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시는 저절로 일어나는 것이지, 억지로 수련하는 것이 아니다.

2016. 12. 28. 20:18성인들 가르침/니사르가다타 마하리지


질문자 : 주시자가 무엇입니까? 마음입니까, 아니면 마음을 넘어선 것입니까?

마하리지 : 그것은 마음을 아는 자요.

질문자 : 만약 제가 '내가 있다'고 말하면 그것은 마음인가요?

마하리지 : 존재성이 마음을 통해서 '내가 있다'라는 말로 자신을 나타내는 것이오.​

질문자 : 프리드먼 씨가 번역한 책에서는 운명과 정의(正義)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그것은 업(業)과 같은 뜻입니까?

마하리지 : 정의는 결정된 심판이고, 운명은 그것으로부터 모든 현상계가 생겨나오는 창고와 같은 것이라고 볼 수 있소.​ 그것은 그대가 거기서 나온 원리이며, 말하자면 필림의 원판과 비슷하다고 말할 수 있소.

의식은 그대가 나온 그 근원 안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으므로, 그 필림이 외부로 비추어져 나오는 것이오.

비추어져 나오는 그림들은 이미 그 안에 기록되어져 있던 것이오.

그러므로 존재의식(씨앗), 즉 그대를 통해서 일어나는 움직임이 모두가 그대의 운명이오. 그 존재성이 행하는 동작 하나, 혹은 걸음 하나도 그 필름 안에 이미 기록되어 있었던 것이오.


질문자 : 일부 점성학자들이 주장하듯이 별들이 그 필름원판을 보여주는가요?

마하리지 : 그것은 완전히 가짜들이요.그대가 태어나기 아홉 달 전에 그대의 운명이 시작되었소. 

질문자 : 누구에 의해서 만들어졌습니까?

마하리지 :  누구에 의해서라기 보다는, 저절로 일어난 것이오.


질문자 : 그 필름의 원판은 운명이 시작되기 전에 이미 존재한다면, 그 원판은 어디서 새겨집니까?


마하리지 : 그것이 근본 마야의  묘한 재주요.


질문자 :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뿌린 대로 거두기 때문에, 그 이전에 언제쯤인지 원판의 씨앗을 심었다고 믿습니다.


마하리지 : 그것은 남들에게 들은 말일 뿐이오. 그렇다는 무슨 증거를 가지고 있소?

질문자 : 아뇨.

마하리지 : 마야는 환(幻)의 1차적 뿌리인데, 그 지점에서부터 자기자신에 대한 사랑이 시작되는 것이오. 즉 '내가 있다'는 존재애(存在愛)이며, 그것이 밖으로 투사되어 드러난 내용물이 이 모든 현상계인 것이오. 


질문자 : 왜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 보다 이 거짓 자기를 더 사랑합니까?

마하리지 : 누가 다른 사람보다 더 사랑한다는 그런 것은 있을 수 없소. 자신에 대한 사랑의 상태가 그냥 존재하고, 그대가 그것을 즐기던가 또는 그 고통을 겪는 것이오. 우리는 존재로 인한 고통을 받을 때조차도, 우리 자신의 그 존재성을 사랑하고 있소. 


질문자 : 우리가 주시하기를 수련할 때, 그것은 의식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까?


마하리지 : 주시하기를 연습한다는 것은 무슨 뜻이오? 그대가 하려고 하는 것은 자신의 존재성을 더욱 강화시키고자 하는 짓이요. 주시하기는 그냥 저절로 일어나겠지만, 먼저 진아가 열려야 하오. 주시하기 이전에 그대의 참나가 있소.


질문자 : 마하리지께서는 고요해지라고 말씀하셨는데, 저의 생활환경이 고요해지기가 쉽지가 않습니다. 제 직업에는 많은 구속과 활동이 있습니다. 마하리지게서 다른 직업으로 바꾸어 보라고 권유하시겠습니까?


마하리지 : 나는 누구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지 않소. 그대하고 싶은 대로 하고, 그러나 그대는 그것을 하는 행위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기만 하면 되는 것이오. 그것은 그냥 저절로 일어나는 것이오. 잉태의 첫날 일어난 운명이 저 혼자 스스로 진행되어가고 있는 것이오. 그대가 행위자라고 주장하고 나설 것이 아니오. 그대가 누구인지를 알게 되면 그 운명이 그대를 속박하지 않을 것이오.


                                                                 -니사르가다타 마하리지 대담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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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閑 談]

본문 중에서,

[마야는 환(幻)의 1차적 뿌리인데, 그 지점에서부터 자기자신에 대한 사랑이 시작되는 것이오. 즉 '내가 있다'는 존재애(存在愛)이며, 그것이 밖으로 투사되어 드러난 내용물이 이 모든 현상계인 것이오. ] 라는 문장에서,

<마야가 환의 1차적 뿌리>는 것을 쉽게 이해해 보자면, 물결 파도가 일어나는 과정으로 비유해서 설명해 보겠습니다.

연못의 한 지점에서 어떤 원인으로, 즉 아무 물결도 없는 잔잔한 연못에 한 지점에서 물결 파도가 하나 생기는 과정을 묘사해 보겠습니다. 고요한 물 표면에 작은 나뭇닢이 하나 떨어지면, 그 나무닢이 떨어진 지점에서 첫물결이 밑으로 움직이겠죠. 그 다음에 밑으로 움직인 물 표면의 운동이 어느지점까지 움직였다가 원상복귀하려는 힘으로 다시 위로 움직이게 됩니다. 이렇게 맨처음 물결이 일어나는 운동이 물밑으로 움직였다가 이내 다시 위로 올라오는데, 밑으로 내려갔다가 위로 올라오는 물결운동의 한 사이클이 최초로 발생합니다. 이것이 최초로 발생하는 물결파동인데, 이 첫 물결움직임이 계속 반복해서 아래 위로 진동하면, 이 진동움직임이 주위로 번져 퍼져나가 나중에는 연못 물 표면 전체에 물결파동에너지를 일으킵니다.

의식도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아무 움직임이 없는 고요한 절대바탕의식에서 어떤 원인으로 인해서 파동움직임이 발생하여 그것이 빈복되는 파동의식으로 일정하게 움직이는데,첫번째로 만들어지는 의식의 파동형태가 바로 마야, 환(幻)의 1차적 뿌리라고 합니다. 이것이 "내가 있다"는 존재의식의 시작인데, 이것을 왜 마하리지는 "내가 있다"는 존재애(存在愛)라고 부르느냐 하면, 절대참나, 즉 진아상태에서는 자기자신이 밖으로 새지가 않습니다(無漏). 즉 한점 절대공진(共鳴)상태에 있기 때문에 어떤 누설(漏洩)도 없어서 자기자신을 알지 못하고 알 필요도 없습니다(非二元性). 이때는 완전히 비이원화상태이므로 새는 데도 없고(無漏),주(主)와 대상(客)이 없죠. 그러나 고요한 절대바탕의 한점(一點)에서 움직임이 발생해서 진동이 생기면 오직 하나인 나가 다른 데로 새(漏洩)게 됩니다. 순간적이지만 '나'자신의 일부가 새어나와서 나가 둘로 나누어집니다. 따라서 나가 또 다른 새어나온 나를 보게 되므로 비로소 "내가 있다"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그런데 이 "내가 있다"는 두 장소에서 반복적으로 동일한 나가 왔다리 갓다리 반복하므로, 동알한 나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데, 이 상태는 원래 참나가 되고자 계속 왓다갔다 하는 상태이므로, 바로 "나자신을 사랑하는 상태"와 같은 것입니다. 처음 절대 진아에서 한점이 떨어져 나가지만 이내 다시 되돌아오고(휘드백), 되돌아 오려고 움직이다가 너무 지나쳐 버려서 다시 돌아서 나오다가 또 너무 지나쳐 다시 되돌아 오는 것이 반복해서 파동성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자기에 대한 사랑행위, 즉 나에 대한 존재애(存在愛)라고 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절대존재에서 상대적인 존재가 되는 과정에서 잃어버린 절대성에 대한 사랑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이 기본적인 존재의식의 파동으로 인해서 그외의 의식,마음,나,,지,수,화,풍 오대,육체,세상.우주,시간,공간 등이 현상되는 것입니다.그러나 이 움직이는 나라는 두 쪼각은 참나의 움직이는 그림자일 뿐, 실재가 아닙니다. 그래서 이 존재의식도 환(幻)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따라서 절대 진아를 벗어난 현상세계,우주삼라만상과 거기에 사는 모든 무생물,생명체, 즉 중생들의 삶이란  바로 환(幻)이며 고통이라는 것이고, 본래의 자기 참나를 잃어버렸다고 하며,또한 본래 자기의 절대상태를 회복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대가 하려고 하는 것은 자신의 존재성을 더욱 강화시키고자 하는 짓이요. 주시하기는 그냥 저절로 일어나겠지만, 먼저 진아가 열려야 하오. 주시하기 이전에 그대의 참나가 있소.]

[그대하고 싶은 대로 하고, 그러나 그대는 그것을 하는 행위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기만 하면 되는 것이오. 그것은 그냥 저절로 일어나는 것이오. 잉태의 첫날 일어난 운명이 저 혼자 스스로 진행되어가고 있는 것이오. 그대가 행위자라고 주장하고 나설 것이 아니오. 그대가 누구인지를 알게 되면 그 운명이 그대를 속박하지 않을 것이오.]

[주시하기]에 대한  위의 마하리지의 말씀은 우리들이 꼭 명심하고 있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관조(觀照)하다] 또는 <주시(注視)하다>를, 보통 우리가 무슨 사건의 움직임이나 어떤 변화를 또렷하게 대상으로써 관찰하는 행위라고 여기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물론 정신 수행 측면이 아니고, 일반적인 사람의 일상행위측면에서는 어떤 대상을 의도적으로 자세히 관찰하거나 보는 것을 말하기도 하지만, 

정신수행 측면에서 <주시하라> <관조하라>고 말하는 때는 그 의미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정신적 스승들이 <주시하라><관조하라>는 말은 어떤 개인이 의도적(능동적)으로 무엇인가를 뚜렷히 관찰한다거나 들여다 보는 것이 아니라, 수동적으로 뒤로 물러서서 저절로 관조되는 상태를 유지하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때는 자기가 행위자라는 "나"가 사라져야 합니다. 대신 모양없는 무한자가 배경에서 저절로 지켜보는 상태가 됩니다. 이것이 저절로 주시되는 자연주시상태라는 것입니다.그래야 온전히 <주시하다>가 됩니다. 위에서 마하라지는 주시가 일어나려면 먼저 진아가 열려야 된다고 말씀하셨는데, 그 말씀은 개아인'나'가 없어져서 "無我(무아)"가 되어야 온전한 주시하기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아직 무르익지 않은 수행자가 <주시하기>를 할 수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을 하는 한 가지 방법은, 모든 것을 수동적으로 보는 자세를 길러야 합니다. 우리는 보통 무엇인가를 볼 때에, "나는 모니터를 본다" "내가 책을 본다" 이런 식으로 "내가 무엇인가를 한다"라는 내가 행위자라는 생각를 하는데, 이런 자세를 백팔십도로 바꾸어서 " 모니터가 보여진다" "책이 보여진다" 이런 식으로 모든 것을 수동적으로 '나에게 저절로 보여진다'라는 자세로 변화시키는 연습을 합니다. 그러면 거기서 "나"가 우선 뒤로 물러나고, 그래서 수동적으로 저절로 보여진다고 여기면 "나"라는 행위자의식이 점점 엷어지게 됩니다. 따라서 모든 것은 저절로 (모양없고 알 수 없는 무한자에게)보여지는 것일 뿐, 개인인 내가 억지로 무엇을 보거나 행위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자세는 점점 마음 속에서 분별심을 내지 않고 그냥 보여지는 대로 놔둠으로써 '나"라는 개인성이 점점 약화되어 저절로 뒤로 물러나게 됩니다. 나중에는 주시하는 자는 배면의 모양없는 무한자가 저절로 지켜보는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 무한자가 바로 주시자인 자기 본래 참 모습입니다. 이쯤되면 자기가 육체가 아니고 무한한 우주 공간 전체라는 느낌도 오게 됩니다.그것은 마음이나 생각으로는 알려지는 것은 아니지만, 이미 그것이 주시하는 자인 나의 참모습임을 이해하게 됩니다. 이 주시하는 방법은 과거에 유지 크리스나무리티도 자주 강조하는 내용인데, 크리스나무리티는 < 그냥 지나가는 것을 보듯이 지켜보기만 하라>는 식으로 표현했습니다. 이렇게 모든 것을 수동적으로 주시하는 수행법은 달마스님 이전의 고대불교 수행법과 인도 베단타 수행법에서 공통적으로 내려온 수행전통입니다.  이것은 다른 말로 선불교에서는 회광반조(廻光返照)라는 말로도 부릅니다.  회광반조를 제대로 할려면, 먼저 위에서 말한 것처럼 진아가 열려야 하는데, 진아가 열릴려면 모든 것을 수동적으로 분별심없이 주시하는 자세를 확고하게 다져야합니다. 그러다 보면 개인의 '나', 즉 행위자로써의 '나'가 엷어지게 되고, '나'가 희미해지면 그 상태가 바로 진아가 열리는 것이죠.

배면의 무한한 무엇인가(주시자)가 저절로 모든 것을 주시하게 되고, 그 모양없는 무한한 무엇인가(주시자)가 확고하게 될 때에는, 개인 "나"는 행위자라는 느낌이 사라집니다. 그 모양없는 배경으로 모든 것을 되비추어 보는 것이 바로 회광반조입니다. 어느 지점에서 깊은 삼매를 맞이하게 되고, 이어서 수시로 원인모를 무한한 지복감(輕安)이 느껴지고, 우주전체가 바로 나 자신임을 서서히 깨치게 될 것입니다. 물론 앞으로도 더 깊은 삼매에 오랫동안 머물러서 남은 업습을 씻어 내야겠지요.그러나 점점 수행은 즐거워지고, 보이고 느껴지는 일상의 모든 것이 바로 스승의 훌륭한 자연적인 가르침이 됩니다.


                                                                                                                        -무한진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