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9. 13. 13:23ㆍ성인들 가르침/금강경
무한진인의 금강경 이야기(18)
* 특집 <A라고 말하는 A가 아니다. 그래서 A라고 말한다>에 대하여
지금까지 금강경의 8분까지 이야기해 보았는데, 8분까지가 <상(相)을 상으로 보지 말라>는 금강경의 주 주제에 대한 이론적인 개념의 기초 가르침이라고 볼 수가 있읍니다.
앞으로 나올 제9분 이후부터는 <상을 상으로 보지 말라>는 이론에 근거하여 실질적으로 상(相)을 타파해 버리는 실참 수행방법으로 들어 가는데, 그 수행에 활용하는 도구가 바로 <A라고 말하는 것은 A가 아니다.그래서 A라고 부른다> 라는 비논리적 논리를 통해서 자연스럽게 기존의 개념적인 상(相)을 잘라 버리는 반야지혜를 계발하는 훈련을 반복하도록 구성되어 있읍니다.
말하자면 이 <A라고 말하는 것은 A가 아니다.그래서 A라고 부른다>라는 문장이 마치 이원적인 상(相)을 짤라 버리는 반야지혜의 금강저(金强杵)와 같은 기능을 반복적으로 하게 됩니다.
금강경에 빈번하게 나오는 <A라는 것은 A가 아니다.그래서 A라고 부른다>는 문장이 어떤 의미가 있는가를 풀어 보겠읍니다.
제 5분의 사구게에서 <무릇 형상있는 것은 모두 허망한 것이니, 만약 모든 형상이 형상이 아님을 보면 곧 여래를 볼 것이다.> 라고 되어 있읍니다.
위의 사구게를 거꾸로 변형해서 다시 한번 보겠읍니다.
< 형상없는 것은 모두가 실재(實在)하니, 만약 모든 형상이 실재하는 것이라고 본다면 곧 환상을 보는 것이다>
<A라고 말한다면 A가 아니다. 그래서 A라고 말하는 것이다>라는 문장에서,
<A라고 말한다면 A가 아니다>라는 것은 A라는 형상이 이원적으로 대상화 되어 말할 수 있다면, 이것은 허망한 허상의 대상적인 그림자를 말할 뿐, A의 실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럼 A의 실재는 무엇일까요?
바로 <A가 아니다>가 실재를 가리킵니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그것은 내면 속 깊히 있어서 지적할 수가 없지만, 금강경에서는 <A가 아니다> <卽非A> 라는 말로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있읍니다만, 바로 그 말이 상(相)을 빼버리는 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한마디로 <~ 아니다> 라는, 그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전혀 알 수 없는 것입니다.
다음에, <그래서 A라고 말하는 것이다>라는 구절에서, 이원화로 대상화 된 상(相)이기 때문에 앞 구절에서 "A라는 명칭"으로 부른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떤 선생님이 초등학교 학생들에게 백지 한 가운데에 작은 새 한마리가 날라가는 그림을 보여주며, 이것이 무엇을 그린 그림이냐고 물어 보았읍니다.
거의 전체 학생이 "새가 날아가는 그림입니다." 또는 "자유" 등으로 말하는데, 선생님이 모두 틀렸다고 말합니다.
마지막에 한 학생이 "그것은 하늘을 그린 그림입니다." 라고 대답합니다. " 맞어 !"
백지에다 하늘을 그리려면 하늘이라는 허공은 아무 것도 없으므로 직접 그릴 수가 없고, 구름이나, 날아가는 새, 또는 비행기 등 어떤 상(相)을 그려서 하늘을 표현 할 수 밖에 없는 것이죠.
아무 것도 없는 허공은 백지에 그릴 수 없으므로, 대신 어떤 상(相)을 그려서 배경에 있는 하늘허공을 표현해야 합니다.
-저 새가 날아가는 그림은 새가 날아가는 그림이 아닙니다. 그래서 새가 날아가는 그림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래가 A라고 말한 것은 A가 아닙니다. 그래서 A라고 말씀하셨읍니다.>라는 문장도 이와 비슷한 표현법이라고 볼 수 있읍니다.
다시, 반야심경 식으로 이야기 해 보자면,
색(色, 여기서는 A相)이 공(空, 여기서는 非相)이고, 공(空)이 곧 색(色)이므로,
공(空)은 비이원적 상태이기 때문에 대상화된 말로는 표현할 수 없으므로,
대신 색(色)인 이원적인 A상(相)의 명칭을 그대로 사용하여,
비이원적인 공(空,非相)을 가르켜 보였다,라고 말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겠읍니다.
즉, <A>라고 부르는 상(相)의 명칭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공(空, 상이 아닌 것,非相)을 가리켜 주는 손가락 표지판으로 그대로 사용했다고 말한 것입니다.
(* 비상(非相)이 곧 공(空)이라고 개념화 해서 단정적으로 말할 수 없지만, 여기서는 설명의 편의상 임시로 차용해서 공(空)이라고 이름을 붙혀 보았읍니다.)
비유적으로 말하면, 한 건물에 어떤 사람(相,色)이 월세를 들어 <월성주점(A)>이라는 간판을 걸고 음식점을 하다가 그만두고 나갔는데, 그 건물 원래 주인(非相,空)이 다시 그 가계에서 똑 같은 영업을 하면서 그대로 <월성주점(A)>이라는 간판을 떼지 않고 계속 영업을 하는 것과 같읍니다.
또 한가지 재미있는 예를 들어보면,
그 유명한 소염시(小艶詩)에서 잘 설명을 하고 있읍니다.
<이 풍광, 한폭의 그림으로 그리려 해도 도저히 그릴 수가 없네.
깊고 깊은 규방 안에서 애간장만 태우며
자주 자주 몸종 소옥이를 부르지만, 소옥이에겐 아무 일 없고,
오직 애인을 향해서 자기의 뜻을 알리고 싶었을 뿐.>
이 시는 양귀비가 현종황제 몰래 애인 안록산과 밀회하기 전에 규방 안에서 몸종 소옥이를 일없이 자꾸 큰소리로 불러대며 비밀 신호를 하면, 밖에서 숨어서 기웃거리고 있던 안록산이 눈치채고 뒷문으로 들어 왔다는 이야기를 풍자한 시인데, 선가(禪家)에서는 화두(話頭) 넘어의 그 오묘한 의미를 가리키는 손가락으로 상징하여 많이 인용하는 문장입니다.
이 소염시 내용이 바로 금강경의 <A라고 말한다면 A가 아니다. 그래서 A라고 말하는 것이다>라는 문장의 의미를 잘 설명하고 있읍니다.
즉, 위의 소염시를 금강경 식으로 바꾸어 보면,
<양귀비가 소옥이를 부르는 것은 소옥이를 부르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소옥이를 부르는 것이라고 말한다>
양귀비가 소옥이를 부르는 것은 진짜로 소옥이를 부르는 것이 아니고, 애인 알록산에게 비밀신호를 보내느라고 소옥이를 부르지만, 그래도 겉으로는 소옥이를 부르는 소리라고 말합니다.
마찬가지로 A라고 부르는 어떤 이름은 그것이 바로 표현할 수 없는 절대바탕을 부르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모든 이름은 바로 절대바탕 그 자체를 표현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읍니다.
불교 수행 중에 화두를 잡고 하는 간화선뿐 만 아니라, 염불이나 다리니를 외는 것도 사실은 그 염불이나 다라니를 외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위의 소염시에서 양귀비가 자기 애인 안록산에게 비밀 신호를 보낸는 것처럼, 알 수 없는 배면에서 염불이나 다리니를 말없이 듣고 있는 자, 또는 관(觀)하는 주시자를 일깨워내기 위해서 노크하는 소리라고 볼 수가 있겠읍니다.
금강경 내용 속에서 예를 하나 들어서 이야기 해 보자면,
금강경 13분에는 <A라고 말한다면 A가 아니다. 그래서 A라고 말하는 것이다>라는 형식의 문장이 많읍니다. 그 중에 하나 예를 들어서 이야기를 해 보겠읍니다.
<如來說世界 非世界 是名世界(여래설세계 비세계 시명세계)
여래가 말씀하신 세계는 세계가 아닌 것을 말씀하신 것이며, 그 표현이 세계입니다.>
여래가 말씀하신 <세계>라는 것은 <세계가 아닌 것>을 말하며, 그래서 세계라고 표현한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깨달은 이인 여래가 말씀하신 것입니다.
만일 깨닫지 못한 일반인이 <세계>라고 말하면, 그냥 그것은 보통 말하는 이 대상세계를 말합니다.
그러나 여래는 이 이원화 상대세계의 언어를 사용해서 절대상태를 알려 주려고 하는 말씀이기 때문에 여래가 "세계"라고 말하면, 이것은 이 보이는 대상세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가 아닌 것", 즉 보이지 않는 절대세계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구도자들은 부처님이 말씀하시는 자세를 흉내내서 수련할 필요가 있읍니다. 그것이 바로 <A라고 말한다면 A가 아니다. 그래서 A라고 말하는 것이다>라는 방식으로 연습을 하자는 것이죠.
여기서 <세계가 아닌 것> 즉 일반적으로 말해서 <A가 아닌 것>이 절대상태를 표현한 것이긴 하지만, 이것에 대하여 기존 경전에서 말하는 관념적인 언어 즉,공(空)이나 무(無), 무아(無我), 그런 기존 관념으로 절대 상상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그냥 "모르는 것"으로, 빈 칸 ( )으로 놔두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무심을 기르는 것입니다.
만일 무심이다 라는 생각을 한다면, 그것은 무심이 아니죠.
위에서 여래가 <세계>라고 표현한 것은 그냥 말일 뿐이며, 그 말을 듣는 것을 말없이 관하는 주시자가 바로 진짜이지만, 또 그런 생각을 한다면 그것이 빗나갑니다. 이 세상 전체가 절대바탕이 의식에 반사되어 나타난 것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모든 사물을 있는 그대로 전체의 연기 작용으로 본다면 모두가 진리 그자체의 표현이지만, 만일 개별적인 사물을 실체한다고 본다면 그것은 허상을 보는 것이죠.
깨달은 이에게는 책상 앞에 놓인 연필꼿이, 모니터, 지구본, 스탠드, 이런 집기들 하나 하나가 모두 진리의 표현입니다.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을 묻는 것은 진리가 무엇이냐고 묻는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조주스님에게 어떤 중이 물었더니 그 자리에서 앞에 보이는 "뜰 앞의 잣나무"라고 대답해 주었읍니다.
그 속에 무슨 숨어있는 특별한 뜻이 있는 것은 아니죠.
깨달은 이에게는 그저 지금 현재 눈 앞에 보이는 모든 것이 진리 그자체의 표현입니다. 모든 것이 진리입니다.
금강경식으로 말하면 "조사가 말한 '뜰 앞의 잣나무'는 뜰 앞의 잣나무가 아니다. 그러므로 뜰 앞의 잣나무라고 표현한 것이다." 이렇게 말할 수가 있는 것이죠.
이 말 구절 속에 진리가 " 뜰 앞의 잣나무가 아니다"로 표현되어 있읍니다.
깨달은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진리에 개방되어 있어서 눈 앞에 보이는 시계는 시계가 아닌 것으로 보며, 모니터는 모니터가 아닌 것으로 봅니다.
그 ~ 아닌 것(非)이 바로 진리입니다.
모든 사물에서 상(相), 즉 관념 또는 모양과 의미를 빼 버리면 그것이 (~ 아닌 것)인데, 그냥 그것을 시계, 연필꼿이, 스탠드, 등등으로 그 이름 그대로 부르고 있읍니다.
따라서 부처님이 말씀하시는 방식을 잘 숙지하여 연습을 하면 깨달은 이의 사물을 대하는 자세를 배울 수가 있는 것이죠.
그런 의미에서 <A라고 말한다면 A가 아니다. 그래서 A라고 말하는 것이다>라는 금강경에서 사용하는 문장형식을 탐구해 보고 있는 것입니다.
참고적으로 상(相)이 상(想) 아님을 보는 방법과 관련된 글들을 몇 문장 뽑아 보았읍니다.
노자도덕경 1장에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이라는 첫문장은
[道를 道라고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은
본래부터 있는 항상 변함없는 참된 道가 아니며,
(어떤) 이름으로 그 존재를 부를 수 있는 것은
본래부터 항상 변함없이 있는 참된 존재가 아니오.]
라고 해석할 수 있읍니다.
이것이 바로 금강경의 <A라고 말하는 것은 A가 아니다>라는 문장과 똑같은 뜻을 표현한 문장입니다. 금강경에서 마지막의 <그래서 A라고 부른 것이다>라는 구절은 앞의 문장에서 <A라고 말하는 것은~>을 다시 상기시키기 위해 반복한 말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이름을 부를 수 있다는 것은 참된 그것이 아니고 대상화 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름을 부를 수 있는 것이죠. 그러나 참된 그것은 이름을 부를 수 없읍니다. 이름을 부를 수 없는 마지막 남아 있는 것은 바로 아무 상(相)도 없는 깨끗한 거울(반야)만 남아 있습니다.
도덕경의 이 문장이 뜻하는 것은 본래 道는 어떤 명칭으로도 절대로 표현될 수 없으나, 항상 여기에 말없이 있다는 뜻입니다.
금강경에서도 역시 무슨 명칭으로든 부를 수 있는 것은 실재(實在)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죠.
도덕경 속의 제1장의 뜻을 잘 이해하고 있으면 금강경의 <A라고 말하는 것은 A가 아니다. 그래서 A라고 부른다>라는 뜻도 역시 쉽게 이해할 수가 있읍니다.
금강경 오가해에서 <수보리야 이른바 불법이라 하는 것도 곧 불법이 아니니라>라는 금강경 원문에 대한 육조혜능의 해설이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읍니다.
" 여기에서 말한 일체의 문자장구(文字章句)가 표지판과 같고 손가락과 같으니, 표지판과 손가락은 그림자나 메아리의 뜻이다.
표시판을 의지해서 사물을 취하고 손가락을 의지해서 달을 보는 것이니, 달은 이 손가락이 아니요, 표식은 이 사물이 아닌 것이다.
다만 경을 의지해서 법을 취하는고로 경(經)이 곧 이 법이 아닌 것이어서 경문(經文)은 곧 육안으로 볼 수 있지만, 법(法)은 혜안이라야 볼 수 있도다.
만약 혜안이 없는 자는 다만 경(經)만 보고 그법은 보지 못하는 것이랴.
그 법을 보지 못하면 곧 부처님의 뜻을 알지 못함이라. 이미 부처님의 뜻을 알지 못하면 마침내 불도를 이루지 못하리라."
금강경 오가해에서 제7분의 문장 중에서< 수보리가 사뢰되, "제가 부처님의 설하신 뜻을 알기에는 아뇩삼먁삼보리라고 이름 할만한 결정적인 법이 없으며, 또한 여래가 설하셨다 할 고정된 법도 없습니다.>라는 금강경 원문 구절에 대하여 육조 혜능이 해설하는 부분에서 <일체 중생의 망령된 마음이 일어나고 멸하며 머물지 않아서 경계를 좇아 움직이는 고로 앞생각이 문득 일어나면 뒷생각이 바로 깨달을 것이니, 바로 망상이 일어난 줄 알면 이미 주하지 않음이라서 견(見)도 또한 있지 않다고 가리켜 보이셨도다. 만일 그러할진댄 어찌 정(定)한 법이 있어서 여래가 가히 설함이 되겠는가> 라고 해설하고 있읍니다.
또 육조혜능의 단경(丹經), 반야품에 이와 비슷한 문장이 있읍니다.
<捉前念 迷卽凡 後念悟卽佛(착전념미즉범 후념오즉불)> 이 문장을 대개 해석서들은 <앞 생각이 미혹하면 범부요, 뒷생각에 깨치면 곧 부처니라> 라고 해석했는데, 제가 만일 해석하라면, <마음의 주의를 앞편에 있는 상(相)을 붙잡고 있으면, 상(相)에 미혹되어 범부가 되고, 마음의 주의를 뒤편(주시자)에 두면, (空을) 깨쳐서 부처가 된다> 이렇게 해석해 보겠읍니다.
육조단경의 이 문장도 금강경 오가해의 혜능 문장과 비슷해서 겸사로 여기에 소개해 봅니다. 이 문장에서 앞생각(前念)은 상(相)이 있는 마음을 말하고, 뒷생각(後念)은 상(相)이 없는 말없는 배면의 앎인 주시자를 말합니다.
즉 금강경식으로 말하면 <상(相)을 상(相) 아닌 것으로 보라(A라고 말하는 것은 A가 아니다)>는 문장과 같습니다.
그런데 금강경에 반복적으로 이러한 <A라고 말하는 것은 A가 아니다. 그래서 A라고 부른다>라는 문장이 수없이 많이 나옵니다.
금강경 안에서 제가 대략 조사해 본 바에 의하면,
<A는 A가 아니다. 그래서 A라고 부른다>라는 형식의 문장이 대략 추산해서 45회 ~ 50회 정도 반복적으로 나옵니다.
구라마집본을 기준으로 한문 숫자가 5149자라니깐, 이 문장만 한문자를 세어 보니깐 약 820~860자가 되므로, 한문 숫자로만 따진다면 전체 문장의 약 15%에 해당하는데, 이것은 수보리의 대답부분만 세어본 것이고, 그 문장에 연결된 부처님의 질문과 연관시키면 더욱 많아지겠죠.
따라서 <A라는 것은 A가 아니다. 그래서 A라고 부른다>라는 형식의 문장이 금강경에서 얼마나 중요하게 반복적으로 제시했는가를 들여다 볼 수가 있읍니다.
금강경을 반복적인 독송을 하면 깨달을 수 있다고 선현들이 말씀하시는 것은 바로 그 지혜의 힘이 이 <A라고 하는 것은 A가 아니다. 그래서 A라고 부른다>라는 형식의 문장을 반복 독송함으로서 이 문장에서 나오는 상(相)을 깨는 반야의 힘에 의하여 깨우침에 가까히 다가 갈 수 있게 만드는 것이 아닌가 다시 한번 유심히 생각해 봅니다.
아래는 금강경에서 <A라는 것은 A가 아니다. 그래서 A라고 말하는 것이다>라는 문장형식으로 여러가지 상(相)을 타파하는 것을 예를 들어 몇가지 나열해 본 것입니다.
<A라는 것은 A가 아니다. 그래서 A라고 부른다>
1. 제도 받은 중생은 제도 받은 중생이 아니다. 그래서 제도받은 중생이라고 한다.
2. 여래의 몸의 특징은 몸의 특징이 아니다. 그래서 몸의 특징이라고 한다.
3. 여래는 설법을 했지만 설법한 적이 한번도 없다. 그래서 여래는 설법을 했다고 하는 것이다.
4. 복덕은 복덕이 아니다. 그래서 복덕이라고 한다.
5. 불법은 불법이 아니다. 그래서 불법이라고 한다.
6. 수다원에 이르른다는 단계는 없다. 그래서 수다원이 이르렀다고 말한다.
7. 아나함에 이르렀다는 단계는 없다. 그래서 아나함에 이르렀다고 말하는 것이다.
8. 아라한에 이르렀다는 단계는 없다. 그래서 아라한에 이르렀다고 말한다.
9. 불국토를 장엄함은 불국토를 장엄함이 아니다. 그래서 불국토를 장엄한다고 말한다.
10. 법을 얻었다는 것은 법을 얻었다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법을 얻엇다고 하는 것이다.
11. 여래의 삼십이상은 여래의 삼십이상이 아니다. 그래서 여래의 삼십이상이라고 한다.
12. 실상은 실상이 아니다. 그래서 실상이라고 한다.
13. 제일바라밀은 제일바라밀이 아니다. 그래서 제일 바라밀이라고 한다.
14. 인욕바라밀은 인욕바라밀이 아니다. 그래서 인욕바라밀이라고 한다.
15. 마음의 머뭄은 마음의 머뭄이 아니다. 그래서 마음의 머뭄이라고한다.
16. 모든 상은 모든 상이 아니다. 그래서 모든 상이라고 한다.
17. 중생이라는 것은 중생이 아니다. 그래서 중생이라고 한다.
18. 중생의 멸도라는 것은 중생의 멸도가 아니다. 그래서 중생의 멸도라고 한다.
19. 무상정등각을 얻는다는 것은 무상정등각을 얻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무상정등각을 얻엇다고 말하는 것이다.
20. 일체법은 일체법이 아니다. 그래서 일체법이라고 한다.
21. 여래가 설한 마음이라는 것은 여래가 설한 마음이 아니다. 그러므로 여래가 설한 마음이라고 한다.
22. 여래가 상의 구족이라는 것은 상의 구족이 아니다. 그러므로 여래는 상을 갖추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23. 설법한 것은 설법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설법을 했다고 하는 것이다.
24. 내가 있음은 내가 있음이 아니다. 그러므로 내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25. 복덕을 받는 것은 복덕을 받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복덕을 받는 다고 말하는 것이다.
26. 작은 티끌은 작은 티끌이 아니다. 그러므로 작은 티끌이라고 말한다.
27. 삼천대천 세계는 삼천대천 세계가 아니다. 그러므로 삼천대천세계라고 말하는 것이다.
28. 한덩어리 모양(일체)은 한덩어리 모양이 아니다. 그러므로 한덩어리 모양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29, 아견(我見)은 아견이 아니다. 그러므로 아견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30. 인견(人見)은 인견이 아니다. 그러므로 인견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31. 중생견(衆生見)은 중생견이 아니다. 그러므로 중생견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32. 수자견(壽者見)은 수자견이 아니다. 그러므로 수자견이라고 말한다.
33. 대상에 대한 상은 대상에 대한 상이 아니다. 그러므로 대상에 대한 상이라고 한다.
이 이외도 여러가지 있읍니다만, 위의 조사한 내용만 올렸읍니다.
<A라고 하는 것은 A가 아니다. 그래서 A라고 말하는 것이다>라는 문장에서 <A가 아니다>라는 것에 대하여 다른 어떤 관념이나 상상도 하지 말고 오직 모름으로 깨어 있어야 겠지요. 그저 말없이 깨어만 있어야 합니다.
만일 또 다른 어떤 관념을 갖는다면 다시 어떤 상(相)에 떨어져서 더 이상 상(相)이 없는 상태로 넘어가기가 어렵습니다.
일상생활에서도 어떤 상(相)이던지 할 것없이 이 <A라고 말하는 것은 A가 아니다. 그래서 A라고 말하는 것이다>라는 문장에 대입하여 일상생활에서 응용하면 나름대로 금강경의 공덕을 좀 볼 수도 있을 겁니다. 말하자면 상(相)에 대한 집착을 놓게 된다는 것이지요.
이렇게 시작해서 점차적으로 내면 깊히 들어 가면 반야지혜가 서서히 밝아지게 됩니다.
상(相)을 타파하는 금강경의 이 반야지혜의 금강저(金綱杵)로 잘 활용해서 부디 성불하시기 바랍니다.
금강경 독송 수행은 바로 이 상을 타파하는 반야지혜의 금강저 문장에서 주의롭게 깨어 있어야 됩니다.
이 <A라고 말하면 A가 아니다. 그래서 A라고 말하는 것이다>라는 금강경 특유의 문장에 대해서는 성실한 믿음을 가지고 끊임없는 금강경 독송수행을 통해서 직접 체험적으로 탐구하는 과정에서 저절로 반야지혜가 서서히 밝아올 것입니다.
그러면 부처님 말씀처럼 반야지혜를 통해서 헤아릴 수 없는 공덕을 받게 되겠지요.
옛 선사들이 말하기를, 있는 모든 상(相)을 억지로 없애려고 하지 말고, 상(相)이 생겨났음을 즉시 알아차려 되돌려서 비쳐보는 것이(回光返照) 바로 반야지혜라고 합니다. 어떤 상이든지 보는 자가 있기 때문에 상이 나타나는 것이며, 그것이 바로 어떤 상이든지 반야지혜를 동시에 같이 동반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항상 주시자로써 깨어만 있으면 어떤 상이든지 아무 것도 하지 않고도 그대로 반야지혜가 항상 저절로 비추어진다고 합니다.
따라서 망상(妄想)이 바로 반야라고 말하고 있읍니다.
다만 항상 자각(自覺)으로 깨어있었야 됩니다.
<상(相)을 부숴버리는 지혜의 금강도(金綱刀)>
죽음은 죽음이 아니다. 그저 죽음이라고 부를 뿐이다.
병(病)은 병이 아니다. 그저 병이라고 부를 뿐이다.
슬픔은 슬픔이 아니다. 그저 슬픔이라고 부를 뿐이다.
고통은 고통이 아니다. 그저 고통이라고 부를 뿐이다.
깨달았다고 말하면 깨달은 것이 아니다. 그래서 깨달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라고 말하면 '이것'이 아니다. 그래서 '이것'이라고 부른 것이다.
'나'라고 말하면 '나'가 아니다. 그래서 '나'라고 부른다.
'내가 있다'고 말하면 '내가 있다'가 아니다.그래서 '내가 있다'라고 말한다.
이것이 마음이다 라고 말하면 마음이 아니다. 그래서 마음이라고 부른다.
'그것'이라고 말하면 '그것'이 아니다. 그래서 '그것'이라고 부른다.
자기가 사람이라고 말하면 사람이 아니므니다. 그래서 사람이라고 부르므니다.
이제까지 무한진인이 위에서 이야기한 모든 이야기는 쓸데없는 상(相)만 더 가중시킨 것 같읍니다.
결국은 부처님 법문조차도 버려야 할 판인데, 위의 모든 글이야 정말로 상(相) 위에 또 다른 상(相)을 하나 더 붙인 것은 아닌지 모르겠읍니다.
이 글을 다 읽고 나서 무언가 좀 이해가 되는 듯한 느낌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전혀 이해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해가 되는 듯한 느낌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다 읽어 보시고는 모두 버려야 하겠지요.
-무한진인-
'성인들 가르침 > 금강경'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금강경의 "깨달음은 상(相)이 없는 것이다"에 대하여(2) (0) | 2013.09.28 |
---|---|
금강경의 "깨달음은 상(상)이 없는 것이다"에 대하여(1) (0) | 2013.09.28 |
금강경의 " 모든 부처님이 이 경에서 나왔다."에 대하여(2) (0) | 2013.09.11 |
금강경의 "모든 부처가 이 경에서 나왔다"에 대하여(1) (0) | 2013.09.08 |
금강경의 "얻을 것도 없고 설 할 것도 없다"에 대하여 (0) | 2013.09.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