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금강경의 "구경(究境)에는 내가 없다"에 대하여(6)

2014. 3. 18. 10:08성인들 가르침/금강경

 

 

 

무한진인의 금강경 이야기(40)

 

17분 구경에는 내가 없다.(6)

[수보리야, 예컨대 몸집이 아주 큰 사람의 비유와 같다."

수보리가 말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말씀하신 사람의 몸이 아주 크다는 것도 실은 큰몸이 아니라 그 이름이 큰 몸일 뿐입니다."

"수보리야, 보살도 또한 이와 같아서 만약 '내가 마땅히 한량없는 중생을 멸도에 들게 했다'고 한다면 이는 보살이라고 이름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수보리야, 실로 어떤 법에도 집착하지 않는 이를 보살이라 이름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래는 '일체법은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없다'고 한 것이다.

수보리야, 만일 보살이 '내가 마땅히 불국토를 장엄하리라'고 한다면 이는 보살이라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여래가 설한 불국토의 장엄은 곧 장엄이 아니라 그 이름이 장엄이기 때문이다. 수보리야, 만일 어떤 보살이 무아의 법에 통달하였다면 여래는 이 사람을 진실로 보살이라고 부를 것이다."]

​전번회 마지막 문장에서는, "일체법은 일체법이 아니다, 그러므로 일체법이라고 이름부른 것이다"라고 부처님이 말씀하셨읍니다.

이것은 '일체법'이라는 전체 현상계를 통틀어서 주객 이원화의 대상물로써 이름 부른 것이 아니고, 단순히 '일체법'이라는 이름으로 모양없는 절대바탕을 가르켜 보여준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의 의미를 또 다른 비유로 반복해서 설명하고 있읍니다.

즉, "예컨대 몸집이 아주 큰 사람의 비유와 같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몸이 장대(長大)하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해석하면 '법신(法身)이 무한(無限)하다'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읍니다.

그런데 여기서 부처님의 언설이 완전히 끝나기도 전에 수보리가 부처님 말씀을 중간에 끊고 자기가 대신 부처님 말씀을 그대로 이어나갑니다.

부처님이 " 수보리야 예컨대 몸집이 아주 큰 사람의 비유와 같다~" 하고 말을 하는 중간에 수보리가 부처님의 말씀이 어떤 뜻인지 알았다고 "세존이시여 여래가 말씀하신 사람의 몸이 크다는 것도 실은 큰 몸이 아니라 그이름이 큰 몸입니다."라고 부처님 대신 수보리가 결론을 말해줍니다.

여기서 사람의 몸이라는 것은 마치 보이지 않는 허공같이 무한한 법신(法身,절대바탕,무아)을 말하며, 법신의 크기는 비교할 수가 없이 크고 무한해서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장대(長大)하다고 부를 뿐이라는 것이죠.

법신은 어떤 형상이 있어서 크다는 것이 아니라,  형상이 없어서 보이지 않기 때문에 무한한 것이며,그냥 장대하다고 부를 뿐, 크다,작다 하는 현상계의 부분적인 분별관념으로 말한 것은 아닙니다.

<수보리야, 보살도 또한 이와 같아서 만약 '내가 마땅히 한량없는 중생을 멸도에 들게 했다'고 한다면 이는 보살이라고 이름 할 수 없다.>

구도자가 아직 주객 이원적인 관념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어서, "내가 수많은 중생을 깨달음으로 이끌기 위해 제도했다"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면, 이는 아직 불법을 완전히 깨달은 보살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내가 깨달았다" 또는 "내가 수많은 무지한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베풀어 깨닫게 했다"라는 생각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아직 완전하게 깨달은 보살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보살은 완전히 "나"라는 에고를 벗어난 깨달은 상태의 도인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나"라는 주체관념이 남아 있어서 "중생" 이라는 ​대상을 상대로 제도했다는 주객 이원적인 생각과 행동을 한다면, 비이원적인 깨달음 상태에 진입을 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아직도 가상 주체감인 "나"라는 아상(我相)의 찌꺼기가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실지로 깨달은 보살은 "나"가 없어졌기 때문에, "나"니 "너"니, 이것이니,저것이니,주체니, 대상이니 하는 주,객 이원적인 분별심이 완전히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수보리야, 실로 어떤 법에도 집착하지 않는 이를 보살이라 이름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래는 '일체법은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없다'고 한 것이다.>

​"어떤 법에도 집착하지 않는다"라는 말은 어떤 현상적인 대상에 이끌리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즉 현상적인 대상에 이끌리지 않는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나"라는 주체감과 '대상'의 분별이 없어져서, 주,객 이원적인 상대세계에서 벗어났다는 것입니다.

주객 이원적인 상대세계에서 벗어났다는 것은 바로 주체인 "나"라는 에고가 없다는 것입니다.

"나"라는 생각에서 가장 넓은 것은 "내가 있다"는 존재의식인데, 이것을 세부적으로 분류하면 아상(我相), 인상(人相),중생상(衆生相),수자상(壽者相)이라고 금강경에서는 말하고 있는데, 이것이 모두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즉 주체라고 여기던 "내가 있다"는 존재의식이 모두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또한 "내가 없다"는 생각조차 없읍니다.

그래서 "나"라는 주체가 없어졌는데, "내가 깨달음을 얻었다"라고 말할 것이 아무 것도 없으며, 또한 '대상"이 모두 없어졌으므로 무엇인가 이루었다는 생각조차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구절에 대하여 금강경 오가해에 나와있는 야부스님의 그 유명한 선시 한수 감상해 봅니다.

<노파의 적삼을 빌려입고 노파의 문 앞에서 절을 하니

예의가 법도에 맞아 이미 충분하도다.

대나무 그림자 뜰 앞을 쓸어도 티끌 하나 일어나지 않고

달빛이 연못을 뚫어도 물은 흔적도 없도다>​

- 절하는 사람과 절 받는 사람이 다 같은 한몸인 것을 알아야 비로소 절이 완전해진다고 합니다. 마치 본체와 작용이 하나가 되면 일체법을 함이 없이 행하고 얻은 바 없이 얻게 된다는 것이죠. 대나무 그림자가 마당을 쓸듯이, 달빛이 연못을 뚫듯이 본체와 작용이 합일되면 만가지 작용을 하면서도 어디에도 오염되지 않고 어떤 흔적도 남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위의 너무나도 유명한 야부스님의 선시에서,

- 노파의 적삼을 빌려입고 노파의 문앞에서 절을 하니, 예의 법도가 맞아 충분하도다- 라는 두 구절은 선가에서 옛날부터 전해오는 ​야화에서 나온 시구절입니다.

그 이야기를 간단히 소개해 보자면, 옛날 어느 산꼭대기 절에서 한 구도승이 참선수행을 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그 절의 인근 마을에 있는 처녀가 절에 불공을 드리러 왔다가 그 젊은 선승의 참선하는 모습에 그만 반해버려서 짝사랑하던 끝에 상사병이 나서 집안에서 몸져 눞게 됩니다.

그런데 그 동네에서 지혜롭기로 이름 난 한 노파가 그 처녀의 상사병이 난 것을 불쌍히 여겨 그 처녀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서 절에 올라가서 그 선승에게 처녀의 마음을  받아 달라고 간곡히 부탁합니다. 그랬더니 그 선승이 자기는 도(道)를 닦고 있는 선승으로써 계율을 어기는 것이기 때문에 여자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고 거절합니다.

그러자 그 노파가 갑자기 "도(道)라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주제에 무슨 도를 닦는다고 주접을 떠냐?"라고 냅다 그 선승에게 핀잔을 줍니다.

그 순간에 갑자기 그 선승이 깨달음이 폭발해서, 자기도 모르게 노파의 웃저고리를 벗어 달라고 하여 자기가 그것을 입고는 노파 앞에서 절을 했다는 야화에서 따온 시구입니다. 말하자면 그 선승과 노파가 일체가 되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묘사한 내용입니다. 그 뒤의 두 구절" 대나무 그림자~"와 "달빛이~"라는 구절은 바로 그 "나"가 없어진 깨달음의 경지를 무위(無爲)적인 측면에서 선적(禪的)인 정서감으로 표현한 내용이라고 볼 수 있읍니다.​

​<수보리야, 만일 보살이 '내가 마땅히 불국토를 장엄하리라'고 한다면 이는 보살이라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여래가 설한 불국토의 장엄은 곧 장엄이 아니라 그 이름이 장엄이기 때문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내가 깨달았다" 또는 "내가 불국토를 꾸몄다"라고 말한다면, 아직도 "나"라는 아상(我相)이 남아 있어서 완전히 깨닫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불국토를 장엄했다"라는 말은 일체 중생을 대상으로 보지 않고 일체가 되어 분별을 다 쉬게되면 이것을 불국토를 장엄하되 장엄한 바가 없다라고 하며, 이것을 진실하게 불국토 장엄이라고 합니다. 진정한 불국토의 장엄은 일체의 분별망상을 다 내려놓고,"나라는 생각"의 사상(四相)이 전혀 없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여래가 설한 불국토의 장엄은 곧 장엄이 아니라, 그냥 장엄이라고 이름만 부른 것이다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17분의 마지막에 부처님은,

  " 수보리야, 만일 어떤 보살이 무아의 법에 통달하였다면 여래는 이 사람을 진실로 보살이라고 부를 것이다."

​바로 이 구절이 17분의 핵심 구절입니다. 금강경 전체 내용의 요지는 바로 "무아(無我)"가 되어야 한다는 내용입니다.

무아가 되기 위해서 어떤 대상에도 머물지 말아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모든 상(相)을 짤라 버리는 금강같은 마음을 길러야 된다는 것이죠.

무아(無我)에 통달하기 위해서는 첫번째로 "육체가 나다"라는 육체와의 동일시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육체가 나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한 구도자가 아무리 애를 쓰며 좌선이나 명상을 수십년간 해도 마음이 안정되는 정(定)을 얻기는 어렵습니다.

두번째는 마음의 나라는 생각,즉 아견(我見)이 사라져야 합니다. 또한 분별심이 조용해져야 합니다.

이렇게 되면 '나라는 생각' 즉 아견(我見)이 엷어졌다고 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이것이 무아(無我)에 통달된 상태는 아닙니다.

"몸이 나라는 동일시생각(身見)과 "내가 있다"라는 생각인 마음의 아견(我見)이 사라지면, 이것을 인무아(人無我) 또는 아공(我空)라고 하며,그러나 아직 완전한 무아(無我)에 통달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구도자는 더욱 깊히 들어가 법무아(法無我) 또는 법공(法空) 상태가 되어야 합니다. 법무아란 바로 "전체세상이 없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것은 "내가 있다"는 존재의식과 절대본체의 경계선 부근입니다. 

그렇다면 법무아(法無我)​ 또는 법공(法空)이 무아(無我)에 통달한 것일까요?

어떤 사람은 법무아(法無我)가 바로 무아(無我)에 통달한 상태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긴 있읍니다. 그러나 그 보다 더 높은 구공(俱空) 또는 인법무아(人法無我)를 궁극의 상태라고 말하고 있읍니다.

이 구공 또는 인법무아가 최고의 삼먁삼보리라고 하며, 공(空)조차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선불교의 어떤 스승들은 이것조차도 모두 버리고 다시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오는 회향(回向)을 최고의 상태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 구공(俱空) 또는 인법무아(人法無我)를 바야흐로 무아(無我)에 통달한 상태라고 말할 수가 있겠지요.​

육체란 자연의 오대원소인 지(地),수(水), 화(火) 풍(風),공​(空)이라는 거친 파동의식의 원소로 부터 나온 것이므로, 육체가 죽으면 각자 원소별로 분해되어 자기가 나왔던 각 오원소로 다시 되돌아가고, 마음이란 부질없이 진동하며 변화하는 거친 파동의식으로 그것이 변형되어 나온 원래의 미세한 우주존재의식으로 돌아가고, 우주존재의식은 육체가 없어지면 마치 공중에 솟구쳐 잠시 허공에 나와 있던 분수물줄기가 바닥으로 도로 떨어지듯이 의식이 나온 바탕의 절대공진점 속으로 떨어져 흡수되어버리니, "나"라고 주장할만한 뚜렷한 것이 아무 것도 없는 것이죠.

야부스님 선시 한수 다시 감상해 보겠읍니다.

<내가 있다는 것 원래 내가 없는 것이니

추울 때는 약한 불을 피움이요

무심(無心)은 유심(有心)과 같으니 한밤중에 금침을 줍도다.

무심과 무아를 분명히 일렀으니

알지 못한다고 말하는 자는 누구인가?>

- "내가 있음"은 "내가 없음"바탕​ 위에서 비쳐 보이는 것이고,

움직임은 움직임 없음의 바탕 위에서 움직이는 것이며,

곡선(曲線) 속에는 직선(直線)이 바탕에 함께 숨어있음이라.

춥다고 느끼는 것은 약한 열기운이 있어서 추운줄 아는 것이고​

유심은 무심의 바탕에서 나온 것이니,

마치 한밤중에 금바늘을 주운 것과 같도다.

무심(無心)과 무아(無我)가 바로 지금 여기 이렇게 함께 있으니

알지 못한다고 말하는 자 누구인가?

달은 푸른 하늘에 떠 있고, 물은 병 속에 있도다 ! 히히히-

 

 

                                                                      -무한진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