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식이전의 근원 안에 머무르시오

2017. 1. 10. 09:55성인들 가르침/니사르가다타 마하리지


질문자 : 죽는 사람들이 자기에게 몸이 없다는 것을 깨달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마하리지 :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누구도 죽지 않소. 경전에서 말하는 것은  해소되지 않은 욕망들을 지니고 죽은 사람들이 다시 환생한다고 말하고 있소.


질문자 : 그들이 다시 환생할 때는 여러 육체들 중에서 자기가 선택할 수 있는가요? 예를 들면 A씨 집안이냐 B씨집안이냐 처럼 맘대로 골라잡을 수가 있습니까?

마하리지 : 왜 그런 겉껍대기의 문제들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오? 그대는 그 몸이 아님을 스스로 확신을 다지는 데에 힘을 써야 하오. 그 몸은 다섯가지 원소로 만들어진 음식의 몸이오. 그대는 그것 속으로 들어갈 자리가 없소. 그대는 그 음식 몸과는 상관이 없소. 힘, 호흡, 존재성 등은 음식과 물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오. 음식와 물이 없으면 '내가 있음'이 존재하지 않소.

질문자 : 그러면 '내가 있음'이 나중에 다시 돌아오나요?

마하리지 : 그대는 그런 어떤 것도 아니오. 다시 태어난다는 그런 것은 없소.

질문자 : 마치 음식이라고 하는 것이 대기 중에 떠다니는 것 같습니다. 그것으로 몸을 만들 수 있는데, 만약 우리가 잘못된 개념을 가지고 있으면 그 음식 몸안에 들어가고 맙니다. 실은 저의 관점에서 보자면 선생님의 가르침 속에는, 음식이라든가 음식 몸 같은 것이 정말 존재하지 않으며, 하나의 개념만 있다는 의미가 은밀하게 암시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마하리지 : 그대는 지금 어떤 수준에서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오? 몸이란 존재하지 않고 그것이 마음에서 온다는 것을 어떻게 알게 되었소?


질문자 : 마하리지께서 책에서 말씀하시는 것을 보고 알았습니다.


마하리지 : 그것을 실지로 깨달았소?


질문자 : 제가 깨달았으면 진인이게요.


마하리지 : 맞소. 그러기 전까지는 모든 몸이 태어나듯이 그 몸도 태어나는 것이오.


질문자 : 지금 우리 수준에서는 우리가 하나의 육체를 가지고 있다는 개념을 받아들여야지, 몸이 없다는 또 다른 개념을 만들어 내면 안된다는 말씀이십니까?


마하리지 : 그 근원으로 나아가시오. 몸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은 누구요? 몸이 생겨나기 이전에 무엇인가 있었소.

질문자 : 이런 측면에서 우리가 하는 모든 노력이 '내가 있다'는 느낌을 소멸하는데 무슨 효과가 있습니까? 아니면 그 노력도 필름의 일부인가요? 말하자면 사람들이 자기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기울인다고 생각하는 노력이 아무 효과가 없고, 그냥 전체가 이미 필림 속에 다 들어 있다는 것입니까?

마하리지 : 의식 이면의 빛인 그 근원 안에 머물러 있으시오. 그대는 의식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해야 하오. 일어나는 모든 일은 저 근본 마야(무지) 안에 있소. 지금 녹음기가 내가 하는 말을 녹음하고 있지만, 카셋트 안에 기록되어 있는 어떤 말도 내가 아니오. 원래의 음성은 카세트 안에 담겨 있지 않듯이, 그대도, 그 존재핵점, '내가 있음', 곧 의식과 따로 떨어져 있소.

질문자 : 깨달음도 그 필름 안에 있습니까?

마하리지 : 그것은 필름 안에 있을 수 없소. 왜냐하면 그대가 그 필름을 아는 자이기 때문이오. 이제 그대가 들은 이 모든 이야기를 잘 생각해 보고 5시에 다시 와 보시오.

저 마음이라는 것은 현상계 안에 있는 생각들이 축적된 것에 불과하오. 그대의 모든 활동은 마음에 의존해 있고, 마음은 그대의 모든 기억과 그대가 이 세상에서 들은 모든 이야기에 의존해 있소.

그리고 육체의식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을 흡수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 '내가 있다"존재의식이 전생, 탄생,업 등의 원인이라고 계속 생각하는 것이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을 흡입하는데, 우리 자신이 간직해 왔던 개념들을 거기에 덧붙여서, 우리 나름대로의 관점으로 그것들을 바라보는 것이오. 

그대는 어떤 것을 좋다, 훌륭하다고 받아들이고 또 다른 것은 나쁘다, 죄악이다라고 배척하지만, 그런 것은 그대가 세상에서 취한 개념일 뿐, 그런 분별이 나올 어떤 근거도 없소.


질문자 : 어제 마하리지께서는 차크라와 브라마란드라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우리가 명상 중에 그런 것들에 대하여 신경을 써야 하나하고 생각했습니다.


마하리지 : 차크라는 잊어버리시오. '내가 있다'는 앎을 붙잡고 그것과 하나가 되시오. 그것이 명상을 하는 것이오.


질문자 : '내가 있다"를 붙잡는 것은 누구입니까?


마하리지 : 누가 이 질문을 하고 있소?


질문자 : 우리가 생각을 넘어설 수 있습니까? 아니면 절대자 안에서 생각들은 그 필름의 일부일 뿐인가요? 그리고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그것들을 그냥 견디어 내야 합니까?

마하리지 : 누가 생각을 넘어가고 싶어하는 것이오. 그 사람이 누구요? 의식이 생시의 상태에 나타나기 이전, 그것이 절대자인 것이오. 의식이 나타나자 마자 생각들이 나오는데, 생각들을 견뎌내야 할 필요도 없고 그것을 버려야 할 필요도 없소. 그냥 생각인 줄 알기만 하시오.


질문자 : 이른바 필름의 원판을 결정하는 다른 모든 것들은 존재하지 않는가요?


마하리지 : 그러나 그것은 그대가 그 원래상태(절대바탕)에 도달했을 때의 일인데, 그렇게 된다면 그대가 바로 진인이오.


질문자 : 우리가 이미 그것입니다.


마하리지 : 그대가 그것을 안다면 아무런 질문도 없을 것이오. 그대가 지금 여기에 있지도 않을 것이고.


                                                                                                       -니사르가다타 마하리지 대담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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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閑 談]

마하리지는 이 글에서도 역시 "내가 있다"앎을 꼭 붙잡고 머물러 있으라는 충고를 하십니다.

"내가 있다"앎이란 바로 존재핵점을 말합니다. 즉 현상계를 주시하는 주시자의식을 말하는데,

이것은 "내가 깨어있다"는 느낌 이전상태를 말하며, 일반적으로 생시상태에서 모름의 상태입니다.

그러나 엄밀히 표현하자면 대상을 모르는 상태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는 느낌의 상태도 아닙니다.

보통 간화선에서는 화두에 대한 의심을 가지고 억지로 모름속에서 쥐어 짜지만, 이러한 "내가 있다"는 앎과 모름이라는 상대적인 모름상태가 아니고 생시느낌 이면의 배경에 있는 모름상태입니다.

화두선의 화두에 대한 의심은 일종의 대상적인 모름으로써, 엄밀히 따지자면 모름과 앎이 뒤섰여서 의심이라는 역동적인 회전력을 일으켜서 내면 속으로 깊히 파고드는 것이지만,

이 "내가 있다" 앎에 머물러 있으라는 마하리지 가르침은 내면, 즉 그냥 그 배면의 주시자에 가만히 머물러 있는 자세입니다. 

그래서 "내가 있다"앎에 머무르려고 하면, 마하리지가 말씀하시는 "내가 있다"상태까지는 어떤 방법으로 도달해야 하는데, 마하리지의 대담록이 번역되어 나온 가르침들은 모두가 마하리지가 이 세상을 떠나기 몇 년전의 후반기의 가르침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이때는 "내가 있다"상태에 까지 가는 과정의 기초 가르침은  생략되고, "내가 있다"수준까지 올라온 고급 수행자들을 대상으로 말씀하신 것이 대부분입니다. 따라서 대부분의 니사르가다타 마하리지의 대담록을 읽는 사람들은 그 수숭한 가르침을 열심히 공부하지만, 그러나 실지로는 "내가 있다"가 어떤 상태인지 구체적으로  파악을 전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맨날 니사르가다타 마하리지의 대담록만 반복해서 읽지만, 아무리 읽어도 그 "내가 있다"의 실마리를 못잡는 사람이 대부분입니다. "내가 있다"수준까지 올라오려면, 이것은 마하리지가 말씀하시는 기초수준인데, 마하리지가 수행한 과정을 보면, "내가 있다"수준까지는 만트라로 수행하셨습니다. 그래서 "내가 있다"까지는 만트라나 염불 수행으로 수행하는 것이 좋습니다. 또한 "나는 누구인가?"자아탐구법도 좋은 방법입니다

왜냐하면 현상계의 주시자상태인 '내가 있다"상태가 어떤 상태인 줄을 본인이 직접 체험해 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마하리지 대담 속에 있는 <"내가 있다"를 착파하라>라는 말씀만으로는 기초수행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선  마하리지가 말씀하시는 "내가 있다"가 어떤 상태인지 직접 체험해 보아야 하니까요.그러나 그것은 누구도 말로 "이런 것이다"라고 표현해 내기가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쪽에서는 모르는 것이지만,  이쪽을 넘어가면 그것이 모르는 것도 아니고 아는 상태도 아니고 또한 어떤 삼매상태같은 고정된 상태도 아닙니다. 하나의 중간과정상태이기 때문에 그네 타고있는 것처럼 약간만 움직여도 흔들림의 유동성이 있어서 어떤 고정상태로 자신있게 표현해 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마하리지의 대담록에 나오는 대로 공부하려면 우선, 처음에는 만트라나 염불로 "내가 있다"는 수준까지 도달해야 합니다. 이 "내가 있다"상태도 일종의 삼매체험을 겪어야 합니다. 염불삼매, 만트라 삼매를 넘어서야 이 "내가 있다"수준까지 올라 옵니다. 전체성의 느낌, 몸이 없는 느낌, 아무 것도 아닌 투명성,때때로 현실세계가 마치 꿈과 같은 느낌,여러가지 영적인 체험이 있는 곳이 이 "내가 있다"수준의 넓은 영역에 온 상태입니다. 그것은 직접 본인이 들어가 보아야 합니다. 그 상태에서 이 니사르가다타 마하리지의 대담록을 읽어보면 그때부터 그 가르침들이 환하게 밝아 오고, 또한 실행이 쉽게 진행되어 갑니다. 말하자면 그 "내가 있다" 의 넓은 영역에 들어와서 더 좁은 존재핵점으로 집중하여 안정시키는 수행이 마하리지의 대담록에서 설명하는 내용들입니다. "내가 있다"영역에 들어가면 일상 앎자체가 모두 주시자상태가됩니다. 별도로 주시를 하거나 관조를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저절로 주시되고 관조되는 상태이며, 모든 현상과 대상 속에 주시자가 그냥 포함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유위적인 수행은 필요없습니다. 일상으로 돌아가는 삶 그자체가 바로 수행이 저절로 진행됩니다. 그리고 항상 전체성의 지복감은 흐릅니다.

다음 회에 마하리지 대화록 소개할 때에는 마하리지 말씀에서 "내가 있다"라는 상태에 대해서 좀 더 이해하기 쉽게  소개 될 것입니다. 마하리지가 "내가 있다"에 대하여 아주 친절하게 말씀하신 내용을 발췌하여 소개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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