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는 지켜 볼 뿐이오

2018. 8. 24. 09:48성인들 가르침/니사르가다타 마하리지


질문자 : 서양신학에서는 두 가지 이익이 있는 큰 희생의 법칙이 있습니다. 우리가 나쁜 습관을 희생하면 그것이 재발하는 것을 극복할 뿐더러 의지력도 기르게 됩니다. 나쁜 습관을 희생하는 또 하나의 이익은 무엇을 요구해야 할 때가 되면 그것이 확실히 주어질 거라는 것입니다. 이 법칙은 선생님께도 적용이 됩니까?

마하리지 : 그말은 완전히 맞는 것 같소. 의지력이 커지고, 그대가 바라는 것이 주어질 것이오. 희생이란 그대 자신을 포기하고 내주는 것이오. 더 고차적인 표현으로 그것을 무집착이라고 하는 것이오.

질문자 : 선생님께서는 저희들이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먼저 무엇을 포기하라고 일러주시겠습니까?

마하리지 : 그대가 여기 왔다는 그 자체가 나는 그대가 평범한 사람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하오. 나는 그대가 여기 오기 전에 이미 충분한 정신적인 공부를 했을 것으로  판단하는데, 그래서 무엇을 포기하라,말라 등의 말로서 구체적인 방편을 대놓고 그대에게 말하고 싶진 않소, 왜냐하면 그대의 식견이 아주 높은 것 같고, 보통사람하고는 좀 다른 평범한 구도자가 아니라는 것을 믿기 때문이오. 그대는 고매한 지성을 가지고 있는 것 같고, 그래서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오.

질문자 : 그렇게 말씀하시면 제가 그 수준에 맞추어 따라가기에 어렵습니다.

마하리지 : 어떤 수준에 맞추어 나가라고 내가 요구하지는 않겠소. 단지 존재하는 것을 보라고 할 뿐이오.

질문자 : 희생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는 데 도움이 된다고 한 이분의 질문과 관련하여, 원하는 것 자체가 하나의 습관 아닙니까? 원하는 것은 무지에서 나오는 것 아닙니까?

마하리지 : 빗방울이 떨어지는데, 비는 떨어지는 것이 그 성품이고, 바람은 부는 것이 그 성품이 아니겠소? 몸과 마음의 동일시가 있는 한 무엇을 원한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오. 그것을 초월하고 나면 어떤 원함도 없을 것이오.

질문자 : 제 경험으로는 제가 몸-마음에서 초연해지면 질수록, 덜 원하게 되고, 저의 욕구가 단순해집니다.

마하리지 : 초연해진다고 생각하는 것도 정확한 것은 아니오. 왜냐하면 그대는 이미 초연하니까요, 에고가 완전히 해소되면 그대는 무수한 몸들을 사용하게 되오.

질문자 : 알면서 말입니까, 모르면서 말입니까?

마하리지 : 모든 것이  현현되지만 어떤 개인성도 없소. 그것은  일체에 두루하기 때문에 알면서 그렇게 할 필요가 없소.

질문자 : 그냥 일어나는 것인가요? 알고 모르고가 없습니까?

마하리지 : 그렇소. 이러한 갈등이 어째소 일어나는 것이오? 우리 둘 사이에 지금 왜 논쟁을 하고 있소? 사람들은 깨달음법의 어떤 심오한 개념을 가지고 여기를 방문하는데, 그들은 자기들이 영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고는, 내가 자기들에게 분명한 인가를 해주기를 바라오. " 응, 당신은 깨달았소"라고 말이오. 나는 그렇게 하지 않소. 나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개념을 박살내 버리오. 그래서 언쟁이 벌어지는 것이오, 불협화가 이렇게 시작되는 것이오.

질문자 : 예, 제가 여기 온 것도 이런 대결을 하기 위해서 입니다. 하지만 마음은, 개념들을 붙들고 있는 이것은, 두렵습니다. 의지만이 저를 지탱해 줍니다.

마하리지 : 그 의지력을 아는 자는 누구요?

질문자 : 마하리지께서 그 아는 자에 대해서 물으신다면, 제 마음은 언제나 어떤 답변을 내 놓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보고 있고, 최선을 다해서 노력하고 있습니다.

마하리지 : 그건 좋소. 나는 그대가 저 마음-의식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소.

질문자 : 저도 압니다.

마하리지 : 그 '나'를 알도록 노력하시오.

질문자 : 예, 제가 처음 여기 온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제 마음이 아주 흥분되면서, 많은 질문이 올라 왔고, 마하리지님과 함께 있다는 느낌은 어떤 것일까 하는 생각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마음의 장난이라는 것을 아주 분명하게 보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매일 아침 질문들을 가지고 여기 오는 것은, 저 개인적으로는, 마음의 장난이라는 것을 압니다. 저로서는 그것이 논쟁의 형태이어야 합니다.

마하리지 : 이제 그대는 마음의 성질을 이해 했으니 평안을 이루었습니까?

질문자 : 그런 순간들도 있었지만 그리고나서 조금 있다가 마음이 다시 헤멥니다.

마하리지 : 그대는 자신이 마음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소. 마음의 장난을 지켜보는 그 상태에는 그전부터 도달했소, 아니면 여기 오고 나서 도달한 것이오? 

질문자 : 그전부터입니다. 그것은 저의 정신적 성장과정의 일부였습니다. 10년전에 저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다. 선생님의 말씀을 듣건대, 이른바 참스승(사드구루)는 제가 이름 붙이지 못하는 이것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저는 10년 동안 그 부름을 따라왔습니다. 저 내적인 것과 제가 마하리지님과 함께 있으면서 체험하는 것 사이에는 아무 차이가 없습니다. 저는 기법에 관한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제가 눈을 감고 '내가 있다'안에 안주해 있으면 처음에는 어둠이 있는 것이 관찰됩니다. 그 어스름이 명료함으로 바뀔 수 있고 그것이 무한이 될 거라는 것을 압니다. 어떻게 하면 그것을 성취할 수 있습니까?

마하리지 : 왜 그것을 바꾸고 싶어 합니까?

질문자 : 만일 그것이, 그 어둠을 자각하는 자가 그것을 빛으로 바꿀 수 있는 능력 범위 내에 있다면,  왜 어둠 속을 헤메겠습니까? 빛을 즐길 수 있지 않습니까?

마하리지 : 그대가 누구기에 그것을 빛으로 바꾼다는 것이오? 몇 가지 '빛 중의 빛'이 흐르는 것은 어둠 속에서인데, 그것은 어둠이 아니라 감로의 웅덩이요. 그 속으로 뛰어드시오. 그리고 그냥 내버려 두시오. ​

질문자 : '내가 있다'의 상태에서 직면하는 또 하나의 문제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그 상태가 머리 속에 들어 있다고 느껴지는데, 그것이 하나의 엄청난 힘으로 커지는데, 그것을 풀어주면 실제로 의식이 흘러넘쳐 예컨대 방 하나를 가득 채웁니다. 그게 맞습니까?

마하리지 : 몸-의식 없이 이야기 하시오. 그대가 방안으로 저절로 흘러나온다고 말하는 그 의식은 방과 우주를 완전히 채워버리오.그리고 그것이  안정되는 과정에서 전체 우주로 확장되는 것이오.그것이 충분히 확장되고 나면 부라마 란드라, 즉 브라마의 혈(穴, 구멍)안에서 안정되는 것이오.

질문자 : 꾼달리니 요가나 샥티파 수도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진인은 수련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통해, 그들이 말하는 꾼달리니를 반드시 깨우게 됩니까?​ 


마하리지 : 진인은 꾼달리니에 대하여 전혀 어떤 흥미도 없소. 그대가 태어나기 이전에 꾼달리니가 어디 있었소? 이 꾼달리니는 그대가 다 지각하는 것이고, 다 그대가 보는 것이오. 그들은 그것을 다른 이름으로 부르는 것 뿐이오.

질문자 : 그러나 어떤 요기들은 일곱개의 차크라를 통해서 이동하는 - 추측하건데 척추를 따라 상승하는- 어떤 기운(氣運)에 집중합니다.

마하리지 : 그 말은 맞긴 합니다만, 그대가 태어나기 이전에는 그것이 없어소. 그것은 생각에 지나지 않소.


질문자 : 그러면 그들은 모두 속아서 꾼달리니 요가를 공부하고 있습니까?


마하리지 : 뭔가를 수련하고 싶은 사람은 그런 것을 해도 될 것이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이오? 제로, 무(無)인 것이오.


질문자 : 말씀하시는 것으로 미루어 보면 그런 것들은 다 의식 안에서의 장난이고, 만약 우리가 의식과 자신을 동일시하기로 하면 무수한 게임을 벌릴 수 있겠습니다.


마하리지 : 그 사람이 선택하거나 선호하는데 따라서 그 직업이나 유희를 추구하게 되겠지요.


질문자 : 저희가 해 온 일은 진짜 게임을 발견하려는 것이었는데, 그것은 다 의식 안에서의 게임에 머물러 있습니다.


마하리지 : 그대는 게임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지켜 보고 있을 뿐이오. (195)


                                                        -니사르가다타 마하리지 대담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