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 나무,애인 등 모든 것은 의식일 뿐이다.

2016. 1. 25. 10:09성인들 가르침/라마나 마하리쉬


질문자 : 스승의 바로 곁에 있는 구도자들은 친견, 접촉 등으로 은총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멀리 떨어져 있을 때는 그런 은총을 어떻게 얻을 수 있습니까?

마하리쉬 : 요가견에 의해서입니다.

다른 질문자 : 이름의 영험은 어떤 것입니까?

마하리쉬는 <비젼>지에서 발췌한 것을 읽어 주셨는데, 그것은 남데브의 시구들을 번역한 것이었다.

질문자 : 그 이름이 어떻게 깨달음에 도움이 됩니까?

마하리쉬 : 그 원초적인 이름은 그 개인이 아무 노력을 하지 않아도 자발적으로 항상 계속됩니다. 그 이름이 아함(aham), 곧 '나'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드러날 때는 아항까라(ahamkara), 즉 에고로서 드러납니다. 이름을 구두로 염하다 보면 내심으로도 염하게 되고, 그러다 결국 영원한 진동 속으로 녹아 듭니다.

질문자 : 그러나 그런 것은 모두 정신적이거나 물리적입니다.

마하리쉬 : 마음이나 입은 진아 없이는 움직일 수 없습니다. 위대한 마하라쉬트라 성자인 뚜까람은 낮동안 삼매에 들어 있다가 밤에는 많은 군중과 함께 노래하며 춤추곤 했습니다. 그는 늘 스리 라마의 이름을 염했는데, 한 번은 용변을 보면서도 "람, 람"하고 있었습니다. 정통적인 한 승려는 그 신성한 이름이 성스럽지 않은 장면에서 불리는 것을 보고 놀라 그를 질책하면서, 용변을 볼 때는 침묵하라고 명령했습니다. 뚜까람은 "좋습니다."하고는 침묵 했지요. 그러자 즉시 라마의 이름이 뚜까람의 모든 모공(毛孔)을 통해 솟아 나왔고, 승려는 그 시끄러운 소리에 소름이 끼쳤습니다. 이때 그가 뚜까람에게 말했습니다. "그러지 말라는 것은 보통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이지, 당신같은 성자들에게는 해당되지 않습니다"

질문자 : 스리 라마그리슈나는 깔리여신의 상(像)에서 생기를 보았다고 합니다. 그것이 사실일 수 있습니까?

마하리쉬 : 그 생기는 라마크리슈나만 감지했지 모든 사람이 감지한 것은 아닙니다. 그 생명기운은 그 자신에게서 비롯된 것입니다. 마치 외부에서 현현하여 그를 끌어들인 것처럼 보인 것은 그 자신의 생명기운이었습니다. 만일 그 상이 생기로 가득 차 있었다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발견했겠지요. 그러나 일체가 생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많은 헌신자들이 스리 라마크리슈나와 비슷한 체험을 해 왔습니다.

질문자 : 돌에 어떻게 생기가 있을 수 있습니까? 그것은 의식이 없습니다.

마하리쉬 : 전 우주가 생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돌이 무의식이라고 했지만, 지금 무의식을 이야기하는 것은 그대의 자아의식입니다. 어떤 사람이 어두운 방안에 어떤 물건이 있는지 보고 싶으면 등불을 들고 그것을 찾습니다. 그 불빛은 그 사물이 있고 없음을 파악하는데 유용합니다. 어떤 사물이 의식이 있는지 없는지 발견하는 데는 의식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어두운 방 안에 있으면 등불을 들고 그를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사람을 부르면 대답하니까요. 그 사람이 자신의 존재를 선언하는데는 등불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의식은 스스로 빛납니다.

지금 그대는 잠이 들면 의식이 없고 생시에는 자기를 의식한다고 말합니다. 실재란 어떤 것입니까? 실재는 지속적이고 영원해야 합니다. 현재의 무의식도 자아의식도 실재는 아닙니다. 그렇지만 그대는 언제나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 순수한 존재가 실재입니다. 그 밖의 것들은 연관된 것에 불과합니다. 순수한 존재는 의식 외의 다른 것일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대는 자신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의식이 바로 실재입니다. 그 의식이 한정자(몸,마음 등)와 연관 될 때 자아의식, 무의식, 잠재의식, 초의식, 인간의식, 개-의식, 나무-의식을 말하게 됩니다. 그 모두에서 불변의 공통인자는 의식입니다. 따라서 그 돌은 그대가 잠들어 있을 때 만큼 무의식입니다. 그것이 전적으로 의식이 없습니까?

질문자 : 그러나 개-의식은 저의 의식과는 다릅니다. 개에게는 성경을 읽을 수 없습니다. 또 나무는 움직일 수 없지만 저는 움직이고 행위합니다.

마하리쉬 : 나무를 서 있는 사람이라 하고, 사람을 움직이는 나무라고 해 보십시오.



                                                                      -라마나 마하리쉬 대담록-


[한담(閑談)]​

​위의 마하리쉬 말씀 중에서, <그 원초적인 이름은 그 개인이 아무 노력을 하지 않아도 자발적으로 항상 계속됩니다. 그 이름이 아함(aham), 곧 '나'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드러날 때는 아함까라(ahamkara), 즉 에고로서 드러납니다. 이름을 구두로 염하다 보면 내심으로도 염하게 되고, 그러다 결국 영원한 진동 속으로 녹아 듭니다.>

그 원초적인 이름이 '나', 즉 아함(aham)이라고 했는데, 이것이 "내가 있다" 존재의식의 핵점을 말합니다. 이 아함은 일종의 존재의 기본 진동음으로, 처음에는 원초음 "AUM(옴)"소리의 발음이었다가, 이것이 "나"라는 아함(Aham)의 소리로 변형되고, Aham이 다시 영어의 "I AM(내가 있다)"의 소리로 변형된 것 같습니다. 원래 "나"라는 '아함'은 우주적 의식의 원초음인 "옴"의 진동음이 그 뿌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Aham'에서 또한 'Atman(아트만)'이 변형되어 나온 것 같습니다. 개인의식인 아함카라(Ahamkara)는 "나라는 느낌"을 말합니다.

원래 라마나 마하리쉬의 대담록이나 니사르가다타 마하리지의 대담록을 현지 인도어에서 영어로 번역 된것을 다시 한국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 I AM"을  한국말로 "내가 있다"로 번역을 했는데, 이렇게 "내가 있다"로 번역을 하다 보니깐, 대부분의 번역서를 읽는 사람들은 "내가 있다"를 육체마음으로 느껴지는 "육체의 느낌"을 "내가 있다"로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영어의 "내가 있다"의 정확한 해석은 그냥 "내가 있다"라고 하는 것 보다는, "내가 ~ 있다" 또는 "내가 ~ 알고 있다"는 해석이 더 정확합니다. 영어의 문장구조와 한국어의 문장구조는 그 구문 순서가 거꾸로 되어 있습니다.

즉 "I AM"에서 "I"는 모든 우주현상계의 주시자(알려지지 않은 것)를 말합니다. 따라서  "I AM"은 우리말로 예를 들어 해석해 보면 "나는 (모니터를 보고 있는 것을) 알고 있다" 이렇게 말을 늘어 놓아야 되는데, () 안의 (모니터를 보고 있는 것을)은 알려진 개체 나의 행동이지만, "내가 (알고)있다"의 "나"는 드러나지 않은 우주적 '나" 즉 현상계의 주시자를 말합니다. "I AM'에서 "AM"은 단순히 "있다"가 아니라, "~알고 있다" 또는 "~보고 있다"는 우주적 주시자(나)의 존재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영어로 <아엠>하면 그것은 보이지 않는 우주적 주시자 또는 우주적 자아를 말합니다.

여기에는 단순히 "있음"이라는 존재 뿐 아니라, <알고 있다>라는 "주시" 또는 "지혜"라는 두 가지 즉 (주시 + 존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선불교에서 혜능스님이 주장하는 정(定, 존재)와 혜(智慧,비춤,주시)가 동일하다는 말씀과 상통합니다.

정(定)이 곧 혜(慧)이고, 혜(慧)가 곧 정(定)이라는 말씀은 존재(있다)와 지혜(주시,알다))가 하나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내가 있다"는 곧 "내가 ~~ 알고 있다" 또는 "내가 ~~ 보고있다"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도말의 <Aham>이 영어의 <I AM>으로 되었으며, 이 아함과 아엠은 바로 개인인 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주적인 나, 모든 현상계의 주시자를 말합니다. 이것은 마음 넘어에 있으며 항상 생시와 잠과 꿈 상태를 지켜보고 있는 주시자로서 이것이 바로 정확한 <I AM>이라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이것을 라마나 마하리쉬나 니사르가다타는 "의식"이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만일 구도자가 자신이 <의식>,즉 "내가 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면 그는 이미 그 자신이 우주 전체가 된 것입니다.

이 상태에 있어야 이 세상 만물이 모두가 <의식>으로 되어 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고, 우주전체가 나 자신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아직 업습이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에 해탈은 하지 못합니다. 마하리지나 마하리쉬가 항상 말씀하시기를 구도자는 자기가 <의식>이라는 것을 확신하고 나서 수행해야 된다는 말씀은 바로 이 수준까지 초보구도자를 끌어 올리기 위해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분들의 더 깊은 가르침을 수용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자기와 모든 세상 만물이 동일한 의식이라는 확신을 갖지 않은 구도자는 더 깊은 곳으로 진입하기가 불가능합니다. 여하튼 마하리지나 마하리쉬 가르침을 공부하는 분들은 "내가 있다"가 무엇이며, 어떤 수준인가를 확실하게 이해해서 그 상태가 확고해져야 그분들의 가르침을 명확하게 이해해서 실천에 옮길 수가 있습니다. 위에서 마하리쉬님이 말씀하시는 돌,나무,개 등이 모두 의식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만물이 의식(내가 있다)임을 확신시키기 위한 말씀이며, 자기 자신이 우주적 전체의식(내가 있음) 그 자체라는 것을 이해하면, 돌이나 개, 나무가 전부 의식 그 자체라는 것도 저절로 이해하게 됩니다. 그래야 더 깊고 미묘한 깨달음법으로 전진할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우주의식이 실지로 '나'라고 체험되면  모든 만물과 중생이 나와 다르지 않다는 불교의 자비심(慈悲心)이 저절로 드러나면서 마하 보살의 경계로 접어들게 됩니다.

                                                                           -무한진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