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1. 27. 19:35ㆍ성인들 가르침/시다르메쉬와르 마하리지
여러분이 어떤 일을 성취했다고 하더라도
만일 자기 자신을 확신하지 못한다면,
그 일은 이름값을 하지 못한다.
전 세계가 의심의 흐름에 휩쓸려 간다.
확신한다는 것은 자신이 진아임을 확신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자신이 무엇인가를 확신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일체가 소용이 없다.
우리가 진아이긴 하지만, 이것을 확실하게 이해하지 못한다면,
이런 이야기를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우리가 마음 속으로 깊히 확신하고 있을 때에는
우리가 하고싶은 것을 자유롭게 할 수가 있다.
제자의 가슴이 아주 순수하여 스승에 대한 존경심이 깊을 때,
비로소 그 이후 공부가 아주 잘 될 것이다.
스승에 대한 그런 믿음이 우리에게 영적인 노력의 열매를 가져다 준다.
다른 이야기는 모두 쓸데없는 잔소리다.
그러면 그런 이야기가 무슨 소용이 있겠나?
그런 이야기 해 봐야 아무 얻는 것이 없을 것이다.
아무런 의심이 없는 깨달음이 확고해질 때에야 참된 만족감이 온다.
이 만족은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는다.
이 만족은 우리가 한 어떤 의식이나 행위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다.
그런 것에 의존하는 만족은 진정한 만족이 아니다.
어떤 의존성도 없는 만족은 진아 깨달음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자신이 브라만임을 확신할 때, 그 자체가 만족이다.
만족은 실재를 성취햇다는 하나의 표지이다.
의심이 없는 것이 만족의 표지임을 알아야 한다.
가르침을 듣는 사람이 확신의 표지가 무엇인지 말해달라고 하면,
스승은 그에게 하나의 절대적 전능자가 누구인지 발견하고,
그것을 스스로 확신하라고 말해준다.
신은 그것에 의해 이 세계가 생겨난 그 힘이다.
여러분은 이제 전 세계가 그것에 의해 움직이는 것을 내면에 가지고 있고,
지금 그것을 사용하고 있다.
그것에 의해서만 여러분 자신과 세계를 경험하고 있다.
여러분이 무엇을 가졌는지 보라 !
세계는 그것 때문에 있다.
그 힘에 의하여 이 세계가 먹고 영양분을 얻는다.
그것에 의해 해와 달과 별, 그리고 5대 원소가 만들어 진다.
이 모든 일이 아무 문제없이, 생기거나 파괴하는데 많은 힘이 들지 않고 자연스럽게 일어난다.
그런 힘이 여러분 안에 모두 들어 있다.
여러분이 이 세계에 대한 경험을 얻는것도 이 힘에 의해서이다.
그러나 그것을 확신하지 못하는 한 여러분의 마음은 알지 못한다.
구리와 황동으로 만든 신은 신이 아니다.
신화집에 나오는 브라마, 비슈누, 마하데브(시바)와 같은 신들의 다양한 화신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들의 신성의 범위는 어디까지인가?
그들은 그 힘이 그들을 살아 움직이게 하는 한에서만 신이다.
헌신자의 표지는 무엇인가?
그는 신을 인식해야 하고,
신이 누구인지를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니다.
몸에 대한 집착을 떠나서 그것, 즉 브라만으로서만 머물러야 한다.
'나'가 있는 곳에는 속박이 있다.
'나'가 사라지면 속박이 사라진다.
우리는 누구를 헌신자라고 불러야 하나?
자기 자신을 탐구하고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사람이 헌신자다.
우리는 내면에서 자신의 진아를 찾고, 그것의 진언으로 신에 대해 명상한다.
우리는 자기 탐색에 몰두하며, 진언을 외며 신을 명상한다.
우리가 진아를 발견하면 다른 모든 것을 제거하고 우리의 실체를 선택한다.
우리는 자신의 진아를 증득하고, 그것이 진아임을 확신하게 된다.
무엇에 대해 확신하는가?
그것이 실재(實在)임을 확신한다.
여기서 완전한 확신은 구두로 하는 말(진언)때문에 가능했다.
그래서 신을 깨닫는 장엄한 순간이 온 것이다.
바다는 있는 그대로이다.
파도만 일어났다 사라질 뿐이다.
자유가 무엇인가?
자신의 진아를 아는 것이 자유(해탈)이다.
원소들은 원소들을 통해서 태어나지만,
그것들은 또한 생명기운(짜이따니아)에서 태어난다.
설득과 분별의 두 가지 접근방법이 모두 이 생명기운(의식) 안에 들어 있다.
1차적인 접근법에는 분별과 소거법(비본질적인 것을 본질로 부터 제거하기)이 들어 있다.
이 말을 하는 것은, 겉모습을 가진 모든 것이 가짜(그림자)임을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최종 결론에서는 '모두가 부라만이다'가 된다.
네 가지 기본적인 의식의 형태(마음,지성, 기억, 에고),
세 가지 상황 (생시, 꿈, 깊은 잠),
세 가지 성질(사뜨와, 라자스, 따마스),
10가지 감각기관, 그리고 다양한 사물과 그 사물을 즐기거나 경험하는 다양한 방식들, 등~
은 모두 합쳐 짜이따니아 (chaitanya : 의식), 곧 지(知,Jnana)일 뿐이다.
바로 그 하나인 지(知)가 '앎'의 순간에 전 세계로 체험되는 것이다.
그 지(知)가 경험되는데, 그것의 넘어는 여러분이 그것을 경험하거나 포기할 수 없고,
인위적으로 그것을 없는 것으로 무시할 수도 없다.
'앎'의 순간에 그 경험이 가능한 것은 스스로 존재하는 짜이따니야(의식) 때문이다.
아주 심오하고 예리하게 관찰을 하다보면 결국은 확실하고 분명한 확신이 오게 되는데,
이것을 싯단타(Siddhanta), 즉 최종적 진리라고 한다.
이때는 아주 고요해지고, 신에 대한 확신이 차올라온다.
오직 하나만 있을 뿐이고 더 이상 또 다른 어떤 것도 있을 수 없다는 깨달음이 온다.
그러나 육체에 대한 끈질긴 연민때문에 그 평안과 만족이 이내 소멸되어 버린다.
그것에 대해서 여러분은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해야 한다.
"내가 누군지 말해봐 !" 의심이라는 악마에게 이렇게 스스로 물어야 한다.
"내가 누군지 말해봐!" 그러나 그는 침묵을 지킨다.
그것도 그럴 것이, 브라만 아닌 다른 어떤 것을 그가 어떻게 보여줄 수가 있단 말인가?
우리는 자신의 참된 성품(진아)에 대한 믿음에서 한시라도 벗어나면 안된다.
육체의식은 다른 어떤 것을 받아들일려고 밖으로 혀를 낼름거린다
그것은 의심과 걱정을 늘어나게 할 뿐이며, 자기 자신을 밖으로 끌어 내리려고 한다.
여기서 절대로 유혹에 떨어지지 말아야 한다.
신(神)들과 여러 천신(天神)들은 환(幻)일 뿐이다.
그들은 단순히 우리 자신의 상상물들일 뿐이다.
거짓된 관념,혹은 거짓된 의심을 지니고 있지 말라.
한번은 니샤다국의 날라왕이 소변을 본 뒤 발을 씻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집으로 들어 갔는데 그 허물때문에 깔리(Kali), 곧 악마(惡魔)가 그의 몸과 마음 속에 들어 갔다.
[역주 : <마하바라타>에 나오는 날라 왕은 올바르고 덕있는 사람인데, 악마칼리는 그를 다르마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하여 12년간 틈을 엿보다가 한 번의 작은 실수를 틈 타 그의 몸과 마음에 침투한 다음, 그가 내기 도박 끝에 나라를 잃고 숲에 들어가 살지 않을 수 없게 했다. 나중에 칼리의 영향에서 벗어난 그는 다시 나라를 되찾았다.]
이 이야기에서 '발'은 청정(淸淨)해야 할 바탕 또는 근원을 의미한다.
우리는 만물의 근원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탐구해야 한다.
그것을 스스로 탐구해 보라.
그 근원을 분명하게 보고 의심을 벗겨내면 기본적 순수성, 근본적인 명백함만이 거기에 있다.
기본적으로 청정(淸淨)한 것이야말로 강력하다.
그리고 확실함, 확신을 주기 때문에 어떤 의심도 들어설 여지가 없다.
근본적인 청정(淸淨)함이 없으면 악(惡)이나 의심이 기어들어갈 틈새가 생긴다.
일체가 의심으로 가득 차 있으면, 마음은 육체의식 쪽으로 기울어지게 되어 있다.
그래서 구도자들은 진아에서 벗어나면 안돤다고 하는 것이다.
육체는 그 상태(어린시절, 청년시절, 노년시절)에 따라 다른 형태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육체 스스로 그 상태를 유지할 수는 없다.
몸이 형태를 갖는 것은 생명기운(의식, 짜이타니야)의 불가사의한 힘 때문이다.
의식은 몸 안에 있기는 하지만 특정한 형상이 없다.
의식은 그 본래 성질은 무엇을 느끼게 감지하는 기능을 한다.
그 의식의 성질은 앎(知)의 생명기운(짜이타니야)이라고 한다.
앎의 생명기운은 육체를 자기라고 여기고, 그것을 기준으로 작용을 한다.
의식은 자신이 진아라고 생각하지 않고, 눈에 보이는 모든 현상,
또는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모든 것을 진실하다고 여기고,
그 미혹된 무지상태에서 모든 동작을 한다.
그것이 어떤 몸을 휘어잡든 않든 간에 상관없이,
실은 그것은 한계도 없고, 어떤 특정한 모양도 없는, 생명력 그 자체인 것이다.
그것은 아무 결함도 없고 무한하지만, 자신이 어떤 형상을 가지고 있다고 착각하면서,
그 육체가 자기 자신이라고 가정해 버리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의식이 어리석은 실수를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그 의식은 자기자신이 하나의 육체라는 관념을 강력하게 지니고 있기 때문에
육체적 자기와 관련있는 물질적 재산과 기타 소유물들을 자꾸 끌어모으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자신의 진실한 실체가 무엇인지 모르는 무지 상태인데,
언제 망가질지 모를 허망한 몸뚱에만 집착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그러므로 육체를 가장 중요한 존재로써 취급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들은 불필요하게 많은 슬픔과 고통을 겪게 되는 것이다.
몸의 형상은 우리의 본래적 존재상태가 아니다.
그것은 일시적인 불청객 상태일 뿐이다.
만일 그것을 아주 주의깊게 관찰한다면,
욕망과 열정으로 얽힌 그물을 불이 없어도 태워 버릴 수가 있다.
성자들은 하나같이 말한다.
"육체의식에 말려 들지 말아라. 여러분에게는 아무 것도 필요없다."
따라서 구도자는 항상 진아에서 벗어나 있지 말아야 한다.
여러분의 충만감이 방해받는 것을 허용하면 절대 안된다.
진아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그만큼 강해야 된다는 말이다.
브라만인 <그것>에게 어떤 특정 날짜나 시간이
복 받은 날이라거나 운 나쁜 때라고 말할수 있겠는가?
진아는 시간을 넘어서 있는 힘이다.
그것에게 무엇이 운 나쁜 때인가?
그것은 "복(福) 받은 날"의 그 "복(福)" 자체인 것이다.
운 나쁜 때로 불리는 그 무엇도 진아와는 상관이 없다.
진아는 신들 중의 신이며, 모두에게 최상의 복을 준다.
육체의식은 여러분의 순수한 이성적 판단을 흐트러지게 만든다.
따라서 매우 예리하게 깨어 있어야 한다.
침대에서 잠을 자기 있을 때도
자신이 신들 중의 신인 브라만이라고 생각하며 평안을 가져야 한다.
여러분은 무형상이고, 청정하며, 순수하고,
오염이 없는 찬란한 진리 그 자체라는 것을 항상 잊지 말아야 한다.
어떤 상황이 벌어져도 흔들리지 않고 확고하게 그 충만감 안에서
안정되게 머물러 있어야 한다.
신 비딸라(크리슈나,무형상 진아)가 루끄미니(그의 반려자,현상계)가 가까이 있다고 해서
부라만인 상태를 잃어버리겠는가?
그들 모두 순수하고, 무형상이고, 신성하며,철저하게 생명기운일 뿐이다.
비딸라(무형상의 진아)로 머물러 있어라.
여러분은 진아, 곧 아뜨만이라는 생각을 유지하고 있어야 한다.
여기서 아뜨만이라는 말은 모양없는 의식, 즉 짜이타니야(의식, 생명기운)를 의미한다.
여러분이 절대진아라는 끊어짐없는 확신이 곧 해탈이자 자유를 쟁취하는 것이다.
자유는 늘 존재하므로 따로이 계발해 낼 필요가 없다.
진아로 존재하는 것이 곧 자유인 것이다.
그대들 자신이 진아라는 것을 결코 잊으면 안된다.
내가 말하고 있지만, 그대들이 성자를 가까이 접하지 않으면
내가 한 이 말이 결코 그대들의 마음에 깊히 새겨지지 않을 것이다.
그대들 자신을 성자에게 내맡겨라.
만일 겉으로는 내말에 동의하고 깨어있으면서도
속으로는 약간의 의심을 가지고 있다면,
지금 그렇게 동의해 본들 그대들에게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이제 하나의 거대한 원리를 주의깊게 들어 보라.
절대적으로 아무런 의심도 없는 사람이 깨달은 사람이고, 완성된 사람이다.
두발을 시바 링감 위에 얹고 잠을 잔 비쇼바케짜라의 이야기가 있다.
왜 그러냐고 남데브가 묻자 그가 말했다.
"시바 없는 곳이 어디 있는가? 이 지구 전체가 시바 링감이네. 내 두 발도 시바이고,
달리 그 무엇도 아니네. 이 전 세계가 시바라네. "
이말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
이런 믿음이 절대로 흔들려서는 안된다.
싯다의 단계에서는,
이 전에 '나미아(남데브)로 불리던, 그러나 그후 진인 비쇼바를 찾아가서 만물에 편재하는 신을 깨달은,
- 그 사람은 없다. 어떤 '다른 사람(他者)'도 없다.
'두 번째', 혹은 다른 사람같은 것은 없다. 두번째가 없다. '다른 사람(他人)'이란 아무런 관련이 없다.
이것을 이해한 사람이 바로 싯다이다.
의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아직도 구도자이다.
세상에는 죄악과 공덕이 얼마든지 있다.
그대들이 일단 육체와 자기를 동일시하면 죄악과 공덕의 바다가 가득 차버린다.
이 모든 것은 베다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베다는 우리가 자신을 육신으로 생각하는 동안 어떻게 행위해야 할 것인지를 가르치고 있다.
인간의 지성이 육체의 한계를 초월할 때,
베다는 헌신자인 사람에게 어떤 가르침도 줄 수가 없다.
어떤 사람이 자기 육신을 넘어서 있을 때,
지각 가능한 것을 넘어서 있을 때,
그 사람에 대해서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겉으로 보이는 표지들은 한 단면, 혹은 단편적으로 잠깐 보여지는 성질들에 지나지 않는다.
진아에는 어떤 형태도 없다.
우리가 자신이 진아임을 깨달을 때,
어떻게 그것의 성질이나 성질없음을 표현할 수가 있겠는가?
자신을 진아로 이해한 사람은 죄악과 공덕을 넘어서 있고,
겉으로 보여지는 형상들의 경계선을 초월해 있다.
그는 드디어 목표에 도달했다.
그것은 승리일(비쟈야다샤미, 라마가 라마나를 죽인 것을 기념하는 인도의 승리축제일)이다.
그날은 황금의 날이다.
불사(不死)의 감로(甘露)를 마시는 날이다.
태어남과 죽음, 즉 생사(生死)의 윤회(輪廻)가 사라졌다.
개아(個我)의 상태가 사라졌다.
베다 자체가 그들 자신의 한계를 두었다.
그대들이 그 한계를 넘었을 때,
그대들은 의심할 필요 없이 진아이다.
그 몸이 아니고, '몸' 안에 있던 '나'가 시바가 된 것이다.
그는 승리했다.
그는 이제 브라만의 절대적 힘,
곧 진아의 힘을 가진 성취인이며,
그 자신이 실재(實在)이다.
지고아 라마가 드디어 그의 왕국을 되찾았다.
그것을 성취한 것이 승리의 상태이다. (終)
- 싯따르메쉬와르 마하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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