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상적인 것을 인식함이 없이 존재하는 자는 그 자신의 찬연함 속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2017. 11. 9. 22:43성인들 가르침/시다르메쉬와르 마하리지



어떤 사람이 근처에 앉아 있는 사람을 보는데, 그는 그 사람의 이름을 모르지만, 손가락으로 그 사람을 똑바로 가리킨다. '저기'라는 말로써 그 사람을 가리키면 그 단어는 사라진다. 왜냐하면 그 말의 기능이 끝났기 때문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단어는 우리에게 이것이나 저것은 브라만이 아니라고 말해준다.

브라만은 어떤 겉모습이나 이름을 가진 대상을 초월해 있다.

​이것은 마치 어떤 사람이 손목시계를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그 이름이 기억나지 않자 "손목에 차는 둥근 것"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따라서 어떤 요령있는 설명방법을 써서 그것을 설명하면 그 단어는 사라진다. 그래서 스승들은 여러분이 한 단어를 이해하면 신이 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몇 마디 말로 된 스승의 조언에 의해 우리는 신을 이해할 수가 있다.

그래서 논리적으로, 말이 신과의 접촉을 가능하게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말 한마디 그 자체가 아주 대단한 힘을 함유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과거와 현재를 아는 것은 말에 의해서이다. 라마, 크리슈나, 기타 위대한 스승들을 우리가 아는 것도 말에 의해서이다. 주 크리슈나도 어떤 말로써 그의 제자 아르주나를 가르쳤다.

한 인간의 삶이 그 이름 값을 하는 것은 인간이 말을 쑬줄 알기 때문이다.

말에 의해,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이 위대한 일이 되었다.

말은 우리를 신으로 만든다. 베다의 지식도 말로 전해진다.

우리는 (책을 통해서) 수까, 비야사와 대화를 할 수 있다. 책의 저자는 실제로 우리와 대화를 하는 것이다.

대화소통은 말로써 가능하다. 책에는 글로 쓰여진 말들만 들어 있다.

우리는 '말'이 지혜를 전해주는 역활을 맡았다고 말할 수 있다.

말은 많은 것들을 환(幻)이라고 내버리고, 마지막으로 그 자신도 쓸모가 없어져 침묵한다.

'나'와 '말'이 둘이 다 사라진다.

여기서 '나'는 에고 혹은 자부심을 뜻한다.

말은 그것이 일어난 장소에 도달하고, 그런 다음 침묵한다.

우리에게 실재, 즉 브라만을 가르치겠다고 맹세한 것은 말이다.

파리가 음식 속에서 죽어 사람으로 하여금 그 음식을 토하게 만든다.

마찬가지로, 그러나 상당히 좋은 방식으로, 베다는 아껴둔 단 하나의 말만 간직하고 다른 것들은 다 내버린다.

베다는 여러분이 브라만에 대해 말하는 그 어떤 것도 브라만이 아니라고 말한다. (네티, 네티, 이건 아니다. 그것도 아니다) 그리고 (마지막) 남는 것은 브라만이다. 그렇게 말하면서 베다 역시 침묵한다.

형이상학자들은, 브라만은 직접 묘사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요령있는 설명에 의해 그 전제를 이해한 사람이 구루뿌뜨라, 곧 스승의 아들이다.

'그대 자신들'이 사라질 때 남는 것이 브라만이다.

금화 더미 위에 도사리고 있는 코브라처럼 ,'나'도 브라만 위에 도사리고 앉아 있다.

코브라를 죽일 때만 그 돈을 차지할 수 있다.


그와 마찬가지로 그대들이 '나'를 죽이는 즉시 브라만이 된다.

말로써 묘사할 수 없는 그것을 아는 그 사람  그자신이 브라만이다.

일체를 내버린 뒤에 남아 있는 그것은 항상 존재한다.

바스마아수라가 손을 자기 머리에 얹자 그는 재로 변해 버렸다.

그럴 때 남아 있는 것은 오직 하나, 마하데바(시바)이다. 없던 자가 죽었다.


어떤 집에 세입자가 아무도 없는데, 사흘 안에 집을 비우라는 통고문이 문간에 붙었다.

실제로 그 집을 점유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집이 비어 있었다.

이 '나'의 경우에서 보는 어리석음도 그와 마찬가지이다.

'나'의 존재성이 그 말에 의해 부인될 때, 남는 것은 브라만이다.

천신들은 말 속에 숨겨지기를 좋아한다. 우리는 우리의 말로써 그들에게 신성을 부여한다.

모든 창조계는 말로 되어 있다. 전 세계가 말에 의해 창조된다.

말, 소리는 허공의 성질이며, 세계는 말에 의해 절멸된다.

입이 말하도록 강제할 수 없지만 입에게 말을 하게 하는 자,

그의 힘으로 눈이 보지만 눈은 그를 볼 수 없는 자,

그리고 그는 모든 것을 알지만 모든 것은 그를 알 수 없는 자에게는, 그를 알 ' 두 번째'가 없다.

스스로를 아는 자인 그것에게는 그를 알 '타자(他者)'가 없다. 그 외에는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다.

냄새가 있고 냄새 맡는 행위가 있지만, 그 중간 요소인 냄새 맡는 자(나)를 제거하면 남는 것은 빠라마트만이다.


관찰자, 관찰 대상, 관찰 행위의 3요소가 형성되면 그를 이해할 수 없다.

만일 어떤 사람이 자연스럽게 침묵하면 그것이 그이다. 그가 없다면 다른 모든 것이 부질없다.

행위기관과 감각기관들이 모두 가동하고 있다 해도, 그가 없다면 그 모두 죽은 것이다.

그 없이는 그것들이 모두 죽은 것인 그것이 신이다.

다른 어떤 '것'을 '알지'말고, 지각하지 말라.

그대들이 그것을 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그러면 무엇이 있을까?

'그'만이 있다. 대상적인(타자인) 어떤 '것'도 인식함이 없이 존재하는 자는 그 자신이 자신의 장엄함, 자신의 찬연함 속에 있다. 그가 일체로 되고, 그가 의심할 바 없이 존재하지만, '나'는 집을 비워 주어야 한다.

그 개아가 죽으면 우리는 시바로만 남는다. 마라티어로 '아아지(Aaji)는 오늘 있는 자를 뜻하고, '마아지(Maaji)는 지금 존재하고 과거에서부터 존재해 온 자, 스스로 존재하는 자를 뜻한다.

만일 그대들이 개아를 개아로만 부르겠다고 고집한다면 그것은 그대들의 뜻일 뿐이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하다.

그대들이 하고 있는 일을 그대들이 경험할 수 있는 것은 그대들이 존재하기 때문인 것이다.

경험이 가능한 것은 의식 때문이다.

따라서 '그대들'은 의식을 의미하고, 의식은 곧 지(知)이다.

이것은 그대들이 본질상 지(知)라는 것을 뜻한다. 지(知)를 브라만이라고 한다.

그대가 그것이고, 그대가 브라만이다.

                                                        - 싯따르메쉬와르 마하리지 어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