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11. 17. 19:02ㆍ무한진인/참나 찾아가는 길목
간화선에 대하여 한마디(5)
4.은산철벽, 오매일여,제8아뢰식, 인법공, 원인체,초원인체,식,화두타파
평범한 생활인의 의식상태는 감각기관을 통해서 나타나는 이 세상을 실재한다고 여기고, 자신을 육체라고 여기며 분별의식으로 헤아리며,때에 따라서는 살아나기 위하여 잔꾀를 내기도 하고, 고민하며,싸우기도 하다가 어떤 대상을 만나면 즐거워 하기도 하고, 갑자기 부닥치는 슬픔과 고통때문에 괴로움에 눈물을 흘리기도 하면서 그럭저럭 힘겹운 이 세상 하루하루 삶을 살아갑니다.
그렇게 매일 평범하게 살아가던 어떤 사람이 갑자기 어느날 "이게 그게 아닌데-, 그냥 이렇게 사는 것이 아닌데, 무언가 시도를 해 보아야 하는데-" 하는 고민에 빠져 무엇인가 인생의 참의미에 대하여 다시 자기의 과거 발자취를 뒤돌아 보게 되고, 여러 책방을 돌아 다니며 인생의 참맛을 발견할 수 있는 어떤 책들을 찾아보게 되고, 여러 수행단체나 종교단체에 기웃거려 보면서 이곳 저곳 찾아 다니며 탐색을 해 보다가, 우연히 간화선이라는 불교 수행체계에 접하게 됩니다.
여러가지 다양하게 관련서적도 열심히 읽어보고, 아직 확실하게 머리에 들어오지는 않지만, 어느 날 갑자기 용기있게 화두수행을 하기로 마음 먹고, 책에서 본대로 혼자서 화두를 하나 선택해서 용기있게 직접 간화선을 시작해 봅니다.
이렇게 시작한 사람이 처음 화두의심을 해보면서 의심의 소용돌이가 생기는데 아직 명확한 의심이 잡히지 않아서 입으로 외는 송(誦)화두를 하는 상태가 그림3의 쇠뿔형 의심 소용돌이에서 ①번 위치라고 정해 봅니다.
송화두를 몇주일 열심히 하다가 보면 저절로 마음 속에 기억이 되어 이제는 그냥 생각으로 화두를 반복하는 염(念)화두로 바꿔 봅니다.
이 상태가 그림에서 ②번 위치라고 정해보면, 의심의 소용돌이에서 1번 보다는 더 깊숙이 내면으로 내려온 것이 되며, 의식의 파동주파수적으로 본다면 1번 위치보다는 좀 더 미세한 파동 주파수의 상태가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때까지는 화두의 문답 전체를 계속 생각하면서 전제(全提) 화두를 드는 것이죠.전제 화두란 예를 들면 무자(無字)화두의 경우에 "'개는 불성이 있습니까?' 조주선사께 물으니 '없다'라고 답했다. 왜 없다(無)고 했는가?"라는 화두문답 전체를 생각하면서 "없다(無)"라는 대답에서 의문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여기에 보조적인 생각으로 " 모든 생명체는 불성이 있고 개도 당연히 불성이 있다는데 조주는 어째서 불성이 없다고 하는가?"하는 생각도 항상 염두에 두어야 겠지요. 또 다른 화두 예를 들어보면 " '부처가 무엇입니까?' 하고 물으니 운문스님이 '마른 똥막대기'라고 답했다. 어째서 마른똥막대기라고 했을까?" 이렇게 전제 화두를 들고 거기서 의문을 일으키는 연습을 합니다.이러한 전제화두수행을 계속하다가 이제는 화두가 머리에 익숙해져서 화두를 단제로 바꿔서 합니다.
단제(單提)화두란 무자(無字)의 경우 "어째서 없다(無)라고 했나?" 또는 "어째서 무인가?" 또는 "무??" 또는 "어째서" 등 아주 단순화한 한마디 화두입니다.
다른 화두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째서 마른똥막대기라고 했나?" "어째서 뜰앞의 잣나무라고 했나?" 이렇게 간단한 한마디의 의문문으로 내면으로 파고듭니다.
이때가 의심소용돌이 그림에서 ③의 위치라고 정해 봅니다. 물론 이러한 순서대로 안하고 처음부터 "어째서 무인가?"라고 화두를 들어도 상관이 없읍니다.
그렇다고 처음부터 ③번 위치로 바로 내려가는 것은 아니고, 수행을 끊어지지 않게 오래동안 해야 내면으로 깊숙히 내려가겠죠.
그림의 1,2,3,-- 위치는 그냥 설명하기 위하여 예를 들어 본 것 뿐입니다.
단제(單提) 화두를 계속 들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화두 의심에 익숙해져서 길이 닦였다고 말할 수 있읍니다.
이제 수행자는 아침 잠에서 깨어나서 부터 저녁 잠들기 직전까지 화두를 잊어 버리지 않고 계속 이어지게 되어 거의 일상 생활을 하면서 화두가 저절로 들려진다고 하면 이 때의 의심의 소용돌이 그림에서 ④번 위치 "의정상태"라고 정해 봅니다.
이 "의정상태"에서 더욱 더 정진을 하면 의단이 형성되면서 점차로 타성일편(打成一片)이라는 마음전체가 오직 화두로 꽉 채운 상태가 됩니다.
화두이외에는 다른 것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내외가 화두만이 유일하게 존재합니다.
이것이 그림3의 의심의 소용돌이 그림에서 ⑤번 "의단"의 상태로 표시했읍니다.
왠만큼 한 간화선 수행자도 여기까지 이르는 사람이 아주 드믑니다.
옛 선사들은 이 ⑤번의 의단독로(疑團獨露)의 타성일편(打成一片) 상태에서도 계속 더욱 더 화두를 잊어 버리지 말고 들라고 합니다.
간화선에서 화두를 든다는 것은 화두를 관(觀)하는 것이 아니라, 의심(疑心)을 끊어지지 않게 파고 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의심을 끊어지지 않게 한다는 것은 그림3의 의심 소용돌이를 자꾸 돌려서 의심의 중심점 ⑥으로 접근한다는 말과 같읍니다.
그냥 의심의 체바퀴를 돌리는 것이 아니라, 내면 깊은 곳을 향해서 내려가기 위해서 의심의 소용돌이를 끊어짐없이 돌려야 합니다.
만일 중간에 화두수행을 하다가 무슨 다른 외부적인 일에 신경쓰는라고 화두를 잠시 잊어 버렸다고 한다면 내면 밑으로 향하던 마음이 다시 마음 표면으로 되돌아가는 것이죠, 그래서 옛스승들은 절대로 끊어지지 않게 화두의심을 하라고 신신당부하고 있읍니다.
수시로 화두를 잊어버렸다, 다시 열심히 하다가, 뭐 재미난 일 있으면 그것에 정신이 팔려 있다가 조금 심심하면 다시 화두를 들고 이렇게 한다면 맨날 마음 표면에서만 오르락 내리락 할 뿐이고, 소용돌이의 깊숙한 속에 있는 내면의 중심점 쪽으로는 천년이 지난다해도 향하지 못합니다.
선사들은 의정상태에서 타성일편이 되어 자연화두로 끊어짐없이 깨어있는 상태가 되면 이를 성성적적(惺惺寂寂)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용어는 원래 묵조선 선사들이 쓰던 용어인데, 절대본체의 고요함과 비춤을 표현한 단어입니다.
성(惺)이란 깨어있음 또는 비춤을 말하고, 적(寂)이란 절대바탕의 "고요함"을 의미하는데, 혜능선사의 정(定)과 혜(慧)라는 단어와 같은 의미입니다.
정(定)은 고요함을 말하며, 혜(慧)는 지혜의 비춤을 말합니다.
그러나 간화선에서는 이 성성적적(惺惺寂寂)을 좀 다른 의미로 쓰고 있읍니다.
간화선에서 성성(惺惺)은 항상 의정(疑情)이 지속되어 화두로 계속 깨어있는 상태를 말하며, 적적(寂寂)이란 아무 생각없이 멍하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항상 화두가 한결같이 있어서 일체 생각이 번뇌망상이 사라진 고요한 상태를 말합니다.
따라서 간화선에서는 아무 생각도 없이 있는 것을 고요하다(寂)고 말하지 않고 무기(無記) 또는 혼침(昏沈)이라고 말합니다.
또한 맑게 깨어있음(惺惺)은 화두의심이 뚜렷하게 유지되고 있음을 깨어있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읍니다.
그래서 어느 선사는 "성성(惺惺)하되 화두가 없으면 번뇌망상의 산란심(散亂心)에 빠지고, 적적(寂寂)하되 화두를 잊으면 무기(無記)나 혼침(昏沈)에 빠진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 의단(疑團)이 단단하게 형성되어 타성일편이 된 간화선 수행자는 더욱 더 화두를 잊어 버리지 않고 계속 그 상태를 유지를 하면 꼼짝 못하는 은산철벽(銀山鐵壁)의 상태에 갖히게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림3의 의심의 소용돌이에서 맨끝 지점인 존재핵점 ⑥점에서 더 이상 의식이 갈데가 없어지는 상태입니다. 사람의식의 맨끝자락이기 때문에 더 이상 나아갈 데도 없고, 뒤로 물러날 수도 없는 낭떨어지 끝이라고 말할 수 있읍니다.
은산철벽(銀山鐵壁)이란 은(銀)으로 만든 쇠벽에 사방에 꽉 막혀 꼼짝 못하는 상황입니다. 어떤 선사는 이 상태를 마치 돌 속에 박힌 보석알처럼 꼼짝 달싹할 수 없다고 표현하고 있읍니다.
간화선 창시자인 대혜스님은 서장에서 " 늙은 쥐가 소뿔 속에 들어가서 끝에서 꽉 막혀서 오도가도 못하는 상황"이라고 표현하고 있읍니다.
위의 의심의 소용돌이 그림이 마치 소뿔처럼 생겼는데, 맨 밑의 그 끝에서 머물러 있는 상태입니다.
이 상태는 마치 깊은 잠과 같이 의식적으로 어쩔 수 없는 상태입니다. 좌우 어디에도 발디딜 데가 없이 마치 바위벽에 완전히 갖혀 있는 것 같읍니다. 그러나 의식은 있읍니다. 의식의 뿌리상태이기 때문에 시간과 공간이 점속에 사라지는 상태입니다.
그럼 이 상태에 들어간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옛 선사들은 이 상태에서 천길 낭떨어지로 한걸음 더 내딛디라고 충고하고 있읍니다. 말하자면 절대로 화두를 잊어 버리지 말고 끝까지 밀고 나가라고 충고하고 있읍니다. 이 말은 다시 말하면 화두를 끝까지 잊지 말고 붙잡고 있으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어느 때인가, 화두가 터져서 의심을 깨친다는 것입니다.
즉 화두의심이 풀어진다는 것인데, 화두의심이 풀어진다는 것은 바로 "나라는 존재느낌"이 그 의식이라는 이원화 굴레에서 벗어난다는 것을 말합니다.
즉 나라는 존재 느낌이 사라진다는 것은 화두의심을 품고 있었던 "나"가 죽는 것으로써, 그 작은 개체 '나'가 죽고 나서 우주적 큰 '나'가 되면서, 화두 의문도 같이 풀린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나"가 한번 크게 죽어야 크게 되살아난다'라는 말입니다.
마치 물이 꽉 찬 항아리를 바닷물에 넣으면 항아리 안의 물이 드넓은 바닷물 자체가 되듯이, 내가 전체 세상이고 전체 세상이 오직 나 하나가 된 상태가 옵니다. 그러나 아직 구경각은 아닙니다.
간화선을 수행하는 목적은 이 화두의심을 타파하여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원화 존재가 시작하는 존재핵점이라는 의식의 뿌리 끝, 그 의심의 소용돌이 맨 밑에 있는 중심점에서 밖으로 벗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간화선 수행자가 그곳을 벗어나면 화두가 타파되면서 간화선 수행의 최초 목적을 이룬다고 볼 수가 있읍니다.
그런데 여기서 과연 화두를 깨쳤다고 해서 화엄경에서 이야기하는 최종적인 깨달음인 구경각을 이룬 것일까요? 절대로 아닙니다.
화두를 깨쳤다고 부처가 이룬 절대 깨달음을 즉각 이룬 것은 아닙니다. 화두를 깨쳤다는 것은 이제 겨우 절대진아상태인 부처경지의 깨달음에 들어 갈 수 있는 문 앞에서 예비 입장권만 얻은 것으로 비유할 수가 있읍니다.
<화두타파>는 부처경지의 깨달음이 아니라, 보살 수준의 깨달음입니다.
물론 화두타파를 하면 옛 선승들의 어려운 공안들의 의미를 환히 꿰뚫기도 하고, 지금까지와는 다른 세상을 보는 관점의 인식 전환이 일어나는 것이지만, 근본적인 번뇌, 집착, 탐욕 등의 미세한 중생의식의 잔여물이 여전히 그대로 남아있어서 없어지지는 않는 것 같읍니다.
요즘의 깨달았다는 선승들이 간혹 세속인들보다도 오히려 물질적 탐욕과 저속한 명예심같은 것을 거침없이 드러내 놓고 추구하는 모습도 간혹 볼 수가 있읍니다. 이런 문제는 근본적으로 간화선의 화두타파를 마치 최상승 깨달음인양 착각하기 때문인 것 같읍니다.
그러나 화두타파 후에도 보임으로 드러나지 않게 자각(自覺)과 겸손을 내면으로 견고하게 다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일부 깨달았다고 자부하는 선승들은 드러내놓고 비상식적이고 경솔한 일탈 행동을 간혹 보여주는 경우도 있는 것 같읍니다.
간화선에서 깨달음은 "무심무념(無心無念)을 증득하는 것이라고 말은 하지만, 화두타파 후에 그러한 무심무념 상태를 실제로 취득하게 되는지는 모르겠읍니다.
다만 화두타파 후에는 마음이 환하게 밝아지고, 여러가지 화두나 경전의 글귀도 저절로 또렷또렷 잘 이해가 되며, 마음에 불안감이 전혀 없이 항상 떳떳하고, 어떤 대상에 대한 집착심도 별로 없게 됩니다. 자기가 마치 허공처럼 여겨져서 어디서나 자유로움을 느끼게 되고, 현실에서도 어떤 일을 하게 되면 빈틈없이 아주 꼼꼼하게 처리를 하게 되는 등, 평범한 보통사람으로써 삶에 행복과 사랑의 빛이 꽉 들어차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다만 겉으로 드러난 하찮은 그림자들일 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생사(生死)를 벗어나서, 내면으로는 분별망념이 언제나 일어나지 말아야 하고, 외면으로는 어떤 형태로든 미세한 탐욕에서 완전히 벗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현재 간화선 수행에서 마지막 <화두타파> 후에 어떻게 하면 석가부처가 직접 주장한 원시불교의 아라한과 수준과 비슷하게, 모든 탐욕이 완전히 소멸된 상태의 깨달음을 완성할 수 있는 보임 수행체계를 더욱 발전시킬까하는 문제를 현 불교계 지도자들은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것 같읍니다.
화두를 깨친 수행자는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이제부터 쉬라고 옛 선인들은 말하고 있습니다. 최종 깨달음인 구경각을 위해서는 아직도 갈길이 멀고 멉니다.
그러나 이렇게 화두를 깨친 것만 해도 아주 희귀한 일입니다.
최종 해탈인 구경각은 무엇인가 인의적으로 노력해서는 얻을 수 없는 것이고, 쉬는 중에 우연스럽게 도래하는 것입니다. 즉 무위(無爲)적인 삶 중에서 불시에 저절로 찾아 오게 되는 것 같읍니다.
<화두타파>를 한 뒤에는 무위적인 삶을 이어가므로서 수행 아닌 수행의 보임(保任)공부가 계속 이어져야 합니다.
제 개인적인 견해로는 <화두타파>후의 보임공부 중에서는 묵조(默照)수행이 아주 적절하다고 생각됩니다.
물론 간화선의 창시자인 대혜스님은 묵조선을 비난하면서 그 대체수행으로 이 간화선을 제창하였지만, 그것은 일반적인 기본수행에서 묵조선이 효용성이 없다는 것이지, 간화선으로 화두타파를 하고 나서 그 보임수행으로 자연주시 수행인 "말없이 깨어있음 또는 지켜봄"의 묵조(默照)수행으로 더욱 깊게 깨달음을 숙성시켜서 그야말로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최상승 깨달음이라는 묘각지(妙覺智) 수준(절대본체)을 향해서 접근해 들어가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간화선 수행체계에 대하여 말하고 싶었던 한 마디입니다.
현재 한국식 간화선 수행으로 <화두타파>를 하면, 최고의 묘각은 물론 아직 멀었고, 등각지(等覺智)도 아직 못 미치며, 겨우 6지나 7지 수준에서 머므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요즘 깨달았다는 선승들의 드러난 言行이 스스로 그 깨달음 수준을 보여주니까요.
이 <화두타파> 경지는 인도 아드바이트 베단타 도인인 니사르가다타 마하리지가 한결같이 말하는 "내가 있다"는 앎의 경지와 비슷합니다. 역시 인도의 베단타 스승인 라마나 마하리쉬도 "내가 있다"는 존재의식이 신의식이라고 하면서 깨달음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하고 있읍니다. 깨달음이나 마찬가지라는 말은 최종 깨달음에 가깝다는 말이지, 진짜 깨달음은 아니라는 이야기이죠.
이것은 베단타에서 제4의 경지라고 하는 뚜리아"상태에 해당됩니다.
절대진아는 그 상태 넘어에 뚜리아따따라는 상태라고 합니다.
그래서 <화두타파>상태는 절대진아까지는 아직 도달된 것은 아니라고 말 할 수 있겠읍니다.
옛 선사들이 우연히 깨친 인연을 보면, 아주 다양한 사례가 많이 나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몽둥이로 얻어맞고 깨친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우연히 집어던진 돌에 대나무를 때리는 소리를 듣고 깨치는가 하면, 스승의 한 마디 말에 문득 깨치거나, 어떤 사람은 시냇물을 건너가다가 냇물에 비친 자기 얼굴을 보고 깨친 사람도 있는 등, 대부분이 일상생활에서 우연하게 어떤 소리나 모양을 듣고 보는 찰나에 우연스럽게 깨칩니다. 그 깨친 경지가 어떤 수준인지는 알 수 없는 것이죠.
그러나 어떤 의도적인 수행행위의 도중에서 깨친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읍니다.
마찬가지로 간화선 수행도 화두참구 중에 구경각을 깨친 사람은 없을 뿐더러, 화두참구 결과로써 깨친 사람도 없읍니다.
다만 화두타파 후에 몇번의 크고 작은 깨달음을 거쳐서 우연하게 어떤 계기로 대각을 한 사람들은 많이 있는 것 같읍니다.
따라서 화두 수행 중에는 당장에 어떤 대각의 깨달음을 기다리거나 어떤 체험이나 초상현상이 일어나면 이것이 깨달음에 가까이 왔다는 표징인가 보다는 기대감은 버려야 합니다.
화두타파 이후에도 많은 세월동안 모든 것을 푹 놓고 성실하게 공부를 해야 최종적인 깨달음에 이를 수가 있다고 합니다. 따라서 화두수행 중에는 깨달음을 기대하거나 어떤 희귀한 체험을 얻을려고 하지 말고 화두의심에만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이제 이 은산철벽(銀山鐵壁)이라는 상태가 어떤 상태인지 다른 용어를 통해서 조사해 보겠읍니다.
생시,꿈, 잠 이라는 세 가지 상태의 측면에서 보자면 이 상태를 오매일여(寤寐一如) 수준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읍니다. 이것은 다른 말로 숙면일여(宿眠一如)라고도 하며, 꿈없는 깊은 잠이 들어서도 화두가 항상 그대로 들린다고 말하고 있읍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성철스님이 백일법문에서 강하게 주장하시는 부분인데, 그 분은 간화선 수행자가 몽중일여와 숙면일여 상태를 통과하지 못하면 절대로 화두를 깨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시대 선승이나 선불교 학자들 중에는 숙면일여는 방편으로 말씀하신 것이지 실지 수행에서 그런 것은 없다고 주장하는 학자나 선승들도 많이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자기 스스로 아직 숙면일여 상태까지도 체험하지 못했다는 것을 자기도 모르게 실토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읍니다.
화두란 처음 초보일때 들던, 의단의 경지로 성숙할 때에 들던 간에 항상 말이 나오기 이전 상태를 가리킵니다.
비유해 보자면, 애벌래가 나비가 되기 위해서 일단 번데기상태로 고치 속에 들어가 잠자고 있듯이, 이 고치 속 번데기 상태가 바로 은산철벽의 상태로 비유해 볼 수 있읍니다.
다시 말하면 기존의 마음 속에서 돌리고 있던 화두의정이 고치 속에서 잠을 자고 있다가, 어느 시기에 고치를 열고 날개를 단 나비가 되는 모양으로 마지막에 바로 화두가 타파된다고 비유할 수가 있읍니다. 그러면 고치 속에 있는 화두와 그 이전에 애벌레 시절의 화두가 같겠습니까? 다르겠읍니까?
또한 애벌레 시절의 화두와 나비가 되어서 훨훨 하늘로 날아 갈때의 화두타파후의 모습이 같겠읍니까? 다르겠읍니까?
같기도 하고 다르게 보일 수도 있읍니다.
원래부터 화두란 어떤 상황이든 말(존재)이 나오기 이전을 가리킵니다.
즉 <화두의심> 상태에서는 중생마음이든, 의정상태,의단상태, 은산철벽상태이든 간에 항상 위의 소용돌이 그림에서 중심축인 공(空)상태에 연관되어 있지만, <화두타파>를 한 뒤에만 그 공상태가 항상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화두타파> 이전에는 그 중심축의 공(空)을 전혀 자각하지 못합니다. 그것이 <화두타파 이전>과 <화두타파 이후>에 다른 점입니다.
여하튼 깊은 잠 속에서도 화두가 들린다는 말은 많은 옛선사들로부터 전해오고 있읍니다. 다만 요즈음은 그러한 체험을 하는 사람들이 희귀하고 대부분의 현시대 유명한 선사들도 이 오매일여 경지까지는 이르지 못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잠을 자면서도 화두를 든다는 것은 잠과 깨어있음과 꿈 상태 이전의 주시자상태에서 주재하고 있다고 볼수가 있읍니다.
"내가 있다"는 존재의식은 육체와 결합해서 잠과 생시상태라는 교번적인 정신육체적 활동주기를 만듭니다. 이것은 존재의식의 파동주파수 성분이 육체의 생체활동주기로 변조된 것입니다. 따라서 잠과 깨어있음 그 이전에서 주시자가 항상 비추어주고 있읍니다. 꿈은 잠과 생시가 반반 섞인 상태입니다.
따라서 오매일여란 이렇게 잠과 생시상태 이전의 주시자 상태로 이미 물러서서 말없이 지켜보며 깨어있는 있는 상태가 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읍니다. 말하자면 이미 안보이는 뒷편으로 물러나서 말없이 지켜보고 있는 상태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잠자는 것도 지켜보고,깨어있는 것도 지켜보며, 꿈에도 말없이 저절로 깨어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을 말로 표현할 수 있읍니까? 아니면 혼자서만 알수 밖에 없습니까?
만일 생시상태에서 말로 표현되는 것만 아는 사람들이 "오매일여란 방편으로 말한 것으로 그 실체가 없는 것이다"라고 말한다면, 그런 의식 수준에서는 오매일여란 것은 '없는 것'이 당연합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처해있는 수준 범위내에서만 말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오매일여는 알 수가 없읍니다.
그러나 오매일여란 말 넘어, 생각을 초월해서 있는 것이기 때문에 당사자가 그 넘어 항상 일여한 상태가 있다는 것을 직접 증험해 보지 않는다면 전혀 알 수 없는 상태입니다.
누구나 그 "내가 있다"상태에 있지만, 자기가 "육체 동일시를 벗어 버리고" 직접 확인해 보지 않으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의식수준에서는 잠 속에서 조차 자신에 대하여 컴컴하게 모르는 데, 잠 넘어에 항상 지켜보고 있는 "내가 있다"는 주시자를 어떻게 알겠읍니까?
그런 수준에서는 잠 넘어는 고사하고, 깨어있는 상태를 지켜보는 주시자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상태입니다.
만일 생시상태의 주시자를 철저히 안다면 잠을 주시하는 주시자도 알수 있읍니다.
그 잠과 생시를 주시하는 자는 똑 같은 하나이며, "말없이 알고 있음"입니다.
그것은 잠을 지켜보는 "내가 있다"상태입니다.
즉 나는 "'내가 잠자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입니다. 잠 자는 것을 아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모양과 말이 없읍니다.
겉으로는 그냥 잠과 깨어있음이 저절로 주시될 뿐입니다.
그 모양없는 자연 주시자가 바로 오매일여상태입니다.
아드바이트 베단타 도인들이 말하는 "내가 있음" 존재의식입니다.
그 깨어있음과 잠의 넘어에 있는 그것(나는 알고 있음)을 철저하게 확신하고 있어야만, 어느 때 우연히 그것이 저절로 드러납니다.
생시에서 잠으로 넘어가는 중간지점에서 무지한 깊은 잠의 늪속에 빠지기 바로 직전에,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으면, 잠의 뒤편에서 말없이 지켜보는 상태, 그 깊고 검푸른 빛의 바닷 속으로 슬며시 빠져 들어가게 되는데(이때가 깨어있으면서 잠 자는 상태임), 그 상태를 자꾸 겪어 보면서 익숙해지면 점차로 깊은 그것(잠넘어 상태)이 이해가 되기 시작합니다. 그 상태로 처음 접어들 때에만 검푸른 빛의 바다를 보지만, 이내 그 속으로 깊히 들어가 그 빛 자체가 되면 검푸른 빛도 없어지고, 깨어있으면서 잠자는 상태, 또는 잠자면서 깨어있는 상태가 이어지며, 깨어있음도 아니고 그렇다고 잠상태도 아닌 묘한 상태인데, 그 상태로 밤을 지새워도 아침에 일어나면 깊은 잠을 잘 잔 것보다도 더 몸이 가쁜하고 상쾌합니다.
또한 이 상태에 익숙해지기 전까지는 처음에는 생시상태도 반잠 반깨어있음과 비슷하게 좀 정신이 멍한 상태라고 볼 수 있읍니다.
그러나 이 상태를 함부로 아무나 시도해 보아서는 안됩니다. 수행을 아주 오래한 사람은 잠 잘 때에 저절로 이 과정상태로 들어가기가 쉬우며 밤새도록 이 상태로 잠을 잡니다.
그렇다고 그것을 알려고 수행도 별로 하지 않은 상태에서 잠을 참으면서 억지로 깨어있으려고 한다면 그렇게 잘 되지도 않을 뿐더러, 오히려 정신과 몸을 상할 수 있읍니다. 절대로 억지로 하지 마십시오.열심히 수행을 하면서 때가 오면 저절로 그 과정에 들게 됩니다.
다만 이 말을 마음 깊히 기억해 두면 언젠가 쓸모가 있을 겁니다.
잠은 확실하게 푹 자야지 육체를 건강하게 유지할 수가 있읍니다. 육체가 건강해야지 수행도 순조롭게 진행됩니다.
<오매일여>에 대하여 이렇게 긴글로 언급하지 않으려다가, 간혹 깨달았다고 남들을 가르치는 스승이라는 사람들이 "오매일여는 방편으로 말한 것이지 실제로 그런 상태는 없다"라고 자꾸 일방적으로 주장하고, 그 제자들이라는 사람들이 인터넷에 그런 글들을 퍼뜨리고 다니기에, 이 무한진인이 실제로 증험해 보고 알고 있는 범위 내에서 [<오매일여>는 방편으로 말한 것이 아니라, 구도자들이 수행 과정중에 실제 체험을 할 수 있는 상태이며, 동서(東西) 깨달은 도인들이 대부분 한결같이 동일하게 주장하는 과정]임을 확실하게 알려 주어서, 인연이 되어서 이 글을 보는 분들만이라도 명확한 확신을 가지도록 이렇게 긴글을 추가로 덧붙여 보았읍니다.
이 상태를 유식학적으로는 제8아뢰아식에 머무르고 있는 상태라고 볼 수도 있읍니다. 아뢰아식은 저장식이리고도 하고, 이숙식(異熟識)이라고도 하는데, 학파에 따라서 그 기능이 7식과 8식이 상호 겹치는 부분도 있고, 또 9식인 여래식이 8식에 포함된 학파도 있읍니다. 아뢰아식을 쉽게 말하면 의식의 뿌리부분이라고 이해하면 됩니다. 계절이 바뀌면 잎과 줄기는 말라버린다지만 땅 속의 보이지 않게 파뭍힌 뿌리는 그대로 겨울에도 살아 있듯이 모든 업을 저장하고 의식의 줄기를 키우고 마음의 잎파리를 무성하게 피우며, 꽃과 열매를 영글게 하지만, 뿌리는 보이지 않습니다. 자기와 세상 모두가 포함된 존재의식의 뿌리입니다
따라서 이 제8아뢰아식에 머무르고 있는 것이 멸진정(滅盡定)상태를 말합니다.
이곳을 넘어서야 화두타파가 되는 경지입니다.
그러나 화두타파가 된다고 해서 최종 구경각을 성취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상태를 사람과 사물(人法)의 관점에서 접근해 보자면 사람도 없고 법도 사라졌다는 인법망(人法忘) 또는 인법공(人法空)이라고 표현도 할 수 있겠읍니다.
이 은산철벽 상태를 베단타적으로 이야기 해 본다면 원인체(原因體) 속에 머물러 있는 상태입니다. 베단타에서는 사람을 물질적 육체, 미세체(微細體,생기정신체), 원인체(原因體, 의식의 뿌리,무지상태), 초원인체(내가 있다는 존재앎), 파라부라만(절대진아), 이렇게 다섯가지로 분리를 합니다.
이 다섯가지 단계 중에서 원인체가 이 제8식에 해당한다고 볼 수가 있읍니다. 초원인체는 8식의 절대진아 쪽의 경계 출입문이라고 말할 수 있읍니다.
원인체는 말 그대로 육체와 미세체가 나온 뿌리로써 절대진아 측면에서 보면 무지(無知,마야)에 속합니다. 즉 절대 진아에서 나온 순수한 의식빛(초원인체)이 육체기관에 비쳐서 원인체인 무지(無知,어둠)를 만들어내고, 이 무지의 원인체에서 절대의 그림자로서 미세체인 마음과 생기, 자아의식,지성을 만들며, 육체를 형성하여 한 사람의 환상적인 개인을 만들어 내고 있다고 말하고 있읍니다.
따라서 <은산철벽>이라는 어둠은 원인체의 어둠과 같읍니다.
이 상태에서는 현상적인 모든 것이 사라졌읍니다. 그러다가 수행자는 아무것도 모르는 잠 같은 원인체 속에 꼼짝 못하고 있다가 어떤 앎(초원인체)의 빛이 서서히 밝아 옵니다. 이 전체적인 앎은 절대진아에서 나온 것이지만, 절대진아는 아닙니다. 그 절대진아에서 나온 빛이 있기 때문에 원인체라는 어둠의 그림자가 생겨서 그 무지의 그림자로부터 육체를 가진 개인과 세상이라는 환상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초원인체는 절대진아는 아니되, 절대진아에서 직접 비치는 빛이면서, 동시에 절대진아로 들어가는 문(門)이기도 합니다.
어떤 베단타 도인들은 이 초원인체가 절대진아나 마찬가지라고 하고, 어떤 도인들은 절대진아가 아니다, 라고 말합니다.
비유적으로 말하면 "태양에서 직접 나온 햇빛은 태양이나 마찬가지다" 라는 말을 하거나 아니면, "태양에서 나온 햇빛은 태양자체는 아니다" 라고 말하는 것과 같읍니다.
태양이 절대진아로 비유해 본다면, 태양(진아)에서 직접 나오는 햇빛은 초원인체라고 비유할 수 있고, 햇빛이 달(무지)에 반사될 때에 달 표면을 원인체(8식)라고 볼 수 있으며, 달표면에서 반사되는 달빛은 원인체무지에서 반사되는 보이지 않는 이원화 의식(7식)이라고 비유해 볼 수 있으며, 그 달빛이 지구상의 어느 연못 표면(개인마음,전6식))에 반사되어 보이는 달그림자가 바로 자기 육체 그리고 연못에 비치는 그림자(전오식)들이 이 세상이라고 비유해 볼 수도 있을 것 같읍니다.
이 초원인체가 바로 라마나 마하리쉬와 니사르가다타가 말씀하시는 "내가 있다"는 존재의식이며, 원인체에서 절대진아상태로 들어가는 문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초원인체가 바로 간화선에서는 수행자가 <화두타파>상태에 해당합니다.
또한 원인체는 <은산철벽>에 갖혀있는 상태라고 볼 수 있읍니다.
원인체와 초원인체는 한쌍인데, 원인체는 완전한 모름, 무지상태라면 초원인체는 그 무지상태를 아는 그 넘어의 전체적인 앎(眞知)상태라고 볼 수가 있읍니다.
그런데 <화두타파>상태가 왜 최종 깨달음이 될 수가 없는가 하면, 바로 이 "내가 있다"는 초원인체처럼 아직도 주시되는 상태(깨어있음)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 주시된는 상태라는 것은 바로 보는 자인 절대진아가 있기 때문에 아직 끝에 도달하지 않은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화두타파>를 하더라도 아직 <조적(照寂)>의 상태에 있읍니다.
아직도 말없는 비춤이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구경각 또는 묘각은 비춤 즉, 주시가 없는 절대고요상태입니다.
따라서 <화두타파>를 해도 최종 절대바탕인 구경각은 안되고 그 아래 단계에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내가 있다" 초원인체도 전체적인 앎(眞知)이지만, 아직 주시상태가 남아 있기 때문에 절대본체에 도달하지 못한 것입니다. 절대진아는 비춤조차 없이 절대 고요함 그 자체 입니다.
말하자면 <화두타파>가 된 간화선 수행자는 "내가 있다"는 초원인체 상태에 접어들었지만, 아직 절대본성은 깨닫지 못했읍니다.
이 절대본성의 자리에 도달하여야 완전히 자유를 얻어 모든 것에 자재롭다고 합니다.그런데 최종 깨달음 상태인 진여상태는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가 없읍니다.
만일 진여상태가 이렇쿵 저렇쿵 어떻다 저렇다 말해 보아야 아무 소용도 없고 괜히 수행자들에게 상상력으로 오염시키는 망상만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수행자들에게 일반적으로 해 주는 이야기가 있는데, 절대참나는 모양도 없고, 색갈도 없고 성질도 없고, 알 수도 없지만 항상 "말없이 비춘다"라고 말합니다.
"말 없이 비춘다"라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그것은 "침묵 속에 깨어 있다"라는 말입니다. 묵조(默照)라는 말이 바로 이러한 절대 참나의 본성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수행 행위로 흉내내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대혜스님은 반대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러 말들은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방편적으로 한 말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절대 본성을 옛 선사들이 성성적적(惺惺寂寂)이라고 불렀으며, 화두수행의 기본 요체입니다. 그러하긴 하나 성성적적이라는 것이 별도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이 그것입니다. 옛분들은 "소소영영(昭昭靈靈)한 그것은 알 수 없을 뿐, 그냥 말없이 비출 뿐이다." 라고 말씀하셨읍니다.
반야심경 용어로써 말하자면, 색수상행식(色受相行識)의 오온에서 마지막 식(識)은 제8식을 말하며, 이것이 간화선 수행 과정에서 <은산철벽>상태와 같다고 볼 수 있읍니다.
그리고 <화두타파>하여 모든 것이 <공(空)>임을 봄으로서, 절대 <반야>를 얻게 된다고 볼 수 있읍니다. 그 <반야>는 <저 언덕>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상으로 간화선수행과정에서 소위 <은산철벽> <화두타파>라는 단계와 연관시켜 여러가지 비슷한 수준의 개념어들과 비교해 보면서, 최종 진여(眞如) 깨달음 과정까지 끝마쳤읍니다.
이와같이 <화두의심>수행을 단계별로 구분하여 이야기해 보았지만,실은 방편상 그렇게 말한 것 뿐이고, 실제는 맨 위의 의심소용돌이 그림에서 본 바와 같이 의식의 중심축이 바로 있는 그대로 절대공(空)상태로서 거친 중생마음이나 미세한 존재의식 상태에서나 항상 똑같이 누구나 <지금 여기서>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화두수행이란 바로 이것을 스스로 확인하기 위한 몸부림입니다.
내용이 좀 부족한 면이 있읍니다만, 앞으로 보충할 만한 것이 있으면 더 보완하겠읍니다.
-무한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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