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5. 13. 09:47ㆍ성인들 가르침/금강경
무한진인의 금강경 이야기(43)
제20분 離色離相分(이색이상분)
須菩提 於意云何 佛可以具足色身見不
수보리 어의운하 불가이구족색신견불
不也 世尊 如來不應以具足色身見
불야 세존 여래불응이구족색신견
何以故 如來說具足色身 卽非具足色身 是名具足色身
하이고 여래설구족색신 즉비구족색신 시명구족색신
須菩提 於意云何 如來可以具足諸相見不
수보리 어의운하 여래가이구족제상견불
不也 世尊 如來不應以具足諸相見
불야 세존 여래불응이구족제상견
何以故 如來說諸相具足 卽非諸相具足 是名諸相具足
하이고 여래설제상구족 즉비제상구족 시명제상구족
"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구족한 몸을 갖춘 것만을 보고 부처라고 할 수 있겠느냐?"
"아닙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말씀하시는 구족한 몸은 곧 구족한 몸이 아니라 그 이름이 구족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가히 구족한 (32)상을 가졌다고 하여 여래라고 할 수 있겠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구족한 상을 갖춘 것을 여래라 볼 수 없읍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말씀하시는 모든 상이 구족되었다는 것은 곧 구족된 것이 아니라 그 이름이 구족된 상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이번 20분의 제목이 이색이상(離色離相), 즉 " 형상과 몸을 벗어난 자리"에 부처님이 계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은연 중에 부처님은 몸이 있고 부처만이 가지고 있는 어떤 특별한 상이 있다고 여기고 있읍니다.
특히 석가부처는 경전에 나온 대로 부처의 몸은 32상 80종호를 갖추고 있다고 알려져 있읍니다. 32상이란 부처님의 몸에 나타나 보이는 큰 특징들로써, 예를 들면 머리 정상부위에 상투처럼 볼록 튀어 나온 육계의 특징으로 부터 시작해서 온몸에 나타난 특별한 표식과 모양으로, 맨밑의 발바닥이 평발로서 수레바퀴가 그려져 있다는 특징까지, 32가지 특별하게 나타나는 육체의 특징을 말합니다.
또 80종호란 남의 눈에는 잘 나타나지는 않지만 미세하게 숨어 있는 몸의 특징들을 말합니다. 이렇게 32상 80종호를 부처님이 갖추어져 있다고 알려져 있는데, 부처님이 아란에게 그런 몸의 특징을 갖추었다고 부처라고 부를 수 있겠느냐고 질문을 합니다.
이것은 수보리로 하여금 지금까지 부처님이 법문한 것을 다시 스스로 재확인해 보도록 복습을 시키는 것이죠. 그랬드니 수보리가 대답하기를, '여래께서 말씀하시는 구족한 몸은 곧 구족한 몸이 아니라, 그 이름이 구족한 몸일 뿐입니다."라고 정답을 말했읍니다.
즉 여래가 말씀하시는 구족한 몸(32상80종호)이라는 것은 단순히 대상으로써 현상화되어 나타난 육체의 특징이라는 것이 아니라, 그 형상의 그림자를 나타나게 비추어 주는, 그 그림자 이전에 있는 모양없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주체인 '그것"(법신)이라는 뜻입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으므로 비록 '구족한 상'이라고 할수없이 말로 표현은 하였지만, 그것은 이원화 현상으로 나타난 그 32상 80종호이 특징이 아니라, 그것을 나타나게 해주는 드러나지 않은 실재(實在,法身)을 말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법신(法身)이라고 부릅니다. 반면에 대상화 현상인 육체를 색신(色身)이라고 부르죠.
무엇인가 어떤 상(相)이 앞에 나타나려면 그 이전에 보이지 않는 주시자가 꼭 있어야 합니다. 만일 그 보는 주체가 없다면 어떤 상이든 대상으로 상이 나타날 수가 없읍니다. 따라서 부처님이 아란이 보이는 대상에 끌려 다니나, 아니면 보이지 않는 주체인 실재(實在)를 이해하고 있는가를 시험하는 질문이며, 아란이 부처님의 뜻에 부합해서 적절하게 대답을 잘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과 정신, 전체 세상은 불교에서는 간단하게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의 오음(五陰)으로 표현하고 있읍니다. 그런데 이 오음은 바로 모든 상(相,정신물질적 현상)을 말합니다. 어떤 상(相)이 나타나려면 그 이전에 무엇인가가 보는 자가 있어야 상(相)으로써 인식이 되는 것이죠. 우리의 몸도 상이고 마음도 상이고, 나라는 느낌도 상(相)이고, 세상도 상(相)입니다. 탄생도 상이고 죽음도 상이고 슬픔도 상이고 분노도 상입니다.
그런데 이 상(相)이 대상으로서 나타나려면 그 이전에 전체 상(相)이 나온 공통된 바탕이 있어야 하고, 또한 그 상을 보는 자 또는 아는 자가 있어야 상(相)이라는 것이 대상으로서 앞에 드러날 수가 있읍니다. 따라서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어떤 상(相) 이 있는 한에는 반드시 알려지는 대상은 아니지만, 모든 것이 주체로서 그 모양없는 보는 자가 항상 지켜볼 수 밖에 없읍니다.
모든 것은 변하지만 변하지 않는 그 보는 무엇이 있기에 변하는 것이 감지가 되는 것이지요. 모든 보이는 상을 보는 것은 보이는 상과는 다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이 모든 것을 봅니다. 모든 소리를 듣는 것은 소리가 아닌 것이 듣는 것이죠. 그것은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항상 드러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소리든, 모양이든, 냄새든, 촉감이든 , 생각이든, 무엇이든지 우리가 인식하는 대상 그 이전에 보이지 않는 주시자가 항시 있읍니다.
따라서 어떤 조건이나 상황에도 구속받지 않고 자유로운 그 주시자가 참다운 나라는 것을, 모든 깨달은 스승들이 깨닫지 못한 중생들에게 가르쳐 주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여기 금강경에서도 바로 그것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구족한 상은 눈에 보이는 대상이지만, 그 구족한 상이 구족한 상이 아니고 이름이 구족한 상이라는 것은 바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 '모양없는 주시자'를 '구족한 상이 아니다'라는 말로 명확하게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부처나 여래는 모양으로 보이는 색신이 아니고 모양이 없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법신이라는 말씀입니다.
어떤 모양이든, 소리든,느낌이든,생각이든, 의식 안에 나타난 것은 일시적으로 여러 조건에 의하여 경계가 만들어져 나타난 것이지만, 전혀 조건화되지 않은 순수하고 모양없는 것은 항상 그 특정한 조건화된 대상의 배경에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어떤 그림이든 간에 그 그림 자체만이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배경에 종이이든, 스크린이든, 공간이든, 어떤 조건을 나타내게 해주는 기본 바탕이 있어야 특정조건화된 상(相)이 존재할 수가 있는 것과 같읍니다.
그러나 그 바탕은 원래부터 있어온 자기 자신이기에 조건화 되지 않아서 인식할 수 없지만, "그 상이 아니다" 라는 말로 바로 그 자리에서 조건지워지지 않은 배경을 표현할 수는 있을 겁니다.
바로 금강경의 " 이것은 이것이 아니고, 이것이라는 이름으로 부를 뿐이다"라는 문장으로 그 보이지 않는 배경을 알아차리도록 보이지 않는 내면을 향해서 "손가락"표시를 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위 본문에서 상부 문장은 "부처"라고 지칭하고, 하부 문장은 "여래"라고 각기 다르게 지칭하였는데, "부처"라는 명칭을 쓴 문장은 석가모니 부처의 개인의 육체적 특징을 표현한 것이고, '여래'라는 명칭을 쓴 문장은 석가모니 부처의 정신적 측면의 특징을 구분하여 표현하려고, 각기 다른 명칭으로 부른 것 같읍니다.
이 부분에 대한 육조스님의 해설을 들어 보겠읍니다.
" 부처님의 뜻은 중생들이 법신을 보지 못하고 다만 32상 80 종호의 자마금(紫磨金)의 몸만 보아서 이것으로 여래의 진신(眞身)을 삼을까 염려되어, 이런 미혹을 없애기 위하여 수보리에게 물으시되 "부처님을 가히 색신이 구족한 것으로써 보느냐"하시니 32상은 곧 색신이 구족함이 아니고 안으로 32청정행을 갖추어야 이를 색신이 구족하다고 하니, 청정행이란 곧 육바라밀인 것이다. 오근중(五根中)에서 육바라밀을 닦고 의근(意根) 가운데서 정(定)과 혜(慧)를 쌍으로 닦아야 이를 색신이 구족하다고 말하니, 여래의 32상만 좋아하고 안으로 32청정행을 수행하지 않으면 곧 구족색신이 아니요, 여래의 색상을 좋아하지 않고 능히 스스로 청정행을 가지면 또한 색신이 구족하다는 이름을 얻느니라." (오근 *육바라밀 + 정과 혜 = 32청정행)
-무한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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