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11. 21. 10:39ㆍ성인들 가르침/초기선종법문
[본문]
묻는다.
"어떤 것이 이제(二諦; 俗諦, 第一義諦) 입니까?"
답한다.
"비유컨대 아지랑이와 같다. 어떤 이는 아지랑이를 보고 물이라고 생각하나 실은 물이 아니고 이것은 아지랑이다.
이제(二諦)의 뜻도 또한 이와 같다. 범부는 제일의제를 세제(世諦)로 본다. 성인은 세제(世諦)를 제일의제로 본다.
까닭에 경에서 설한다. '제불(諸佛)께서 법을 설하심에 항상 이제(二諦)에 의거하신다. 제일의제(第一義諦)가 그대로 세제(世諦)이고, 세제가 그대로 제일의제이다. 제일의제가 그대로 공이다.
만약 상을 봄에 있으면 바로 반드시 모두 버린다. 아(我)가 있고, 마음이 있고, 생이 있고 멸이 있으면 역시 응당 바로 다 버려야 한다."
묻는다.
"어떻게 모두 버려야 하는 것입니까?"
답한다.
"만약 법에 의거하여 간(看)함이 있다면 바로 황제가 내려준 소중한 것(소중한 제일의제가 뜻하는 것)을 놓쳐 버리는 것이 되니 일물(一物)도 봄이 없어야 한다. 까닭에 <노자도덕경>에 이르길, '덕을 세움에는 덜어내어 텅 비게 하는 듯하라 !'고 하였다"
[박건주님 해설]
이제(二諦)는 세간의 진리인 속제(俗諦)와 출세간(出世間)의 진리인 제일의제(第一義諦 : 勝義諦)이다. 속제가 상대 분별의 세계라면 제일의제는 언어분별을 넘어선 세계이다. 그렇다고 해서 제일의제가 속제를 떠나 어디 다른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다. 속제를 올바로 진실하게 보면 그 자리가 실은 제일의제이다. 잘못보면 아지랑이가 물로 보이지만 올바로 보면 아지랑이일 뿐 어떤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어서 공(空)이라 한다. 그래서 아지랑이에서 공임을 알면 제일의제이되, 공이라는 생각을 낸다면 이 또한 망념이다. 아지랑이를 물로 보는 것과 공으로 보는 두 법을 대비시켜 속제(俗諦)와 제일의제(第一義諦)라 이름한 것일 뿐 양자가 따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공(空)의 뜻일 뿐이며, 공의 뜻은 생각과 말의 길이 끊어졌다는 것이다.
공인 뜻이 제일의제인데 어찌 제일의제에 향하거나 붙잡거나 머무를 수 있겠는가.
처음 공이라는 법상(法相) 내지 지혜에 의거하여 수행하는 단계도 거치긴 하나 궁극에는 그 법상도 버려야 한다. 어떠한 법상의 지혜에 의거할 때 그 지혜 법상을 능지(能智)라고 하는데 궁극에는 그 능지를 버려야 당념당처의 본심 뿐이게 된다. 일체의 상을 넘어선 자리가 심체(心體)이고 본각(本覺)인데 아무리 불설(佛說)의 법상이라 하더라도 이에 향하거나 취착하거나 머무르고 있으면 본심을 가리는 장막이 되는 것이다. 또한 본심은 능(能;주관)과 소(所;객관)를 떠나 일심(一心)인데 무슨 법상에 향하거나 일으킨다면 일심의 뜻에 어긋난다. 이미 제일의제 공의 뜻을 올바로 체득하였다면 그 제일의제에도 머물거나 향함이 없게 되는 것인데 제일의제라는 법상을 붙잡고 의거한다면 그 보배를 놓쳐버리는 것이 된다. 즉 그 뜻을 따르면 되는데 그 법에 의거한다고 하여 그 뜻에 어긋나 버리니 보배를 망쳐 버려 망념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이러한 잘못을 범하기 쉽기 때문에 대승경론에서는 곳곳에서 경계하고 경계한다.
-박건주 역주 <보리달마론, 이입사행론, 잡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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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이제
[二諦]
제(諦)는 진리를 뜻함.
(1) 진제(眞諦). 분별이 끊어진 상태에서, 있는 그대로 파악된 진리. 분별이 끊어진 후에 확연히 드러나는 진리. 직관으로 체득한 진리.
(2) 속제(俗諦). 분별과 차별로써 인식한 진리. 허망한 분별을 일으키는 인식 작용으로 알게 된 진리. 대상을 분별하여 언어로 표현한 진리. 세속의 일반적인 진리. 세속에서 상식적으로 알려져 있는 진리. 세속의 중생들이 알고 있는 진리.
이제(二諦) 각각의 내용에 대해서는 경론(經論)에 따라 여러 설이 있음.
[네이버 지식백과] 이제 [二諦] (시공 불교사전, 2003. 7. 30., 시공사)
세제
[世諦]
<해설>
찬드라키르티는 『입중론』에서 '바른 인식은 승의(勝義, tattva)이며, 허망한 인식은 세제(世諦, samvriti-satya)'라고 한다. 즉 세제는 중생이 가진 무명이라는 장애에 의해 지혜의 뿌리가 덮여서 허망하게 인식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세제 또한 중생들이 소통하는 일상적 차원의 '진리(satya)'이다. 세제에는 그러므로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정상적인 감각 기관에 의한 인식이고, 다른 하나는 손상된 감각 기관에 의한 인식이다. 손상되지 않은 감각 기관에 의해서 파악되는 것을 세제라고 하고, 그 외의 것은 거짓된 것[mithya], 혹은 비세간(非世間, aloka)으로 불린다. 바바비베카 역시 『중관의집(中觀義集)』(Madhyamartha Samgra-ha)에서 두 종류의 세속을 나누고 있다. 즉 일의 작용(artha-kriya)을 할 능력이 있는 존재를 실세속(實世俗)으로, 그리고 현상하더라도 일의 작용을 할 능력이 없는 것을 사세속(邪世俗)으로 구분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세제 [世諦] (나가르주나 『중론』 (해제), 2004.,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제일의제의 의
다른 것에 의해서 아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아는 것이며[自知不隨他, apara-pratyaya], 적정(寂靜, santa)하며 온갖 희론(戱論, prapanca)에 의해서 희론되지 않고, 분별을 떠나 있으며[無分別, nir-vikalpa], 무차별적[無異, ananartham]이다. 이것이 진리의 실상(實相, tattvasya laksanam)이다.(MS 18.9) // 여러 성현들은 뒤바뀜[顚倒]의 성품을 진실하게 아는 까닭에 온갖 법이 모두가 공하여서 나지 않는 것임을 아나니 성인에게는 이것이 진실이어서 제일의제(勝義諦)라 한다.(MS-p 24.9)
<대표 해설>
제일의제는 불교의 궁극적 진리를 가리킨다. 산스크리크어 paramartha는 뛰어나다는 의미의 parama와 뜻이라는 의미의 artha의 복합 명사이다. 찬드라키르티와 바바비베카는 이것을 출세간의 무분별지로 해석하고 있다. 중론 18장 9절에서 다른 것에 의해서 알 수 없다는 것은 진실상이 일상적 경험과 인식의 영역 내에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즉, 상대적인 분별지에 의해 객관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주체적으로 자각되고 증득되는 진리임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즉 공성이란 주관과 객관의 부딪힘에 의한 상대적인 분별이 없는 절대적 지혜에 의해 자각되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공성(空性, sunyata)의 세계라고 할 수 있다. 적정하다는 것은 개념적 사유과정과 망상이 없는 상태를 말하며, 분별을 떠나 있다는 것은 주객의 나뉨이 없음을, 그리고 여기서 무차별이란 인식의 다양성이 제거된 상태를 가리킨다.
<상세 해설>
제일의제에 대한 여타 경문의 정의를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 "데바푸트라여, 만약 승의로서 제일의제가 몸과 말과 생각의 대상이 된다면, 그것은 제일의제라고 할 수 없다. 그것은 세속제이다. 데바푸트라여, 제일의제는 일체의 세속을 초월하고, 불생불멸(不生不滅)로서 말의 대상과 주관, 앎의 대상과 주관을 떠난다."(Satyadvayavatara, 『入中論』 p. 110) "제일의제는 말로 할 수 없는 것으로서 알 수 없고, 볼 수 없고, 보일 수 없다."(『入菩提行論疏』大正藏 11, p. 378b) "제일의제란 무엇인가? 인식의 활동조차 없는 곳이다. 거기에 어떻게 모든 문자의 논의가 있을 것인가?"(Prasanapada, p. 374) "여래께서 '문수사리여, 승의를 설하여 보라'고 이르자, 문수사리가 말없이 묵묵히 앉아 있으므로 여래는 '문수사리여, 그대는 승의를 잘 설했다'고 말씀하셨다."(『般若燈論釋復釋』, 제18장)
[네이버 지식백과] 제일의제의 의미 (나가르주나 『중론』 (해제), 2004.,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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