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6. 10. 10:06ㆍ성인들 가르침/금강경
무한진인의 금강경 이야기(44 )
第21分. 非說所說分(비설소설분)
須菩提 汝勿謂如來作是念 我當有所說法
수보리 여물위여래작시념 아당유소설법
莫作是念 何以故 若人言 如來有所說法
막작시념 하이고 약인언 여래유소설법
卽爲謗佛 不能解我所說故
측위방불 불능해아소설고
須菩提 說法者 無法可說 是名說法 爾時 慧命須菩提 白佛言
수보리 설법자 무법가설 시명설법 이시 혜명수보리 백불언
世尊 頗有衆生 於未來世 聞說是法 生信心不
세존 파유중생 어미내세 문설시법 생신심부
佛言 須菩提 彼非衆生 非不衆生
불언 수보리 피비중생 비불중생
何以故 須菩提 衆生 衆生者 如來說非衆生 是名衆生
하이고 수보리 중생 중생자 여래설비중생 시명중생
제21분. 설한 바 없이 설한다.
<구라마즙본>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가, '나는 깨달음을 설한 바 있다'고 생각하겠느냐?
수보리야 그런 생각은 하지 마라. 왜냐하면, 만약 어떤 사람이 '여래가 깨달음을 설한 바 있다'고 말한다면 곧, 부처를 비방하는 것이고, 내가 말한 것을 이해하지 못한 까닭이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깨달음을 설한다는 것은 어떤 대상도 없는 것을 설함으로, 깨달음을 설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때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자못 어떤 중생이 오는 세상에, 이 법문을 듣고, 믿는 마음을 내겠읍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수보리야, 그들은 중생도 아니고 중생이 아님도 아니다.
왜냐하면 수보리야, 여래는, 중생은 중생이 아니므로 '중생'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산스크리트 원본>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수보리여, 참으로 여래가 '나는 법을 설했다'라는 이런 (생각을) 내겠는가?"
수보리가 대답했다.
"참으로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나는 법을 설했다'는 그런 (생각을) 내시지 않습니다."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 수보리여, 누가 이와같이 말하기를, '여래는 법을 설했다'고 한다면 그는 거짓을 말하며 사실이 아닌 것에 집착하여 나를 비방하는 것이다.
그것은 무슨 이유에서인가? '설법,설법'이라고 하지만 수보리여, 설법이라는 이름을 얻을 만한 그 어떤 법도 없기 때문이다"
이와같이 말씀하셨을 때 수보리 존자가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어떤 중생들이 있어서 미래세의 후오백세에 정법이 쇠퇴할 시기가 되었을 때에 이런 형태의 법들을 듣고서 수숭한 믿음을 일으키겠습니까?"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수보리여, 그들은 중생이 아니고, 중생이 아님도 아니다.
그것은 무슨 이유에서인가? 수보리여, '중생, 중생'이라 부르는 그들 모두는 중생이 아니라고 여래는 설하였나니 그래서 말하기를 중생이라 하기 때문이다."
이번 21분은 제목이 비설소설분(非說所說分), 즉 <부처는 설한 바 없이 설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래가 지금까지 설한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깨달음이란 전체가 원래 비이원적인 공성(空性) 넘어를 깨닫는 것인데, 석가 부처는 깨달은 분이므로 "나"라는 에고가 사라져서 세상만물이 동일한 공성(空性) 또는 비이원성임을 스스로 증험해 본 분이죠.
그런데 석가부처가 32살에 깨달아서 81세까지 49년 동안에 줄곳 대중들에게 깨달음과 수행에 대해서 설했고, 그 설한 내용이 바로 방대한 팔만대장경으로 후세에 기록까지 되어 있는 줄 우리 중생들은 너무나도 알고 있는데, 여기 금강경에서는 부처 자신이 한 마디도 설한 바가 없다고 말씀하고 있읍니다.
아직 궁극의 아뇩다라샴막보리심을 깨닫지 못한 우리 중생의 입장에서는 부처를 상대적인 한 개인으로 보기 때문에 분명히 부처가 설한 여러가지 법문을 듣고 있읍니다.
그러나 여래는 이러한 우리들 중생의 상대적인 관점을 타파시키기 위해서 지금 위와같이 설법하고 계십니다.
궁극을 깨달은 부처 자신의 입장에서는, 만물은 항상 변화하는 파동성의식의 인연작용에 의하여 잠깐 스쳐지나 가는 연기성(緣起性)의 의식그림자인 것으로, 모든 것이 실체가 없는 환영(空性)일 뿐이라는 것을 깨달은 분입니다.
즉 부처의 비이원적인 입장에서 보면 만물은 경계가 없이 텅 빈 비이원적인 절대공(空) 밖에 없읍니다.
부처에게는 "나"라는 주체가 없기 때문에 "너" 또는 "그것"이라는 따로 떨어져 있는 객관대상도 없으며, 또한 주체와 대상 사이의 일어나는 작용(행위)도 없기 때문에, 일체가 공(空)할 뿐입니다.
마치 맑은 거울면에 온갖 그림자가 비추지만 거울면에는 절대 물들지 않고 머물지 않는 것처럼, 여래에게는 인연에 따라서 그때 그때 자연스럽게 반응하며 비추어주기는 하지만, 또한 그 자신은 아무 것도 하는 것이 없는 것이죠.
주객 이원성 관념 속에 젖어 있는 우리 중생들이 보기에는 분명히 석가부처라는 깨달은 도인이 깨닫지 못한 중생을 위해서 금강경을 설한 것으로 보입니다만, 깨달은 이의 비이원적 입장에서 보면 <설하는 주체>와 <듣는 대상인 중생>과 설한 내용인 <금강경 설법>이 모두 공(空)한 것이기 때문에 아예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금강경 21장에서는 <설하되 설한 바 없음>을 <주체인 여래>, <행위인 금강경 설법> <대상인 중생>의 3요소가 전혀 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강조하는 내용입니다.
즉 금강경을 읽는 구도자는 이와같이 비이원적인 관점을 견지해야 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는 내용입니다.
위의 21분 한글 해석 본문에서 구라마즙본과 산스크리트 원본 해석분을 두 가지를 제시해 논 이유는, 구라마즙본에서는 석가부처와 수보리의 대화형식이 아닌 세존의 직설 형식으로 너무 간단하게 옮기고 있으나,산스크리트 원본에서는 세존과 수보리 간에 서로 대화를 주고 받는 문장형식으로 되어 있어서 일단 산스크리트 원본이 구라마즙본보다 그 이해가 쉽고 빠르게 오므로, 구라마즙본은 참고적으로 보고, 일단 이해하기 쉬운 산스크리트 원본을 제시하여 해설하였읍니다..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수보리여, 참으로 여래가 '나는 법을 설했다'라는 이런 (생각을) 내겠는가?"
수보리가 대답했다.
"참으로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나는 법을 설했다'는 그런 (생각을) 내시지 않습니다."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 수보리여, 누가 이와같이 말하기를, '여래는 법을 설했다'고 한다면 그는 거짓을 말하며 사실이 아닌 것에 집착하여 나를 비방하는 것이다>
석가부처님이 수보리가 어떤 자세에 있는가를 알기 위하여 슬쩍 질문을 던집니다.
즉 석가세존이 지금까지 대중들에게 깨달음법에 대하여 설했다는 생각을 스스로 하겠느냐고 묻습니다. 수보리에게 너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느냐고 묻습니다.
만일 이 질문을 다른 불특정 중생에게 물으면 백이면 백, 여래가 중생들에게 설법하는 것이라고 대답하겠죠.
만일 부처가 "나는 (중생들에게) 법을 설했다"라고 말했다면, 그 말 자체가 주체(여래)와 대상(중생들)과 행위(법을 설함)이라는 주,객 이원화 세계의 3요소가 갖추어진 말입니다. 즉 주,객 이원적인 현상세계 입장에서 한 말이기 때문에 궁극을 깨달아서 주객이원화 현상세계를 벗어난 비이원적인 세계에 있는 석가세존의 입장에서 보면 맞는 말이 아닙니다.
그래서 지금 세존이 수보리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가 슬쩍 떠 보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수보리가 바로 "여래께서는 '나는 법을 설했다'라는 그런 생각을 내지 않는다"고 옳바르게 대답을 했읍니다.
즉 석가세존은 "나"라는 아상(我相)이 완전히 없어진 무아(無我)상태에 있기 때문에 "내가 설법을 했다"는 그런 생각이 전혀 없읍니다.
또한 내가 없다고 여기면 당연히 중생이라는 대상도 없고, 중생을 대상으로 설법을 했다는 생각도 날 수가 없겠죠.
그래서 다시 석가세존이 수보리에게 설명해 줍니다.
"여래가 법을 설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여래가 깨닫지 못하고 주,객 이원화의 중생세계에 머물러 있는 것으로 생각하므로 여래를 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일러 줍니다.
여래는 무아(無我)가 되어 전체와 하나가 된 상태인데, 오히려 여래가 설했다고 말한다면 여래를 무지한 중생의 한 개인으로 깍아 내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므로 거짓을 말하는 것이며, 이원화 대상세계에 집착하고 있는 상태로서, 여래를 비방하는 말이라고 일러 줍니다.
이 첫번째 구절들은 여래의 "나"가 없는 "무아(無我)"상태, 행위하는 주체(나)가 없다는 것을 묘사한 문장입니다.
이 부분에 대한 육조혜능의 해설을 들어 보겠읍니다.
" 범부들의 설법은 마음에 얻은 바가 있음이라. 그러므로 부처님이 수보리에 이르시되 여래의 설법은 마음에 얻은 바가 없음이니라.
범부는 능히 아는 마음을 지어서 설하거니와 여래는 말과 침묵이 모두 같고 발하는 언사는 메아리가 소리에 응함과 같으며, 운용에 맡겨 무심하여서 범부의 생멸심으로 설함과 같지 않으니, 만약 여래의 설법이 마음에 생멸함이 있다고 하면 곧 부처를 비방함이 된다고 하시니라.
유마경에 이르되 대저 설법이란 설함도 없고, 보임도 없으며, 청법이란 들음도 없고 얻음도 없다 하시니 만법이 본래 공함을 요달하여 일체의 명(名), 언(言)이 다 거짓으로 세운 것이라, 스스로 공(空)한 성품 가운데 치연히 일체의 언사를 건립하여 모든 법을 연설하되 상(相)도 없고 함도 없이 미혹한 사람을 깨우고 지도하여서, 이로 하여금 본성(本性)을 보게 하여 위없는 깨달음을 닦고 증득하게 함을 설법이라 이름하니라."
-금강경오가해에서 인용함.
다음은 이원화 현상세계의 주체,대상,행위 3요소 중에서 '행위' 즉 "법을 설했다"는 것도 없다는 내용입니다.
<그것은 무슨 이유에서인가? '설법,설법'이라고 하지만 수보리여, 설법이라는 이름을 얻을 만한 그 어떤 법도 없기 때문이다">
주객 이원화 현상세계에서는 "내가 누구에게 무엇을 설법했다"라고 하는, 행위 주체, 대상, 그리고 행위, 이 삼요소로 구성되는데, 이번에는 그중에서 <행위>, 즉 "법을 설했다"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설법,설법>이라는 것은 <법을 설했다>는 것인데, 여래의 행위 주체가 중생들에게 법을 설했다 라는 말은 이원화 현상세계의 언어표현일 뿐이며, 비이원적인 깨달음의 입장에서는 "나(여래)"도 없고 "너(중생)"도 없고, 또한 "설법"을 한 것도 모조리 없다는 것이죠. 설법 그 자체가 아무 법도 없다는 것을 설한 것이므로 결국 여래께서는 비로소 그 방편마저 지워버려서, 실질적인 진실한 알맹이를 말씀하시는 내용입니다.
다음은 주체,대상,행위 3요소 중에서 "대상"인 <중생>이 없다는 내용입니다.
이와같이 말씀하셨을 때 수보리 존자가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어떤 중생들이 있어서 미래세의 후오백세에 정법이 쇠퇴할 시기가 되었을 때에 이런 형태의 법들을 듣고서 수숭한 믿음을 일으키겠습니까?"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수보리여, 그들은 중생이 아니고, 중생이 아님도 아니다.
그것은 무슨 이유에서인가? 수보리여, '중생, 중생'이라 부르는 그들 모두는 중생이 아니라고 여래는 설하였나니 그래서 말하기를 중생이라 하기 때문이다."
수보리가 여래에게 물은 질문은 미래세의 어떤 중생들이 부처님의 금강경 설법을 듣고는 제대로 믿음을 가지겠느냐고 물었는데, 여래께서는 아예 수보리의 질문 내용은 무시해 버리고 "중생이 무슨 중생이 있겠느냐, 중생이라는 것은 일체 없다"라고 딱 짤라서 말씀하십니다.
맨 위에서 설법을 한 "여래"자신도 없고, 그 다음 "설법"이라는 것도 없으며, 설법을 듣는 "중생"도 없다고, 세가지를 전부 부정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을 가져야 비로소 옳바르게 여래의 설법을 제대로 이해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중생도 아니고, 중생이 아님도 아니다>라고 이중으로 부정한 것은 <중생이 아니다>라고 만 말하면, 혹시나 또 다른 관념의 출구를 찾아서 상상으로 다른 생각을 새끼칠가봐 아예 사고의 통로를 완전히 차단시키기 위하여 <중생이 아님도 아니다>라고 한발 더 나아가서 미리 생각이 흐를 수 있는 통로를 꽉 막아 놓은 것입니다.
'중생이 아니다'라고 말씀해 놓고 다시 맨 마지막에, "그래서 말하기를 중생이라고 말한다"라는 것은 여래가 말씀하시는 "중생"이라는 것은, 바로 말할 수 없는 그 중생의 배경에 있는 보는 성품(주시자)을 가리키는 손가락질임을 가리쳐 주는 것입니다.
즉, 중~생~ 하는 소리를 듣는 그 듣는 성품(聞性) 자체는 중~생~이 아닙니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데서 항상 말없이 지켜보는 전체적인 주시자(見性)인 것이죠.
그것을 중~생~이라는 소리를 듣는 그 최종 듣는 자(주시자)를 반야지혜로 회광반조(回光反照)하라는, 드러나지 않은 말씀이 바로 <중생, 중생이라 부르는 그들 모두는 중생이 아니라고 여래는 설하였나니 그래서 말하기를 중생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라는 말씀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이것을 완전히 이해한다면, 이 세상 온갖 만물, 모기같은 미물과 자기 가 지금 앉아 있는 주변의 모든 잡품들, 콤퓨터 앞에 있는 메모지, 물컵, 볼펜, 난초화분, 모니터, 같은 주변에 널려있는 하찮은 모든 물건들이 모두 그 보이지 않는 마음배경의 주시자를 알려주는 샘님들(손가락표지)입니다. 동시에 일상생활과 이 세상 모든 만물이 하나같이 모두 진리 그 자체가 되며, 모든 만물이 그 자리에서 바로 깨달음을 머금고 있는 자기 자신이면서 또한 스승들이기도 합니다.
'여기'에서는 구차스럽게 무슨 설명이나 어떤 뜻을 더 붙혀보아야, 괜히 불필요한 군더더기만 될 뿐입니다.
금강경은 바로 이렇게 즉(卽)해서 되돌려 반관(返觀)하는 자세를 길러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한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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