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인 지혜를 전수(傳受)받을 만한 사람

2018. 9. 29. 09:56성인들 가르침/시다르메쉬와르 마하리지



브라만에 대한 깨달음의 표지는 무엇일까?

'나는 이러 이러한 사람이었다'는 정체성이 완전히 사라져야 한다.

그런 때에 우리는 있는 그대로이며, '한 개인'이 아니다.

그럴 때는 고뇌도 없다. 고뇌는 자신을 몸과 동일시하는 사람의 운명이다.

자신이 '누구이다'라는 느낌이 있는 사람에게는 틀림없이 욕망과 고뇌가 있다.


그대들이 브라만을 깨닫게 되면 자신이 무엇이었는지를 기억하지 않는다.

주 크리슈나의 이 조언을 웃다바가 들었을 때 '웃다바'로서의 그의 정체성은 사라졌고,

그는 실재의 지복과 하나가 됬다. 그의 언어기능이 더 이상 동작하지 않았다.

그가 자신을 깨닫자, 그의 '나'는 사라졌다. 몸과의 동일시가 사라졌다.

'나는 일체다'라는 느낌도 사라졌다. '나'도 없고 '너'도 없았다.

그리고 형언할 수 없는 상태가 나타났다.

거기서, 누가 크리슈나가 한 질문에 대답할수 있겠는가?

그 자신이 질문자가 되었고 크리슈나와 웃다바가 합일되었다.

충만함이 남았다.​ 말이 그쳤다.

크리슈나는 웃다바의 상태를 보자 그가 브라만에 완전히 합일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제자가 브라만과 하나가 되면 스승은 아주 즐거워한다.

아들이 큰 부자가 되면 어머니가 즐거워 하듯이, 참스승은 제자가 브라만을 깨달으면 아주 즐거워한다.

스승만이 제자가 브라만을 체험할 때 자신이 어떤 큰 행복을 느끼는지 안다.

주 크리슈나는 행복의 완전함이다. 참스승의 최고의 기쁨은 어떤 제자가 브라만의 지복을 즐기게 되었다는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스승이 제자들에게 영적인 가르침을 주는 전통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제자에게 아무 이해가 없다면 어떤 체험이 있을 수 있겠는가?

제자가 그 체험을 가지면 스승은 즐겁다.

크리슈나는 "나의 웃다바가 의심이 없게 되었다"는 사실이 즐거웠다.

웃다바가 브라만을 깨닫긴 했지만 크리슈나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의 헌신자가 아닌 사람들, 게으른 사람들, 그리고 늘 스승을 비난하는 사람들에게는 이것을 가르치지 말라.

이 지(知)는 인가를 좋아하는 사람들, 세속의 활동에 집착하는 사람들, 또는 베다와 그 밖의 경전들 그리고 스승들에 대한 믿음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꿈 속에서 조차 주어사는 안된다.

이교도들에게는 이 지(知)의 껍대기를 버린 부스러기도 보여주어서는 안된다.

그들에게 조금이라도 준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비헌신자들이 이 지(知)에 접촉하게 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그것이 오히려 그들의 삿된 생각과 삿된 행동을 조장할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훌륭하다고 밖으로 과시하지만 그들의 가슴 속에 아무런 존경심이 없는 사람들을 악당이라고 한다.

이 지(知)는 행동, 말 혹은 생각으로 스승을 증오하는 사람이나, 자신의 가문을 자부하거나 자기 자신의 영리함을 자랑하는 사람에게도 주면 안된다.

이 지(知)는 스승에게 봉사하지 않는 사람에게도 주면 안 되고, 돈은 선뜻 내지만 스승에 대한 봉사로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사람에게도 주면 안된다.

또한 자신의 명성에 대한 자부심이 있고, 그 자신의 속된 기질을 증장하려고 애쓰는 사람에게도 주면 안된다"


어떤 사람들은 스승을 위하여 보통의 하찮은 일들을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여기고, 브라만과의 단일성이라는 드높은 기분 속에 있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겸허한 봉사에서 스승을 속이는 사람들은, 설사 이 브라만에 대한 지(知) 이야기를 듣거나 읽는다 해도 결코 아무 것도 얻지 못한다. 스승에게 어떤 봉사도 하지 않고 그 대신 하인을 보내겠다고 하는 사람이나, 돈을 내겠다고 약속하여 어떤 시주에 대한 헛된 희망을 갖게 하는 사람은 제자로 받으면 안된다.

수업료를 좀 내고 브라만에 대한 지(知)를 좀 얻겠다고 말하는 사람은 제자로 받아서는 안된다.

스승에게 봉사할 일이 있을 때 그 봉사를 하지 않는 사람은 내버려야 한다.

스승에 대한 헌신을 통해서 자신이 자유를 얻을 것이라고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이 가르침을 주어서는 안된다.

스승이 브라만의 화신 혹은 브라만 그 자체라고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가르치면 안된다.

그런 사람은 어차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이 가르침은 비헌신자에게 주어서는 안되며, 스승이 해 주는 좋은 충고를 따르지 않는 사람에게도 주면 안된다.

자신이 스승보다 더 순수하다거나, 스승보다 더 신선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비헌신자와도 대등하게 취급하면 안된다. 그는 스승의 헌신자가 아닌 단순한 사람보다 내면적 삶의 수준이 더 보잘 것 없다. 그런 사람에게는 어떤 지(知)도 주어서는 안된다.

저, 곧 이 지(知)를 주고 있는 주 크리슈나에 대한 사랑이 없는 사람에게는 이 지(知)를 가르치면 안된다.

스승에 대한 믿음 있는 사람들은 브라만에 대한 지(知)에 관심이 있지만, 오만한 사람들에게는 이 가르침을 주면 안된다. 이것은 나의 헌신자들을 욕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지(知)를 주면 안된다.

나의 헌신자들은 바로 나의 생명이며, 그들을 욕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지(知)를 주면 안된다.

나의 헌신자의 하인조차도 존경받을 만 하다.


남들을 욕하다가 성자들을 찾아가서 그들 앞에 절하는 사람은 이 지(知)를 받을 그릇이 되지 못한다.

이런 말을 들으면 여러분들은 이렇게 말할지 모른다. " 그러면 그릇이 되는 어떤 제자도 찾지 못하겠습니다" 

제자는 예리하게 무욕이어야 한다. 그 무욕은 미친 사람의 그것 같아서는 안된다.

감각대상들을 4,5일간 혐오하고 나서 갑자기 감각쾌락에 정신없이 탐닉하는 사람은 그릇이 되지 못한다.

무욕의 태도를 잃은 사람은 자신의 지식에 자부심을 갖게 되어 남들의 결점을 찾기 시작하고, 심지어는 존경할 만한 사람을 비난하는데 몰두한다. 욕과 치열함이 덜해지면 지식에 대한 자부심이 늘어난다.

이 세상에는 두 가지 마음 상태가 있다. 하나는 무욕이고, 또 하나는 대상에 대한 집착이다.

사려분별이 없을 때는 욕망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무욕이 줄어드는 곳에서는 쾌락에 대한 욕망이 늘어난다.

우리가 브라만에 대한 지(知)를 성취하지 못했다면, 물질적 욕망에서 극히 초연해야 한다.

그런 금욕자는 이 가르침을 받을 자격이 충분하다.

단순하게 믿는 사람들과 충실한 사람들도 좋은 덕을 많이 가지고 있다.

마음이 초연한 사람은 누구와 경쟁할 이유가 없다. 그는 실로 요기 중의 왕이다.


                                                   -싯따르메쉬와르 마하리지 어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