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11. 13. 11:39ㆍ성인들 가르침/반야심경 관련 법문
공간적인 연기법
'색이 곧 공이고, 공이 곧 색'이라는 논리는 공간적인 무아의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전에 설명하였습니다.
앞의 색불이공 공불이색에 비해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은 매우 강한 긍정의 논리입니다.
즉 물질적 존재인 색은, 바로 지금 이 순간 여지없이 공이라는 것입니다. 이 공간 내에서 곧 바로 이해할 수 있는 공이라는 것입니다.
앞의 논리처럼 시간적으로 미래에는 공일 것이라는 막연한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이 공간에서 곧장 공을 깨닫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앞에서 공이란 것은 연기하는 것이며, 무자성(無自性)이고, 무아라는 것을 설명한 바 있습니다.
다시 말해 공은 무아를 의미합니다. '색즉시공 공즉시색'은, 색이 곧 무아(無我)라는 말입니다.
즉 시계, 책상, 사람 등의 물질적 존재인 색은 미래에 인연이 다하여 흩어질 것이기에 공이기도 하지만, 바로 지금 그 모습이 공이라는 것입니다.
시계라고 했을 때, 이 시계는 시계침, 플라스틱 케이스, 나사, 건전지 등이 인연화합으로 모여 만들어진 물질입니다.
그러나 각각의 부품들 하나하나를 가지고 시계라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시계 케이스만을 가지고 시계라고 할 수도 없고, 시계침만을 가지고 시계라고 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시계라는 것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이 모든 부속품들이 모여 인과 연이 맞는 부품들끼리 짜맞추어졌을 때, 비로소 시계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제각기 다른 모든 부품들을 인연따라 잘 결합시켜 시계라는 색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연기라는 법칙이 필요합니다.
요컨대 공의 성질, 연기의 성질, 무자성의 성질이 바탕이 되어야만 비로소 시계가 성립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결국 시계가 성립할 수 있는 토대가 되는 것은 바로 연기 즉, 공의 바탕 위에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색이 곧 공이며, 공이 곧 색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색불이공과 색즉시공의 차이
교리적인 설명은 이렇게 했지만, 사실 색불이공 공불이색을 설하고 나서 다시 비슷한 내용인 듯한 색즉시공 공즉시색을 설한 것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색불이공 공불이색은 아직 깨닫지 못한 중생들이 사유를 통해 제행무상의 이치, 공의 이치를 깨닫기 위해 설해진 교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색이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이 색과 다르지 않은 이 가르침은 충분히 사유를 통해서도 이해할 수 있고, 그것을 통해 공부하는 수행자가 바른 지견을 세워 공부의 방향을 정해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색즉시공 공즉시색은 깨닫지 못한 수행자의 관찰에서 설해진 가르침이 아니라, 색이 곧 공임을 단박에 깨달아 마친, 쉽게 말하면 자신의 본래 성품에 계합한 견성 수행자에게 확연하게 드러난 진리를 그저 열어 보인 것입니다.
색즉시공에서 '즉(卽)'이란 용어는 틈이 없이 곧바로, 곧장, 몰록의 의미로 전혀 둘로 나뉘지 않은 불이를 의미하며, 보통 돈오라는 '몰록 깨닫는'깨달음을 설할 때 사용되는 용어입니다.
즉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란 가르침은 견성한 수행자에게 몰록 드러난 우주의 실상입니다. 실상반야인 것이지요.
여기에는 전혀 이해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저 곧장 드러난 진리의 실상입니다.
색이 곧바로 공이라는 온전한 계합이지 색이 왜 공인지를 구질구질하게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처럼 색불이공 공불이색은 중생들에게 진리의 실상을 밝히는 부분이라면,
색즉시공 공즉시색은 자기 본성에 계합한 이에게 드러난 진리의 실상 그 자체인 것입니다.
-법상지음, 반야심경과 선공부(무한출판사)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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