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3. 17. 21:38ㆍ성인들 가르침/금강경
범부는 일체 사(事)를 내려놓지 못한다.
어째서 그러한가. 아(我)가 있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금강경에서) 다만 보시를 설함으로써 공부를 시작하는 즉시 아(我)를 깨드리게 했다.
다시 일보를 나아가 경계에서 파하게 한다. 또 다시 나아가 마음이 일어나고 생각을 움직이는 것을 파하게 한다.
앞과(제3대승정종분)에서 대심(大心)을 발하여 곳곳에 머무르지 말라고 설했는데, 이것을 모르는 사이에 듣는 사람을 감화시키고 교화하여 아견을 제거하는 것이다.
범부는 아(我)의 생각이 최고로 중한데, 지금 중생을 위해 장차 아(我)를 던져 버리게 한 것이다.
극히 어리석은 난생(卵生)과 극히 높은 무상(無想)은 막론하고 반드시 다 무여열반에 들게 하고 제도할 것이라는 말은 중생을 교화하여 분별심을 제거하고 바로 육식(六識)과 칠식(七識)에 대해 약을 내린 것이다.
범부가 육도에 윤회하며 벗어나지 못하는 까닭도 육식과 칠식의 부림때문이다.
지금 그것을 변화시키면 바라밀을 이룬다.
발심(發心)은 광대(廣大)해야 한다.
광대하지 않으면 능히 아견을 교화할 수 없다.
수행은 세밀해야 한다.
먼저 광대심을 발해야 세밀한 행(行)을 닦을 수 있다.
고로 반드시 일체중생은 인연으로 생겼고 본래 고요하며 본래 동체(同體)임을 관(觀)해야 한다.
먼저 자기의 습기(習氣)가 중함을 알아 묵묵히 습기를 변화시켜야 수행할 수 있다.
대심을 발했다면 무엇에 의지해서 그 마음을 항복받으라고 설하는가?
대행을 일으켰다면 무엇에 의지해서 응당 머무는 바가 없어야 함을 가리킨 것이다.
수행은 당연히 행(行)을 요하고 머무름을 요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이 공부는 육식과 칠식이 존재할 여지가 없게 하여 진심이 자연히 드러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머무르지 않으면서 머무는 것으로 제4분의 마지막 문장에서 '응당 가르친 바와 같이 머물라(但應如所敎住)'고 설하신 것이다.
-강미농의 '금강경 강의 제4묘행무주분'에서 일부 발췌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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