은 '아(我)'이다.

만약 무아(無我)라면 사물을 접촉하여 시비(是非:옳고 그름)가 생기지 않을 것이다. 옳다고(是)함은 내가 이를 옳다고 보는 것이지 사물이 옳은 것은 아니다. 그르다(非)라고 함은 내가 스스로 이를 그르다고 보는 것이지 사물이 그른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풍우와 정(靑),황(黃),적(赤),백(白) 등과 같아서 비유하면 알 수 있는 일이다.

호(好)란 내가 스스로 이를 호(好)라고 보는 것이지 사물이 호(好)한 것이 아니다. 왜 그러한가? 마치 안이비설(眼耳鼻舌). 색성향미촉(色聲香味觸) 등과 같아서 비유하면 알 수 있는 일이다.

[해설]

일체 모든 것은 옳음과 그름, 좋음과 좋지 않음의 분별이 일어난다. 무아(無我)임을 안다면 닦아야 할 도가 어디에 따로 없고, 닦을 자도 어디에 따로 없다.

아(我)가 있다는 생각이 멸한 자리에 진실한 아(我)가 드러나니 그 자리는 영원하고(常), 한량없는 즐거움(樂)이 샘솟고, 그렇게 진실하고 영원하며(常) 즐거움(樂)이 샘솟는 아(我)가 없지 않아 분별을 떠나 청정하다(淨)

이 상락아정(常樂我淨)을 열반의 네 가지 공덕이라 한다. 무아(無我)임을 알아 분별떠난 자리에 진실한 아(我)가 드러남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거짓의 아(我)는 분별하는 자로서 있다고 생각되는 아(我)이고, 또한 대상이 되는 아(我)이다. 진실한 아(我)는 본래 무일물(無一物)인 자리이니 없지 아니하되 무엇이 있다 할 것인가.

[본문]

: 경(유마경)에서 이르길, '비도(非道)에 머물러 불도(佛道)를 통달한다'고 하였습니다.

[譯註 : 유마경 불도품 제8에서 인용함, "문수사리보살이 유마힐에게 말하였다. '보살이 어떻게 해서 불도를 통달합니까?' 유마힐이 말하였다. '만약 보살이 비도(非道)를 행하면 이것이 불도(佛道)를 통달하는 것입니다']

: '비도(非道)를 행한다'는 것은 명(名)을 버리지 않고, 상(相)을 버리지 않는 것이다. '통달한다'는 것은 명(名)에 즉하여 명(名)이 없고, 상(相)에 즉하여 상(相)이 없는 것이다. 

'비도(非道)를 행함'이란 탐욕을 버리지 아니하고, 애착을 버리지 아니함이다. '통달함'이란 탐욕에 즉하여 탐욕이 없고, 애착에 즉하여 애착함이 없는 것이다. -천순분,

고(苦)에 즉하여 고(苦)가 없고, 낙(樂)에 즉하여 낙(樂)이 없는 것을 이름하여 '통달함'이라 한다. 생(生)을 버리지 아니하고, 사(死)를 버리지 않는 것을 '통달함'이라 한다. '비도에 머무름'(으로써 통달함)이란 생(生)에 즉하여 생함이 없고, 생함이 없음을 취하지도 않으며, 아(我)에 즉하여 무아(無我)이고, 무아를 취하지도 않는 것이니, 이를 이름하여 '불도를 통달함'이라 한다. 만약 능히 비(非)에 즉하여 무비(無非)하고, 무비를 취하지도 않으면 이를 이름하여 '불도를 통달함'이라 한다. 요컨대 심(心)에 즉하여 무심(無心)함을 이름하여 '심도(心道)'를 통달함'이라 한다.

[해설]

명(名)과 상(相), 탐욕과 애착 등을 버리는 것을 도(道)라고 하지만, 이는 버릴 것이 따로 있다는 것이 되고, 그래서 버림을 취함이 있고, 취할 바도 따로 있다는 것이 되어 취할 바도 없고 버릴 바도 없다는 일심(一心)의 뜻에 어긋난다.

본래 한 물건도 없었고(本來無一物), 본래 무엇이 있다 할 바가 없다. ​이러한 법도 얻을 바 없는 것이다.

명(名)과 상(相), 탐욕과 애착도 그 바탕은 명과 상이 아니고, 탐욕과 애착이 아닌 까닭에 명과 상, 탐욕과 애착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그래서 명상과 상 등을 벗어나는 길이 명과 상 그 자리에 있다. 그 자리를 떠나 어디에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금강경>에 "만약 모든 상이 상이 아님을 알면 바로 여래를 봄이다."고 하였다. 명(名)과 상(相), 탐욕이 수중월(水中月;물속의 달그림자)과 같아서, 있다고 할 바가 없는 것인데, 수중월을 제거하고자 하여 호수의 물을 다 퍼내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아야 한다. 명과 상, 탐욕 등에 즉하여 명과 상이 없고, 탐욕 등도 없음을 증(證)하니, 이것이 진실로 통달함이다. ​

                                                          -담림 편집,박건주 역주 <보리달마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