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2. 13. 19:57ㆍ무한진인/참나 찾아가는 길목
올 겨울은 유난히 강추위가 몰아쳤읍니다.
사람들은 추위에 몸을 움추리고 외부활동을 꺼리며 따듯한 실내에서만 있으려고 하죠. 추우면 귀찮아서 간단한 산책운동도 안하는 경우가 많읍니다.
사람이면 누구나 추우면 당연히 따뜻한 곳을 찾아 머물게 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추위에 아랑곳없이 외부활동을 하며, 오히려 추울 때에 찬 어름 물에 냉수마찰을 하며 추위를 이겨냅니다.
추위를 피하는 적극적인 방법은 추위 속으로 들어가서 추위를 잊고, 더위를 피하는 방법은 더위 속으로 들어가서 더위를 이겨내는 방법도 또한 있읍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자기 본성을 깨달고자 애쓰는 구도자들은 익숙한 앎의 존재 안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익숙하지 않은 앎(의식)의 존재 밖으로 나가야 자기의 참존재를 깨달을 수가 있는 것이죠.
맨날 성인들의 알아듣기 좋은 대담록이나 읽으며 남의 글이나 베껴 쓰고 있거나 경전 책이나 뒤적거리며 글자 속에서 아무리 헤메면서 찾아 보았자, 의식 넘어에 있는 참본성의 실제 맛을 실감나게 느낄 수는 없을 겁니다.
직접 고통스러운 수행 속으로 자기를 내던져서 의식 밖으로 나가는 통로를 스스로 찾아내야 합니다.
옛 스승들은 제자가 이러한 깨달음의 길을 물을 때에 그 들어가는 문(門)을 직접적으로 가르쳐 주었읍니다.
그 방법이란 한마디로 말해서 제자를 꽉 막힌 철벽 속으로 밀어넣고 꼼짝 못하게 하는 극한 상황으로 만들어 주는 방법입니다. 꼼짝 못하면 결국은 근기에 따라서 자신을 완전히 포기할 수 밖에 없고, 그 자기 포기로 인해서 저절로 이 세상을 초월해 버립니다.
그 대표적인 기법이 불교 조사선 체계의 화두(話頭)입니다.
제자의 의식(사고작용)을 사방팔방으로 꼼짝 못하게 하기 위해서 깊은 구덩이에 몰아넣습니다.
말하자면 스승은 말로서, 제자를 사방이 높고 단단한 철벽으로 둘러쳐서 제자가 더 이상 분별적 사고 작용을 할 수 없도록 극한 상황을 만들어 줍니다. 이러한 극한 상황에 처한 근기가 무르익은 제자는 순간적으로 분별사고가 멈추면서 깊은 내면으로 자연적으로 몰입하게 되어 몰록 의식 넘어로 초월해 나가게 됩니다.
모든 선불교의 공안(共案)들이 이렇게 스승이 제자를 분별의식으로부터 벗어나도록 유도하는 가르침입니다만, 그 중에 노골적으로 의도가 드러나게 만들어 낸 화두들을 몇가지 소개해 보겠읍니다.
간화선의 창시자라는 대혜선사가 밖에 있는 사대부들에게 주로 조주의 무자 화두나 뜰앞의 잣나무, 또는 운문의 마른 똥막대기 화두를 언급하며 편지로 가르쳐 주었지만, 절 선원 안에서 제자들을 직접 대면해서 가르쳐 줄 때에 주로 많이 쓴 방편이 있는데, 그것은 죽비자화라는 공안입니다. 선방에서 쓰는 죽비를 손에 들고,
"이것을 죽비라고 부르면 사물을 따라가고(주객 이원화상태), 죽비라고 부르지 않으면 사물을 무시하는 것이다. 말을 해서도 안되고, 침묵해서도 안되고, 생각해서도 안되고, 의논해서도 안된다."
" 바로 이러한 때에 석가 노인네와 달마대사에게 비록 코가 있다고 하더라도, 즉시 숨쉴 곳이 없다. 잘 알겠느냐? 귀함을 만나면 천해지고, 천함을 만나면 귀해진다. 만약 귀하거나 천한 곳에 도달한다면, 다시 짚신을 사 신고 행각(수행)을 하여야만 한다. 그러므로 말한다. ' 마음을 가짐으로써 찾을 수도 없고, 마음을 없앰으로서 찾을 수도 없고, 언어로써 만들수도 없고, 침묵으로써 통할 수도 없다.'
비록 이와 같지만, 마치 하늘이 두루 뒤덮고 있고 땅이 두루 바치고 있듯이, 완전히 놓으면 완전히 거두어 들이고, 완전히 죽으면 완전히 살아난다.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이 소식을 떠나지 않는 것이니, 아까 한 선객(禪客)이 방석을 가지고 땅을 한번 두드린 것과 똑 같다.
"일시에 그의 살림살이(분별지식)를 몽땅 빼앗아 버리고, 도리어 그에게 다시 물건을 내놓으라고 요구하여 그가 빠져나갈 곳이 없게 만들자, 비로소 기꺼이 목숨을 버리고 죽을 곳을 찾게 된 것이다."
이렇게 대혜선사가 가르치는 것처럼 완전히 죽어야(분별지성을 내려 놓아야) 비로소 길이 보입니다. 사방이 꽉 막혀버린 철벽 속에 갇이는 것이 바로 이것에서 벗어날 수 있는 문(門)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 사방이 막힌 철벽에 갖히는 상태가 바로 분별앎의 뿌리인 원인체에 잠겨있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완전히 자기를 포기해야 천길 낭떨어지에서 한발 더 내디뎌서 에고가 죽어 버려야 비로소 하늘 문이 열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이러한 사방이 꽉 막힌 철벽 자체가 바로 빠져나가는 문(門)이라고 한 것입니다.
언덕 넘어로 가려면 그 언덕을 올라가야 되듯이, 어려운 장애를 벗어나려면 스스로가 그 장애물이 되어 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장애물을 통과할 수가 있읍니다.
구도자는 철벽자체가 되어 보아야 그 철벽이 바로 빠져 나가는 문 자체가 되는 것입니다.
벽암록, 무문관(無門關)에 이러한 공안들이 많이 있읍니다.
벽암록(碧巖錄)이라는 제목자체가 바로 꽉 막힌 끝없는 푸른 암벽을 말하며,
무문관(無門關)이라는 제목 자체가 바로 무(無)로 들어가는 문의 잠을쇠를 의미합니다.
물론 조주 무자화두가 가장 대표적인 화두로 철벽을 만들어 주지만, 그보다 더 노골적으로 드러내서 철벽상태를 표현해준 화두를 몇가지 소개해 보겠읍니다.
향엄지한(香嚴智閑)선사가,
"사람이 나무 위에 올라가서 입으로만 나무가지를 물고, 손으로는 가지를 붙잡지 않고, 다리로도 가지를 밟지 않고 있다. 이때 나무 밑으로 한 사람이 다가와서 그에게 '조사가 서쪽에서 온 까닭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에 대답하지 않으면 묻는 이에게 무례를 범하는 것이 되고, 만일 입을 뻥긋해 대답을 한다면 목숨을 잃어버리고 말 것인데, 이와같을 때에 어떻게 응대하면 좋겠는가?"
촉새 왈 " 죽어서 귀신이 되어 만나리 !"
동산(東山)선사에게 어느 날 한 승려가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하고 물으니 대답이 "마삼근(麻三斤)이니라."라고 응답했다.
운문선사에게 어느 승려가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묻자 운문선사 대답이 "마른 똥막대기"라고 대답하였다.
아난이 가섭에게 "세존께서 금란가사외에 또 어떤 것을 전하셨읍니까?"라고 묻자, 가섭존자가 "아난아 !"하고 부르셨다.
아난이 "네"하고 응답하자 가섭존자게서 "(법문이 끝났으니) 문 앞의 찰간(깃대)을 내리거라 "라고 대답하셨다.
풍혈연소 화상에게 한 승려가 물었다.
"말을 해도 진리에 이미 어긋나고 안 해도 어긋나니, 어떻게 해야 진리에 어긋나지 않고 통할 수 있습니까?"
풍혈스님 대답하길 " 강남의 삼월을 오래도록 기억하고 있지, 자고새 우는 곳에 백화가 무척 향기로웠다네."
남전선사께 한 승려가 물었다.
"사람에게 설하지 못하는 법이 있습니까?"
남전선사가 말하였다.
"있느니라"
승려가 다시 물었다.
"어떤 것이 사람에게 설하지 못하는 법입니까?"
남전선사 가로되, "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고 사물도 아니니라."
파초선사가 대중에게 가로되, " 그대에게 주장자가 있으면 내가 그대에게 주장자를 줄 것이고, 그대에게 주장자가 없으면 내가 그대의 주장자를 빼앗으리라."
방거사가 마조스님에게 물었다.
"만법과 짝이 되지 않는 것은 무엇입니까?" 물으니,
마조스님 대답이 " 그대가 한입에 서강물을 다 마시고 오면 말해 주겠다."
조주선사에게 어떤 승려가 물었다.
"만법은 하나로 돌아가는데,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 갑니까?"
"내가 청주에 있을 때에 삼베 두루마기를 하나 만들었는데, 무게가 일곱근이나 나가더라"
조주선사에게 누가 물었다.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이 무엇입니까?"
"앞니빨에 털이 난 것이다."
이러한 공안들은 구태여 자세한 해설이 필요없습니다.
공안이나 화두에 대해서 해설하는 것 만큼 바보짓도 없습니다.
이외에도 선불교의 화두나 공안이라는 스승과 제자 사이의 선문답은 거의 모두가 제자를 사방이 꽉 막힌 철벽 속에 가두어 제자의 입처가 어쩔 줄 모르게 난처하게 하여 순간적으로 분별사고를 끊어지게하면서 동시에 마음 넘어로 초월해 가도록 유도하는 가르침인 것입니다.
구도자는 이러한 은산철벽이나 천길 낭떨어지 끝으로 자신을 스스로 몰아세워야 합니다. 스스로가 철벽이 되고 천길 낭떨어지 밑으로 다이빙해야 합니다.
따라서 경전이나 남의 가르침을 써논 책에만 의지하지 말고 스스로 무심수행으로 들어가서 은산철벽상태로 자신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깨달음으로 들어가는 문이 몰록 열릴 수가 있읍니다.
평소에 친근하고 익숙한 것은 아는 것이며, 이 앎으로부터 벗어나려면 낯설은 모름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러나 모름 또한 우리에게 익숙한 것입니다. 모름 속으로 더욱 더 깊히 들어가면 앎과 모름도 거들떠 볼 수 없는 철벽으로 된 깊은 구덩이 속에 갖히게 되며, 이곳이 바로 앎, 분별지성의 마지막 끝인 의식의 뿌리라고 볼 수 있읍니다. 이 뿌리 끝(은산철벽, 원인체)에 머무르는 것이 옳바른 수행의 방법입니다.
익숙한 지성의 알음알이와 지식으로부터 벗어나서 어렵고 낯설며 컴컴한 모름 속으로 과감하게 파고 들어야 용감한 대장부, 즉 진정한 구도자라고 볼 수 있읍니다. 익숙하지 않은 미지의 초월세계에 대하여는 별로 탐구해 들어가지 않고, 현실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온갖 깨달음에 대한 말이 씌어진 책자의 가르침만으로 참나를 알려고 한다면 이것은 물에 비친 달이 진짜 하늘에 떠 있는 달이라고 우기는 정신병자와 다를 바가 없읍니다.
깨달음으로 가는 길이 쉽다고 말하는 어떤 사람도 있지만,그리 쉬운 일도 아니고, 이 세상에는 진정으로 깨달은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힘겨운 수행도 별로 하지 않고 깨달음에 대해서 쉽다고 말하는 사람은 자신이 임제선사나 혜능 같은 사람으로 착각하고 듣기 좋고 이해하기 쉬운 남의 말만 골라서 흉내내는 사람입니다.
쉬운 것은 익숙한 것이고 좋아하지만, 어렵고 낯설은 것은 꺼리게 되면 구도자의 갈길은 아주 멉니다.
오히려 쉽고 익숙한 분별지혜와 지성 알음알이는 장애물이고, 모르고 낯선 것에 익숙해져야만 우리들의 전도(轉倒)된 의식을 다시 바로 잡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의도는 바로 꽉 막힌 철벽 자체(모름)가 우리 구도자들이 들어가야하는 유일한 문(門)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상기시키고자 합니다.
그 철벽 자체가 되면 비로소 그 철벽을 벗어날 수가 있는 기회가 저절로 옵니다.
만일 철벽 자체가 되지 못한다면 이원화 의식의 좁은 연못 안에서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이 이원화 세계의 의식은 이 원인체(무지의 뿌리)에서 나왔읍니다.
따라서 그 의식의 뿌리 끝머리, 무지(無知)에서 벗어나야 자신의 원래 존재가 무엇인가를 깨칠 수가 있는 것이죠.
깨달음에 대한 달콤한 글이나 경전, 인도 성자들의 알아듣기 쉬운 글에만 매달리지 말고 직접 수행으로 들어가서 스스로 이 철벽상태가 되어 보십시오. 또한 그러면 그 철벽상태도 저절로 넘어가게 됩니다. 환해지는 것이죠.
-무한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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