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만은 참되고 세상은 환(幻)이다.

2017. 6. 2. 10:09성인들 가르침/시다르메쉬와르 마하리지



세계는 세겹인데, 이는 세 차원의 세계 또는 세 세계라는 의미이다.

그것은 생시상태, 꿈의 상태, 그리고 깊은 잠의 상태이다.

깊은 잠의 상태를 빠달(Paataal)이라고 한다.

나라야나는 일체의 안에 거주하는 자이다.


처음에는 꿈의 상태 안에 아무 것도 없었다.

꿈을 꾸는 사람과 그 꿈을 아는 사람은 하나이다.

생겨나는 꿈은 사라지고 깊은 잠도 오고 가지만, 꿈을 꾸고 잠자는 사람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는 세 세계의 지배자이다. 그는 모든 것의 주시자이다.

그가 빠라마트만, 곧 절대진아다.


몸의 세 가지 상태 모두를 아는 자가 빠라마트만이다.

그의 힘으로 마음, 지성, 생기, 감각기관들이 기능하는 그가 나라야나이다.

만일 그가 감각기관들에 의존한다고 말하면 그것은 틀린 말이다.

그는 왕이고, 신이기 때문에 감각기관에 의존하지 않는다.

그를 알려고 노력하면 스스로 속는 것이다.

그는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는 상태로 있다.


만일 그대들이 자신을 어떤 존재, 어떤 특정한 개체라고 생각하고 그를 알려고 노력하면 절대로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를 알려고 하지 말라. 그는 알려지는 대상이 아니라, 아는 자 그 자체이다.

그를 알려고 하지 않으면 그는 거기 그대로 있다. '하나(Oneness)'는 그처럼 실제적이다.

그 '하나'는 이미 있었다. 단지 재확인할 뿐이다.


깨달은 사람(Jnani)은 '아는 자'나 '관찰자'가 될 수 없고, 그를 알려고 하거나 주시하려고 할 수는 없다. 

지(知)는 지(知) 그 자체에 의하여 알려진다. 그것은 말없이 이해된다. 그것은 그것 자체로 있다.

그것은 우리가 자신을 거울에서 보는 것과 같다. 실재를 지(知)의 거울 속에서 보아야 한다.

맛을 보는 혀의 능력은 맛을 볼 때만 일어난다.


지(知)의 책은 거울과 같다. 의식은 오직 '하나'이다. 하나인 의식이 어떻게 '다른 ' 어떤 것을 알수 있겠는가?

우리는 우리에게 주는 스승의 개인적 가르침을 통해 배워서 그것을 이해해야 한다.

우리의 심장 속에서 모든 것과 모든 사람을 아는 그 '하나'가 빠라마트만이다.

어떤 상태도 위하지 않으면서 존재하는 것이 브라만이다.


어떤 것을 취하는 것은 '두 번째' 또는 '타자(他者)'를 도입하는 것이다.

연못의 물이  분수를 통해 하늘로 솟구쳐 올라 하늘을 보지만, 떨어지면 다시 연못의 물과 철저히 섞인다.

그 물은 연못의 물일 뿐이라는 것을 알 때 진리가 있다. 그것을 깨달아야 한다.

스승의 아들(전수제자)은 이것을 안다. ​다른 사람들은 뭐가 뭔지 모른 채 앉아 있을 뿐이다.

만일 그대들이 그것을 알려고 하면, 지적 기능을 잃어버릴 것이다.


대상적인 감각적 앎을 통해서는 실재를 만날 수 없다.

그것을 경험하여 알겠다고 계속 고집하는 사람들은 미혹만 더욱 키울 뿐이다.

진리에 대한 그런 접근법을 버려야 한다.

실재를 경험의 수준으로 끌고 오려는 노력을 그쳐야 한다.


앎과 모름을 떠나라. 둘 다 개념이고 그대들의 태도에 불과하다.

둘 다 버려졌을 때 존재만이 남는데, 그것은 순수한 '있음'의 상태이다. 그럴 때만 이해가 일어난다.

그것이 우리의 참나이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대들이 매일 나를 찾아와서 어떻게 하면 그대들 자신을 붙들 수 있는지 말해 달라고 하는데, 나는 그러겠다고 했다.

나는 그대들이 길을 잃지 않았다는 것을 안다. 나는 그것을 아주 분명하게 일고 있고, 그래서 그대들에게 그대들 자신의 주소지를 알려준다. 진아의 성품은 '있는; 것이다.

그대들이 그를 원치 않을지 모르겠지만 그는 있다.

그는 분명히 있을 것이다. 설사 그대들이 그를 원치 않는다 해도 말이다.

그가 지고아 빠라마트만이다.

신의 거주처를 상상하는 것은 마음이다. 마음이 '나는 비슈누'다 라고 상상한다.

그러나 진아에 대해서는 마음이 아무 것도 상상할 수 없다. 세 세계를 상상하는 그 마음도 진아는 상상하지 못한다.

만일 진아에 대해 상상하려고 들면 그 마음은 끝나 버린다.

눈은 그 자신을 볼 수 없고, 다른 눈들을 볼 수 있을 뿐이다.

1리터나 2리터를 재는 그릇이 수백킬로리터를 잴 수 있지만, 그 자신은 재지 못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마음은 진아를 가늠할 수 없다. 마음과 지성이 알 수 없는 것을 언어가 어떻게 알 수 있겠나?

샅가리개를 착용하거나 수천 년 동안 좌선을 한다고 해서 진아를 알 수는 없다. 그것은 샅가리개를 아는 그, 곧 진아이다. 우리는 그를 이해하는 방도를 알아야 한다.


참스승은 그 방도를 안다.

만일 그대들이 한 폭의 천으로 하늘을 가리려 하면 천의 네 귀퉁이가 다 모자를 것이다.

몸은 쁘라나, 곧 생명기운의 힘으로 인해 기능한다. 그 쁘라나도 그를 알지 못한다.

언어는 그를 알 수 없다. 그는 마음의 마음, 지성의 지성, 앎의 앎이다. 그는 모두의 눈들의 눈이다.


의식은 그 자체 지혜의 성품으로 되어 있다. 그것은 그 자체가 우주의 몸이다.

그것은 모든 살아있는 존재들의 생명이다. 모든 것의 생명인 것이다.  

육신들은 가죽 인형이나 꼭두각시와 같다.

그들 안에서 살고 있고 모든 게임을 하는 것은 그이다.

눈이 사물을 본다고 해서 사람은 쓸데없이 눈을 탓한다.

일체를 보는 것은 그일 뿐이다. 감각기관들을 헛되게 지각기관이라고 부른다.

아는 것은 그(진아)이다. 상상된 개아는 헛되게 자신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개아가 음식 남은 것을 먹을 때 실제로 그 음식을 먹는 것은 개아이다.

진짜 임자가 먹지만, 개아는 자신이 먹는다고 말한다. 개아는 이처럼 2차적인 음식을 먹고 있는 것이다.

의심의 '개인'이 개아가 헛되이 짖어된다.

사람의 몸이 그 자신에게 부담이 되는가?

마찬가지로, 진아지를 가진 성자는 세계와 하나가 되었다. 우주가 그의 몸이다.

그는 자신의 성품 자체에 의해 '단일성'이다. 그가 어떤 부담을 느끼겠는가?

전 우주는 하나의 단위, 하나의 완전한 전체, 지(知)의 전체성이기 때문에 우주와 지(知)의 성품은 하나이다.

지(知)없는 우주와 우주 없는 지(知)는 가능하지 않다. 우주는 철두철미 지(知)이다.

전 우주는 지(知) 안에 들어 있다. 지(知)는 브라만을 뜻하고, 겉모습(현상계)은 우주를 뜻한다.

그래서 우리가 "브라만은 참되고 세계는 환(幻)"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싯다르메쉬와르 마하리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