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이원적 브라만으로 살아라

2017. 2. 26. 19:37성인들 가르침/시다르메쉬와르 마하리지



비이원적 브라만은 그 자신 이외에 다른 어떤 것이 아니다.

'타자(他者)'인 그 어떤 것도 없다.

상상하는 것이 없이 그저 우리가 "있다"

누구든지 어떤 것도 상상함이 없이 그 자신을 체험하고 있다.

존재하는 것과 나타나는 것은 모두 브라만일 뿐이다.


듣는 사람들은 이 가르침에 만족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듣는 사람은 여전히 의문을 제기한다.

"이 설명으로 저는 절대자와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제 저는 이 브라만 안에 머무르겠습니다.

저는 가족과 속세적 삶에 대한 어떠한 생각도 제 마음 속에 들어오지 않아야 한다고 여깁니다.

저는 법문을 듣는 동안에는 브라만이 되었지만, 다시 저의 집에 대한 일들이 기억나고,

개체아가 가족을 인식하게 됩니다.

그래서 혼란이 있고 마음에 흔들립니다.

제가 어떻게 해야 할지 부디 말씀해 주십시오.

저는 그런 것들에 대한 기억이 없어야 한다고 ,

아니 그보다도 우리가 이 몸을 가지고 있지 않아야 한다고 여깁니다.

저 자신이 하나의 몸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는 한, 제가 브라만이 되엇다는데 동의할 수 없습니다.

브라만인 자가 어떻게 가정생활로 돌아갈 수 있겠습니까?

브라만만이 있어야 하거나, 아니면 우리가 가정생활을 영위해야 합니다.

이것을 어떻게 조화시킬지 부디 말씀해 주십시오. 욕망과 분노도 여전히 지배합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 질문자는, 브라만을 깨달으면 자기는 한가롭게 쉼을 즐겨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 같다.

스승이 묻는다. "깨달은 자들이 바위처럼 가만히 있게 되면, 바이샤나 수까 같은 다른 성자들은 용도폐기되어야 하는가? 그대는 수까와 바마데바는 해탈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실패했다고 말한다. 어떻게 단 두 사람만 자유롭다고 말할 수가 있는가? 그러면 수까의 스승도 환(幻)을 소멸하지 못했다고 봐야겠지. 단 몇명만이 저 너머를 건너갔다면, 왜 베다와 다른 경전들을 여전히 따라야 하는가? 따라서 그런 이야기는 다 맞지 않는다. 비야사. 야나발키야 등 수많은 리쉬들이 모두 해탈했다. 두 사람만 자유로워졌다고 말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것이다."


어떤 사람이 알면서도 어리석은 말을 할 때 , 그 사람은 지혜스러운 바보이다.

예를 들어서 이웃에 있는 사람이 지혜로울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다른 사람은 모두 바보들인가?

진짜로 지혜로운 이는 거기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만약 두 사람만 해탈했다고 한다면 베다의 힘은 어디에 있나?

깨달은 이가 베다에 대해, '만약 베다에 있는 말을 한 마디만 이해해도 그 사람은 공덕이 있는 사람'이라고 말한 것은 거짓말인가?

다른 제 3의 구도자는 자유로워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면, 누가 베다를 믿겠는가? 그대는 장작처럼 딱딱해 지는 사람만이 해탈한다고 생각하는데, 만약 우리가 그대의 견해에 동의한다고 해도, 어떻게 진인 수까는 나무토막이나 바위처럼 되지 않았는가? 그는 빠리끄쉬뜨 왕에게 가르침을 주었다. 그가 바리끄쉬뜨를 가르쳤다면, 어떻게 수까가 바위처럼 되었다고 말할 수가 있겠는가? 만약 그가 하나의 바위가 되었다면 베다를 설명할 수 없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이 브라만을 깨닫자 마자 나무토막처럼 쓰러진다면 나중에 누가 해탈의 길을 보여주겠는가?

누가 남들에게 지혜(智慧)를 전해주며, 누가  그 사람을 애당초 가르칠 수 있었겠는가?

만일 그가 나무토막처럼 누워 있다면 누가 남들을 가르치겠는가?

모든 지(知)의 전통이 잊어버리게 된다.


설명할 때는 우리가 모든 것에 대하여 이야기해야 한다.

영원한 것이든 사멸할 것이든 관계없이 말이다.

그래서 한 순간 바른 정신으로 자각하다가 다음순간 움직이지 않아서는 안될 것이다.

그런 사람 역시 속박 속에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삼매 중에도 나무토막처럼 스러지지 않음을 물론, 깨어있으면서 말을 하는 등 활동하는 동안에도 브라만에 대한 지(知)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일체가 브라만이라면 여러분의 상상도 브라만이고, 속세의 삶도 브라만이다.

이 소위 '속세의 삶'이 어디서 여러분을 만났는가? 그것은 어디에 있고 언제 있는가?

일체가 브라만이다. 여러분은 브라만의 밖에 있지 않다.

범부적 삶이 별개로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어디에 있는가?

브라만에 대한 깨달음의 성품 자체가 이와 같다.

손에 회중전등을 들고 어둠을 어떻게 찾아 나설 수 있는가?

회중전등을 끄면 그대 곁에 어둠이 바로 있다.

찾는 사람 그 자신이 브라만이다.

자기 자신을 알지 못하면 온 세상을 헤메고 다녀서 영겁의 세월이 지나도 브라만을 만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 구도자가 자신이 브라만임을 알면 그것은 그에게 가장 가까이 있는 것이고, 그는 어디를 가든 "혼자"인 것이다. 브라만이 전체 공간을 채우고 있다. 그는 곳곳에 브라만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체험할 것이다.


회중전등은 보는 시각(視覺)을 의미한다.

그것 자체가 브라만이라면, 그것이 무엇을 보든 모두 자동적으로 브라만일 뿐이다.

그러나 그 보는 시각이 무지하다면, 그것이 무엇을 보든 보이는 것마다 다 무지이고 환(幻)일 뿐이다.

일체가 이미 아무런 얽힘이 없다. 어떤 사람이 잠에서 깨어난 뒤에도 누워 있을 수 있지만, 그는 어떻게든 깨어 있다.

여러분이 브라만을 깨닫고 나면, 설사 그것을 잊어버리려 해도 잊어지지를 않는다.

오히려 단일성 속에서 그것을 깊히 자각하게 된다.

어떤 사람이 한 구도자에게 시바의 진언을 주고 염하라고 하면서, 그 진언을  염하는 동안에는 '원숭이'를 생각하지 말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런데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 사람이 시바의 진언을 염할 때는 늘 원숭이가 떠올랐다. 뿐만 아니라 꿈속에서도 원숭이가 보기도 했다.

그는 환각에 빠져서 모든 것에서 원숭이가 보였다.

그래서 금지된 것이 마음 속에서 가장 먼저 떠오른다고 말할 수 있다.

잊어버려야 하는 것이 두배로 많이 기억된다. 잊어버리기는 매우 어렵다.


그대들이 몸을 가지고 있는 동안에는 (세간사에의 ) 관여가 있다. 그것을 어떻게 피할 수가 있는가?

여러분은 즐기기 위해 물건들을 뫃아 놓는다. 여러분은 자신의 욕망으로 물건들을 쌓아두었다가도, 나중에는 그것들을 귀찮게 여긴다. 여러분은 자신의 만족을 부셔버린다.

단순한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대부분은 어떤 사람도 아무 이유없이 누군가에게 무엇을 해 주지 않는다.

예컨대 나중에 있을지도 모를 어떤 속박의 가능성을 없애고 자유로워질 것을 바라지 말라. 그렇게는 안 될 것이다.

가정생활을 포함한 일체가 브라만이다.


깊은 잠 속에는 브라만이 있고, 생시의 상태에는 브라만이 없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

여러분이 그 몸이라는 개념, 한 개인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영위하는 삶은 불안하고 언젠가는 파괴된다.

그러나 활동하는 매 순간 여러분이 브라만일 때는, 삶 그자체가 브라만이고, 지복만이 있다.

육체와의 동일시를 가지고 산다면 그 삶은 괴로움만 있을 뿐이다. 

                                                          -싯따르메쉬와르 마하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