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8. 28. 20:13ㆍ성인들 가르침/초기선종법문
외인이 질문 했다.
"나의 눈앞에 펴쳐진 현상 사물(境界)을 보지 않고 사물의 명칭과 그 의미를 분별망상으로 헤아리지 않는다면 마음이 고요해지고 망상이 끊어져 대상에 대한 분별이 사라질 것인데, 어찌 이것이 마음 자체가 고요한 가운데 관조하는 진여삼매(眞如三昧)가 아니겠습니까?
이에 혜사 스님이 대답했다.
"그대가 깨달음을 성취할(證心) 때에 청정한 마음 자체가 스스로 (청정한 마음을 증득할 것인가(自證).
아니면 다른 어떤 것을 인연으로 하여 (청정한 마음을) 증득하는 것인가(他證),
또는 청정한 마음이 의식을 증명하는 것인가(證他)."
만약 청정한 마음이 스스로 (마음의 자체를) 증득할 수 있다면 굳이 지관을 수행하지 않아도 적정(寂靜)한 마음의 자체를 증득할 수 있다. 만약 그렇다면 일체 중생 모두가 열반적정을 구하지 않아도 마음이 열반에 안주해 있어야 한다.
만약 저절로 증득하는 것이 아니고 마음 자체가 의식을 사용하여 청정한 마음의 자체를 스스로 증득하는 것을 자증(自證)이라고 한다면, (수행해야겠다고) 생각을 일으킨 것은 의식이므로 (마음의 자체를) 증득하는 주체(能證)인 의식과 증득할 대상(所證)인 청정한 마음이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경우는 증타(證他)의 관계인데, 어떻게 청정한 마음 스스로 (마음의 자체를) 증득할 수 있다는 논리가 성립될 수 있겠는가.
만약 의식이 (청정한 마음을) 증득하는 것(證他)이 아니고 단지 우리의 청정한 마음이 (망상으로부터 나타난 의식을) 스스로 그치기(自止) 때문에 그것을 자증(自證)이라고 한다면, (수행해야겠다는) 생각을 일으켜서도 안 되고 증득하는 주체(能證)와 증득하는 대상(所證)의 상대적인 구별도 없어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청정한 마음이 스스로 (마음의 자체를) 증득할 수 있겠는가.
만약 <망상을 끊고 청정한 마음을 증득하겠다는> 의식을 일으켰다면 그 자체가 의식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러면 이것은 (의식이 청정한 마음을 증득한) 타증(他證)의 경우가 된다.
만약 '중생은 마음이 자체를 실제로는 모두 증득하고 있지만, 단지 번뇌망상으로 인하여 마음의 자체를 증득하고 있다는 이치를 모른다. 그러므로 망념이 있게 되었는데, 마음 자체의 본래 성품이 스스로 증득된 상태이고 적정한 것임을 알아서 모든 대상 사물에 대해 망상으로 분별하지 않아 망념이 스스로 사라지는 것을 진여삼매(眞如三昧)라고 한다면 이것은 의식이 (마음 자체를 증득하여) 본래 고요하다는 것을 아는 것인가, 아니면 청정한 마음 스스로 본래 고요하다는 것을 아는 것인가.
만약 청정한 마음이 마음의 자체가 본래 고요한 것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알아서 모든 법에 대하여 망상으로 분별하는 작용을 일으키지 않는다면 모든 중생에게는 청정한 마음이 있으므로 본래 고요하다는 사실을 스스로 알 것이다.
그리하여 망상으로 변화하는 의식을 스스로 쉬고 자연적으로 진여삼매를 증득하겠지만,
(止觀을) 수행하지 않는다면 (청정한 일심의 자체를) 증득하지 못한다.
따라서 청정한 마음이 (우리의 일심이 고요하다는 사실을) 스스로 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만약 '의식이 청정한 마음은 본증(本證)이라는 사실을 알면 (바로 망상으로 요동하던)의식이 스스로 소멸한다.
이러한 경우 의식이 스스로 사라진 것일 뿐, 이것은 의식이 청정한 마음을 증득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마음 스스로 청정한 마음을 증득하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의식이 우리의 마음은 본래 청정하다(本證)는 사실을 이해할 때, 청정한 마음을 <상대적으로)보기 때문에 본래 청정하다(本證)는 것을 아는 것인가, 아니면 청정한 마음을 보지 않기 때문에 본증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인가.
(譯註 : 현상계의 대상을 반연하여 그것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인 양 분별하면서 끊임없이 생사의 세계로 치달리게 하는 것은 의식의 허물이지만, 눈앞에 전개되는 현상이 실제가 아닌 허상이라는 사실을 알아서 그것이 왜 허상인가를 통달하여 깨달음을 성취하는 것도 역시 의식을 통해서 가능하다)
만약 '청정한 마음을 (상대적으로) 보지 않는 것이 본증(本證)임을 아는 것'이라고 한다면 각심(佛心)을 보지 않고도 응당 부처님의 본증인 마음을 알아야 한다.
만약 의식이 청정한 마음을 (상대적으로) 보기 때문에 본증이라는 사실을 안다면 우리의 청정한 마음은 (상대적으로) 볼 수 있는 모습이 된다.
그렇다면 무엇때문에 <기신론>에서는 '우리의 진여 일심은 망상 분별로 나타난 차별적인 모습(心緣相)을 떠나서 존재한다'고 했으며, 또 경전에서 (우리의 청정한 마음은) 의식을 가지고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더구나 의식을 가지고 분별하여 알 수 있는 그런 모습(心境界)도 아니다'라고 했겠는가.
이상에서 말한 것을 바탕으로 (우리의 청정한 마음에 대하여) 설명한다면, 의식을 가지고는 결코 청정한 마음을 볼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의식으로 청정한 마음을) 본다거나 보지 못한다고 하는 그런 이치(道理)는 없다.
가령 (의식을 가지고) 우리의 마음 자체는 본래 고요하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마음의 자체가 본래 증득되는 것일지라도 역시 망상은 쉬지 않을 것이다.
(즉 의식을 가지고 우리의 마음 자체가 본래 청정하다는 사실을 안다고 하더라도 망상으로 분별하여 마음을 상대적으로 관찰하는 것이므로 망상임에 입증된다. 결국 끊임없이 (상대적인) 대립을 일으키기 때문에 망상은 영원히 쉴 수가 없다. 따라서 반드시 의식을 사용해서 청정한 마음을 의지하여 지관을 닦아야 절대의 경지인 청정한 마음을 증득할 수 있다)
- 남악혜사 원작, 원경 옮김, <대승지관법문>(불광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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