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엄경 공부(38)

2015. 2. 11. 09:12성인들 가르침/능엄경

[무한진인의 능엄경 공부하기 38회]  


6-3-4. 설미처(舌味)가 곧 여래장


[본문]

[阿難汝當二時 衆中持鉢하야 其間惑遇酥酪醍醐하면 名爲上味니라

此味爲復生於空中 生於舌中 爲生食中 ]

 아난아! 네가 항상 두 때에 대중 가운데에서 발우(鉢盂)를 들고 걸식을 하는데,

사이에 혹 소락제호(酥酪醍醐)를 만나면 이를 최고의 맛이라 한다. 어떻게

냐? 이 맛이 허공에서 생긴 것이냐, 혀에서 생긴 것이냐, 음식에서 생긴

이냐?  

[해설]

"두 때"라는 것은 ​아침과 점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소락제호(소酪醍호)"는 우유를 정제한 것을 락(酪)이라고 하고, 그  락(酪)을 정제한 것을 생소라고 하며, 생소를 정제한 것을 열소라 하며, 그 열소를 정제한 것을 제호라고 한답니다. <소>자와 <호>자는 콤퓨터에서 한자가 나오지 않아서 못 올렸습니다. 말하자면 제호란 우유로 만든 것 같은데  가장 좋아서, 이것만 먹으면 만병이 통치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당시 이 세상에서 가장 맛 좋은 것을 제호라고 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혀의 감각을 즐겁게하는 것이 허공에서 생겼느냐, 혀에서 생긴 것이나, 음식에서 생긴 것이냐?하고 묻고 있습니다.


 [본문]

[阿難若復此味 生於汝舌한댄 在汝口中하여 秪有一舌한대 其舌爾時

成酥하니 遇黑石蜜이라도 應不推移리라 若不變移인댄 不名知味하고 若變

移者인댄 舌非多體이니 云何多味 一舌之味리요 ]

  아난아! 만약 이 맛이 너의 혀에서 생겼다면 너의 입 속에는 다만 혀가 하나

그 혀가 그때에 이미 소락제호(酥酪醍醐)의 맛을 이루었으니 단단한 꿀엿을

나더라도 응당 그 맛이 달라지지 않아야 할 것이다. 만약 달라지지 않는다면

맛을 안다고 할 수 없고, 만약 달라진다면 혀는 여러 개의 몸이 아닌데 어떻게

여러 가지 맛을 한 개의 혀로 알 수 있겠느냐?

[해설]

이 천하의 제호 맛이 만약 혀에서 ​생겼다면, 하나 뿐인 혀가 제호의 맛을 지니고 있다면, 단단한 꿀엿을 먹더라도 그대로 제호의 맛일 뿐이지, 꿀엿맛으로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만일 혀의 맛이 달라지지 않는다면 여러가지 맛을 분별할 수가 없으니, 그건 혀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본문]

[若生於食인댄 食非爲識한대 云何自知리요 又食自知인댄 卽同他食이니

於汝완대 名味之知리요 ]

  만약 음식에서 생기는 것이라면 음식은 분별하는 인식[識]이 있지 아니한데 어

떻게 스스로 알겠느냐? 또 음식이 스스로 안다면 곧 다른 사람이 먹는 것과 같은

데, 너와 무슨 관계가 있기에 맛을 안다고 하겠느냐?

[해설]

만일 음식에서 생긴 것이라면, 음식은 무정(無情,의식이 없는 것)인데, 어떻게 인식하는 작용이 없는데 알겠느냐는 것입니다. <또 음식이 스스로 안다면 다른 사람이 먹는 것과 같은데>라는 말은, 음식에서 난다면 다른 사람이 그 음식을 먹을 때 너는 쓴맛인지,단맛인지 모르지 않느냐, 그러니깐 다른 사람이 먹는 것과 같다는 얘기입니다.


[본문]

[若生於空인댄 汝噉虛空하라 當作何味 心其虛空 若作鹹味인댄鹹汝舌

일새 亦鹹汝面이요 卽此界人同於海魚하며 卽常受鹹일새 了不知이로다

不識淡인댄 亦不覺鹹이며 必無所知인댄 云何名味리요 ]

  만약 허공에서 생기는 것이라면 네가 허공을 씹어 보아라. 무슨 맛이 있더냐? 허공이 만약 짠맛을 짓는다면 이미 너의 혀를 짜게 하였으므로 또한 너의 얼굴도 짜게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곧 이 세계의 사람들은 모두 바다 속의 고기와 같을 것이며, 이미 항상 짠 것 만을 수용했기에 담담한 것은 알지 못할 것이다. 만약 담담함을 알지 못한다면 또한 짠 것도 깨닫지 못할 것이며, 반드시 아는 바가 없다어떻게 맛을 안다고 할 수 있겠느냐?

[해설]

만약 허공에서 맛이 생긴 것이라면 허공을 씹어 보면 아무 맛도 없다는 것입니다.

만약 허공이 짠맛을 짓는다면, 그 허공 속에 있는 얼굴과 혀도 짠맛이 나야 되는데, 그렇다면 이 세상사람들이 바닷 속의 생선들처럼 짠맛에 졀여져 있어야 하고, 이미 짠 맛이 되었다면 맛이 없는 담담함을 모르므로, 담담함을 모르면 역시 짠맛도 분별할 수가 없을 것이니, 어떻게 맛을 안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


 [본문]

[是故當知하라 舌味與嘗 俱無處所하고 卽嘗與味二俱虛妄하여

緣非自然性이니라 ]

  그러므로 응당 혀와 맛과 맛보는 것[嘗]이 모두 처소가 없고, 맛보는 것[嘗]

[味]의 두 곳이 다 허망하여 성품이 본래 인연도 아니고 자연도 아닌 여래장

여성(妙眞如性)임을 알아야 한다.

[해설]​

그러므로 혀와 맛과 맛보는 작용이 모두 어디서 나온데가 없이 여러가지 인연작용에 의해서 일시적으로 나타난 허망한 그림자 현상(相)이며, 본래 성품(性)은 인연으로 생긴 것도 아니고, 자연적으로 있는 것도 아닌 여래장 묘진여성이라는 것입니다.

 

6-3-5. 신촉처(身觸處)가 곧 여래장


​[본문]

[阿難汝常晨朝 以手摩頭하리니 於意云何 此摩所知할새 誰爲能觸

在手 爲復在頭 ]

 아난아! 너는 항상 새벽마다 손으로 머리를 만질 것이다. 그때 너의 생각이 어떠했냐? 만져서 느낌이 있을 때에 무엇이 감촉을 생기게 하느냐? 촉을 생기게 하는 것손에 있다고 생각하느냐, 머리에 있다고 생각하느냐?

[해설]

부처님 시절의 구도자들은 계행을 지켰는데, 아침마다 일어나서 자기의 머리를 세번씩 만지면서 외우는 것이 있었다고 합니다. 즉, "입을 지켜서, 말을 하지 말고, 뜻을 올바로 파악하고 있고, 몸으로는 ​일체 범하지 말라"하는 내용의 게송을 외우고, 또한 몸치장을 안하며, 걸식으로 생활하여, 탐심과 자만심을 일으키지 않게 한다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아침마다 손으로 머릴를 세번씩 쓰다듬을 때에, 그 감촉이 손에 있다고 생각하는지, 머리에서 감촉이 안오는지 묻고 있습니다.


 [본문]

[若在於手인댄 頭卽無知어늘 云何成觸 ]

 만약 감촉을 생기게 하는 것이 손에 있다면 머리는 앎[觸知]이 없어야 하는데, 어하여 머리에서도 앎이 이루어지느냐?

[해설]

손으로 머리를 만져서 알 때에 만지는 자가 손에 있다고 한다면, 촉감의 주체가 손에 있고 머리는 감지되는 대상이니, 머리는 몰라야 됩니다. 즉 책상을 만질 때에 손이 아는 것이지 책생은 손이 와 닿는 것을 모른다는 얘기입니다. 만일 만지는 주체가 손에 있다고 한다면 네 머리는 주체인 손이 아니깐 머리는 만지는 촉감을 몰라야 된다는 것입니다.


 [본문]

[若在於頭인댄 手卽無用어늘 云何名觸 ]

  만약 촉을 생기게 하는 것이 머리에 있다면 손은 곧 아는 작용이 없어야 할 터인데, 어찌하여 손에 ‘느껴 아는 것이 있다’고 이름하느냐?

[해설]

만약 접촉감각을 생기게 하는 것이 머리에 있다면, 손은 촉감의 대상이므로 아는 작용이 없어야 하는데, 어째서 손에서 아는 감각이 느껴지느냐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머리에서 촉을 느끼게하는 것이 나온 게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본문]

[若各各有인댄 卽汝阿難 應有二身이요 若頭汝手 一觸所生인댄 卽手

當爲一體리니 若一體者인댄 觸卽無成이요 若二體者인댄 觸誰爲在

在能非所하고 在所非能이니 不應虛空 與汝成觸이리라 ]

 만약 감촉을 생기게 하는 것이 머리와 손에 있다면 너 아난에게 응당 두 몸이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만약 머리와 손이 하나의 감촉으로 생긴다면 곧 손과 머리가 응당 한몸이 되어야 할 것이니 만약 한 몸[一體]이라면 느낌이 이루어질 수 없을 것이다.

  만약 촉(觸)은 하나인데 몸이 둘[二體]이라면 촉이 몸에 있다는 말이냐? 능촉(能觸)에 있다면 소촉(所觸)에는 없을 것이고, 소촉에 있다면 능촉에는 있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응당 허공이 너로 더불어 촉처(觸處,느낌)를 느끼지는 아니했을 것이다.

[해설]

만약 머리와 손에 각각 감촉을 생기게 하는 것이 있다면, 아난이 몸을 둘을 가진 게 된다는 것입니다. 또  머리와 손이 같은 하나의 감촉이 생긴다면 손과 머리가 하나이므로 어떻게 서로 만져지는 것이 느껴지겠느냐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만져지는 감촉은 만지는 자(能觸)와 만져지는 대상(所觸)이 있으므로써 이루어지는 것인데, 하나라면 촉(觸)이 성립될 수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본문]

[是故當知하라 覺觸與身 俱無處所하고 卽身與觸二處虛妄하여 本非因緣

自然性이니라 ]

  그러므로 응당 이 느끼는 것[覺觸]과 몸[身]이 모두 처소가 없고, 몸과 촉의 두 곳이다 허망하여 성품이 본래 인연도 아니고 자연도 아닌 여래장 묘진여성(妙眞如性)임을 알아야 한다.

[해설]

그래서 촉감을 아는 것과 몸이 모두 어디선가 나온 데가 없어서 , 몸과 촉감은 몇가지 인연작용으로 생긴 허망한 그림자 현상(相)이며, 그 본래 성품은 인연도 아니고 자연적으로 있는 것도 아닌 항상 있는 그대로의 여래장 묘진여성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6-3-6. 의법처(意法處)가 곧 여래장


[본문]

[阿難汝常意中 所緣善惡無記三性으로 生成法則하니 此法爲復卽心所生

爲當離心하고 別有方所 ]

 아난아! 너의 항상한 의근(意根) 가운데 대상에 반연[所緣]하는 선(善)과 악(惡)과 무기(無記)의 세 가지 성품으로 법칙(法則)을 이루었으니 이 법칙이 마음에서 생긴 이냐, 마음을 여의고 따로 장소가 있어 거기에서 나온 것이냐,

[해설]

생각하는 마음 가운데 대상에 반응하는 세가지 뜻이 일어나는데, 선(善)은 좋은 것을 생각하는 것, 악(惡)은 나쁜것을 생각하는것, ​또 무기(無記)란 선(善)도 아니고, 악(惡)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또 무기(無記)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혼침해서 아무 기억도 없이 멍청한 것이고, 또 하나는 악도 아니고 선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여기에서 무기는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라고 것(非善非惡)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법칙(法則)이란 법진(法塵)의 정칙(定則)을 이르는 것인데, 즉 마음 속에서 기억으로 재생될 수 있는 생각의 파동이 일어나는 과정을 말합니다.

법진(法塵)이란 의근(意根,八識)에 의해서 바로 일어나긴 했지만, 그 형태로 있었던 것이 아니라, 어떤 몇가지 조건의 인연 또는 환경에 의해서 8식(意根)에서 유도되어 일어난 것이지, 8식에서 직접 기어 나온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그 법진(생각)은 따로 나온 것이 없는데, 여기서는 법진(생각)이 의근(8식,마음)에 의지해서 있느냐, 아니면 의근(마음)을 떠나서 따로 어디에 있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본문]

[阿難若卽心者인댄 法則非塵일새 非心所緣어늘 云何成處리요 ]

 아난아! 만약 법칙(法則)이 마음에서 생긴 것이라면 법칙은 곧 경계[塵]로서의 의미잃게 되어 마음의 반연할 바의 대상이 될 수 없는데, 어떻게 의법처(意法處)가 이어지겠느냐?

[해설]

법진(생각)이 일어나는 과정이 마음에서 일어난 것이라면, 마음은 아는 주체이므로 법진이 대상으로서의 의미를 잃으므로 마음에 반연하여 일어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즉 생각을 아는 자, 주체와 대상인 생각내용으로 ​이원화 구성되어야 의법처(意法處)가 되어야 생각이 나온 줄을 아는데, 마음 자체가 생각이니 마음에 반연되지가 않으므로 법진이 따로 있지가 못하다는 것입니다.


 [본문]

[若離於心하고 別有方所인댄 卽法自性 爲知非知 知卽名心어늘 異汝非

하며 同他心量이거늘 卽汝卽心인댄 云何汝心更二於汝리요 若非知者인댄

此塵旣非色聲香味 離合冷煖及虛空相하리니 當於色空 都無表示하고

不應人 更有空外이며 心非所緣어니 處從誰立이리요 ]

 만약 법칙(法則)이 마음을 여의고 따로 처소가 있다면 그 법칙의 자성에 앎이 있느냐, 앎이 없느냐?

  만약 법칙의 자성에 앎이 있다면 마음이라고 불러야 하는데 너의 마음을 떠나 따로 있으니 너와는 다르고, 그렇다고 앎이 있으니 경계라고도 할 수 없다. 이는 마치 타인마음과 같은데 이를 굳이 ‘너의 마음이다’고 한다면 마음이 곧 두 개가 되나니 어떻게 마음이 다시 너에게 둘이 있을 수 있겠느냐?

 만약 따로 있는데 앎이 없다면 이러한 법진(法塵)은 이미 물질[色]이나 소리[聲] 향[香] 맛[味] 그리고 떨어지고[離] 합(合)하며 차고[冷] 따뜻함[煖]과 허공(虛空) 현상이 아닌데 어떻게 어느 곳에 있다고 할 수 있겠느냐?

 지금 색(色)이나 허공 등으로 도무지 표시할 수가 없고, 그렇다고 응당 사람이 생각수 없는 ‘허공 밖에 있다’할 수도 없는 것이며, 결국 앎이 없다면 있는 것이 아니어서 마음이 이미 대상을 반연(攀緣)할 수 없을 것인데, 의법처(依法處)가 어떻게 성립되겠느냐?

[해설]

만일 법진(생각)이 마음바탕(8식)을 떠나서 따로 있다면, 그 생각 자체에 앎이 있느냐 없느냐 묻습니다. 즉 아는 작용은 마음 바탕에서 비쳐서 아는 작용이 생기는데, 마음바탕에서 따로 떨어져 있는 생각파동​에 앎의 기능이 있느냐 없느냐를 물어 보고 있습니다. 만약 법진(생각)에 앎의 기능이 따로 있다면, 그 생각 자체도 마음이므로, 마음 바탕을 떠나서 마음이 따로 또 하나 있으니, 네 마음이 아니며, 그렇다고 주체로써의 앎을 비치고 있으니 생각인 대상이라고도 말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내 마음이 아니고 다른 사람의 마음과 같은데, 만약 너의 마음이라고 고집한다면, 마음이 곧 두개가 되는데, 어떻게 너의 마음이 두개가 될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만약 법진이 마음 바탕에서 떨어져 따로 있는데 아는 작용이 없다면, 마음도 아니고, 색성향미촉도 아니고, 허공도 아니고, 붙었다 떨어지는 촉진도 아니고, 어떤 물리적 현상도 아닌데 그럼 어떤 것이냐는 것입니다.  지금  색성향미촉으로도 도저히 표시할 수 없고 空으로도 표시할 수 없으며, 그렇다고 사람이 생각조차 할 수 없는 허공 밖에 있다고 할 수도 없으며, 결국 아는 작용이 없다면, 없는 것이기 때문에  마음의 대상으로 반연되는 것이 아니므로, 의법처(意法處)가 성립이 안된다는 것입니다. 

즉 생각하는 자(주체)와 생각내용,즉 대상이라는 것이 구성이 안된다는 것입니다.  


 [본문]

[是故當知하라 法則與心俱無處所하고 卽意與法二處虛妄하야 本非因緣非

然性이니라 ]

 그러므로 응당 법칙과 마음이 모두 처소가 없고, 마음과 법의 이 두 가지가 허망하성품이 본래 인연도 아니고 자연도 아닌 여래장 묘진여성(妙眞如性)임을 알아야 한다.

[해설]

그러므로 법진(생각)과 마음이 모두 인연작용으로 인하여 나타난 허망한 것이며, 그 원래 성품은 인연으로 인한 것도 아니고, 자연적으로 있는 것도 아닌, 있는 그대로의 여래장 묘진여성임을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무한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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