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자에게 헌신하는 사람은 자신도 성자처럼 된다

2018. 8. 13. 09:53성인들 가르침/시다르메쉬와르 마하리지



몸과 말과 마음으로 신의 발에 순복한 사람들은 신처럼 되었다.

그들이 곧 스승이고, 스승의 제자들이다.

그들은 자신의 몸과 말을 받치고, 대신 그들이 귀중하게 여기는 것을 얻는다.

성자들에게 헌신하는 사람이 그 성자의 복덕을 하사받게 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이런 것이 성자들과 친교하는 결실인 것이다.


우리가 자신의 믿음, 몸, 말 그리고 마음을 스승의 발밑에 내맡기고 헌신하면 원하는 목표를 얻을 수가 있다.

마음이 영적인 수행에 이끌리고 그 속에 몰입하는 것, 그 자체가 영광스러운 일이다.

이와는 반대되는 태도는 세속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주 크리슈나와 접촉했던 많은 사람들은 그 접촉이 어떤 사연으로 일어났던 간에 모두 자유러워졌다.

그의 생전에도 어떤 사람들은 그와 대립하기도 했다.


그들은 감각대상을 통해 얻는 쾌락을 추구했고, 또한 이기적이기도 했다.

감각대상에 사로잡힌 사람은 그런 쾌락들만 탐닉하게 된다.

또한 그런 사람들은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관능적 쾌락만을 탐닉하는 사람들과 가깝게 사귀게 된다.

그런 사람들은 무형상 상태로 향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대상 없는 것'에 전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을 증오한다.

이 증오에는 몇가지 이유가 있다.


대상들로 가득 찬 환경에서 태어나 거기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만약 그것들을 다 뺏앗기면 자신이 죽을까봐 두렵고, 그래서 감각대상에 계속 집착하게 된다.

그는 대상들에 대한 몰두가 없는 상태에 대해서 공포감을 가지고 있고 싫어해서, 이름없고 형상없는 존재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반발하고 또한 비난하게 된다.


만일 남편이 (신에 대한) 헌신의 길로 향하면 아내가 그를 미워하게 된다.

이것은 그녀의 삶에서 관능적 쾌락에 대한 탐욕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이 무의식적인 대립적 태도 때문에, 대상들을 즐기는 데 사로잡혀 있는 사람은 감각기관을 통해 경험되는 쾌락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가장 달콤한 음식이라고 생각한다.


행복이 관능적 쾌락에서 발견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이 기쁨을 포기하고 영성적인 공부로  향하지 않는다.

우리를 실재로 향하게 하고 진아 깨달음을 획득할 수 있게 도와주는 유일한 음식은 무욕이다.

무욕이 되는 사람이 그저 세속적인 데 몰두하고 있는 친구나 가족들로부터 미움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지(知)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지혜로워졌다. 나(진아)에 도달하기 위해 모든 부(富),가정, 그리고 그 동안 모았던 일체를 포기하는 사람들은 몸,말,마음과 함께 나(마하리지)와 하나가 된다.


진아지(眞我知) 외에 그 어떤 것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만이 그것을 얻을 수 있다.

이 정도로 나의 헌신자인 사람들은 어디로 눈을 돌려도 브라만만 본다.

그들이 생각을 할 때는 그 생각조차도 브라만이다.

그들은 자신을 볼 때 브라만만을 본다.

 

성자 람다스가 자기 어머니에게 말했다. "브라만이라는 귀신이 저를 사로잡고 있습니다."

이것은 영적인 이해가 가장 성숙한 상태이다.

사람이 다른 어떤 것도 좋아하지 않을 때, 그것을 옳바른 지(知), 완전한 지(知)라고 부른다.

나의 헌신자들에게, 더 이상 가르쳐야 할 것이 아무 것도 남지 않은 그런 완전함의 수준까지 가르침을 받는 사람은 나에게 너무나 소중하여, 내가 그들에게 빚을 지게 된다.


비록 내가 지고아 빠라마트만이기는 하나, 그들에게 빚을 지는 것이나 다름없다.

나는 그 채무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그런 권위, 그런 최고의 지위를 내려주는 것은  성자들에게나 가능하다.

그들이 참스승이다. 브라마,비슈누,시바 같은 신들도 이런 높은 지위는 하사할 수 없다.

시인인 와만 빤디뜨가 비슈누에게 자신을 생사의 속박에서 해방시켜 달라고 청했지만 신은 이렇게 말했다.

"그것은 나의 능력 밖이다. 나는 그대에게 엄청난 부와 높은 지성을 주겠지만, 자유는 줄 수가 없다. 자유를 얻으려면 성자들을 찾아가야 한다. 그들은 그대를 도와줄 수 있을 것이고, 그대는 싯다가 될 것이다. 신들의 임무는 모든 중생들을 쳇바퀴에 올려 그것을 돌리는 것이다. 그 쳇바퀴를 멈추고 해탈을 안겨주는 것은 성자들만이 할 수 있다. 그것이 그들의 능력이다. 그들만이 그대에게 진아지를 줄 것이다" 

성자들이 하는 그 큰 책무의 은혜를 갚기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가치면에서 저 진아지에 견줄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것의 대가로 지불할 수 있는 어떤 돈이나 귀중품도 없다.

신은 말한다. "나는 나 자신의 형상과 나의 존재를 성자들에게 준다. 이마저도 정확하지는 않다. 왜냐하면 실제로 그것을 주는 것은 아니고, 그 성자 자신이 브라만의 상태를 성취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에게 소유되어 있다 ! 성자가 한 말을 실천하고 그 말에 따르면서, 나는 나 자신의 의식의 상태, 나 자신의 지위를 남자, 여자, 심지어 불가촉천민들에게 가지 준다."


'까르마(Karma)' 라는 단어는 행위의 시작을 의미하고, '비까르마(Vikarma)'라는 단어는 행위의 끝남을 의미한다.

이를 위해서는 그 둘 사이에 있는 '니쉬까르마(Nishkarma)' 단계를 알 필요가 있다.

우리는 어떻게 행위를 하면서도 무행위자로 남을 수 있는 지를 알아야 한다.

진실로 우리는 행위하지 않고, 행위한 적이 없고, 행위하지도 않을 것이다.

이것을 알고 이것을 체험하는 것이 니쉬까르마, 곧 무위(無爲)이다.

이것은 그 행위를 하는 자가 없다는 뜻이다.

이 상태에서는 우리가 무행위자로 남는다. 이것을 깨닫는 것이 니쉬까르마 싯디이다.


행위들은 구도자의 삶에서 장애임이 밝혀진다.

따라서 우리는 참스승의 가르침을 듣고 진아지를 성취하여 '무행위자'의 상태를 체험해야 한다.

몸과 관련되는 모든 것이 사리질 때, 불멸의 뭔가가 남는다.

그것은 무수한 행위가 이루어짐에도 불구하고 무행위자로 남아 있다.


브라만이 어떻게 그 자신에 대해 무엇을 상상할 수 있으며, 어떻게 무슨 의식을 거행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아는 사람은 수행을 끝낸 것이며, 브라만으로서 안주한다.

이것을 가르치는 사람이 참스승이다.

모두를 보살피는 그 분은 실은 무행위자이다. 환(幻)이 누구에게 영향을 미치겠는가?

그것에 집착하고 있는 사람 뿐이다. 마야는 감각의 만족이라는 음식을 주어 개인을 속박한다.

기소 당한 사람이 범죄를 시인하는 개아를 속박하여 끝없는 탄생을 격게 만든다.


이 바보들이 시인하는 범죄가 무엇인가? 그들은 자신이 감각대상의 노예임을 시인한다.

이 노예상태가 무엇인가?

우리가 이미 많은 쾌락을 즐겨 왔을 것인데도, 그것을 거듭거듭 즐기려는 욕망이 지속되는 것이다.

개아는 감각의 대상들이 실재한다고 생각하며, 진리에 대한 다소의 이해를 가지고 있을지라도 감각대상에서 쾌락을 얻어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런 사람들은 설사 지(知)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걱정하며 이렇게 묻는다. 


"내가 무엇을 더 할 수 있나? 이제 어떻게 행동할 수 있을까?"

여러분이 그런 쓸데없는 의심을 품으면 환(幻)의 노예가 된다.

실은 '어떻게 행동할까, 무엇을 해야 할까'하는 어떤 문제도 없다.

행위와 비행위 모두 상관이 없다. 전체 삶이 하나인데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를 왜 묻는가? 그런 질문은 끝났다.


주 크리슈나는 말한다. "나는 이 니쉬까르마를 깨닫는 자의 하인이다"

또 이렇게 말한다. "나도 브라만을 깨닫는 참스승의 가르침을 받았다. 문제는, 왜 그리고 어떻게 이 필요성이 일어나는가이다. 나는 빠라마트만, 곧 하나인 온전한 지복이자 유일한 실재이다. 무엇이 나와 별개라는 어떤 느낌도 없다.

나의 생명은 도처에 퍼져 있고 만물에 편재한 하나의 전체, 곧 일자성(一字性)이다.

그래서 나조차도 진아를 이해하기 위해 참스승을 찾아갈 필요가 있었다. 진아의 위대한 비밀이 그와 같다.

나는 그러한 '깨달은 자'의 몸이다. 그는 나의 진아(아트마)이다. 모든 깨달은 자들의 진아는 하나이며, 그것이 나의 진아이다. 참스승의 진아와 나 자신은 하나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어떤 의심도 없다. 성자의 신체적 행위는 나 자신의 신체적 행위이다. 나는 화신(브라만에서 하강한 신의 화현)으로 불린다.

왜인가? 나는 브라만을 알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사랑했던 많은 목녀(牧女)들의 자식들이 있었을 것이고, 있을 것이다. 내가 화신으로 불리는 것은 나의 브라만에 대한 지(知) 때문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성자도 실은 나 자신의 진아이다. 그는 나의 또 하나의 화신이다. 그의 지(知)도 그에 더해 증가했고, 따라서 진인은 나보다 더 위대하다. 마치 마차꾼이 그냥 말만 타고 가는 사람보다 분명히 더 우월하듯이 말이다. 이 세상의 다양한 학문들이 더 진보하면서 영적인 지(知)도 진보한다. 그래서 이 세상에 출현한 깨달은 자들은 매우 위대하며, 그대는 그들이 나 자신과 하나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나는 남들에게 브라만에 대한 지(知)를 가르치는 사람들에게 진 빚을 갚을 수가 없다. 어떻게 갚을 수가 있겠는가? 나는 부단히 그들의 시중을 든다. 나는 그들의 집에서 일하는 가정하인이 된다. 그들의 집에서 살고 있는 것은 나이다. 나는, 그의 몸과 말에서 영적인 지(知)가 표현되는 사람의 하인인 것이다."


크리슈나가 말했다. " 우리의 이 대화는 순수한 영적인 지(知)로 불린다. 열 가지 감각기관과 마음으로 심지를 만들어 그 빛으로 이 지(知)의 책을 읽는 사람은 지혜를 성취한다. "

환(幻)은 진아지를 전염병처럼 취급한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이 이 지(知)를 성취하면 다른 많은 사람들을 이끌어 모아서 그 지(知)를 전해주기 때문이다. 환은 스승과 성자들에게 몹시 화를 내지만, 그들의 경우에는 그 화가 아무 효과가 없다. 성자들의 말을 소중히 붙드는 사람은 자신의 많은 조상들을 천도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집안의 어떤 사람이 나에게 전혀 헌신하지않으면 그 조상들이 화를 내어 그를 저주하고, 그의 삶에 어려움을 안겨준다. 브라마와 여타의 신들조차도 진아를 깨달은 성자와 친교하는 사람의 발 앞에 절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성자들의 일을 돕는 데 신체적으로 쓸모가 있었기 때문이다.

달 하나가 수백만개의 별과 동등하듯이, 배워서 깨닫는 사람은 전세계를 해방하는 것이다.


가르침을 듣기는 해도 들은 것에 대해 성찰해 보지 않는 사람의 경우에는 그 청문이 소득이 없다.

청문한 뒤에는 성찰과 명상이 필요하다. 이야기는 끝났을지 모르나 명상은 계속되어야 한다.

구도자들은 부단히 명상에 함써야 한다.

명상과 함께 헌가 찬송(신과 스승에 대한 찬가 부르기)이 늘어나며, 우리의 삶에서 매우 높은 수준의 헌신이 나타난다. 이것을 빠라빡티라고 하는데, 그것은 지고의 헌신이라는 뜻이다.

참스승의 헌신자들은 이 지고의 헌신을 성취한다.

                                                                   -싯다르메쉬와르 마하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