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째서 "나"라는 것은 실체로써 존재할 수가 없는가?

2013. 2. 26. 11:02무한진인/참나 찾아가는 길목

 

 

주변에 흔히 널려 있는 현상으로써, 몇가지 원료로 조합되어 만들어진 물품은 그것의 원재료를 모두 빼 버리면 그 조합된 물건 자체는 실체가 없읍니다. 

예를 들어 벽돌을 만드는 진흙은 물과 보통 흙이 섞어지면 진흙이 되는데,

이것으로 사람이 나무틀 속에 넣어서 벽돌을 찍어 내면 건물의 건축재료가 되는 벽돌이 됩니다. 그런데 벽돌은 진흙과 인력으로 네모난 벽돌이 만들어졌는데,

일단 벽돌이 만들어지면 사람들은 그 벽돌이 만들어진 흙과 물, 그리고 사람의 노력은 잊어 버립니다. 벽돌이라는 물건 속에는 물도 흙도 사람의 인력도 잠재성으로 들어 있지만, 벽돌이라는 특별한 기능외에는 그것이 태어나기 이전의 원료는 전혀 관심이 없죠.

그러나 자세히 관찰해 보면 이 물건에는 "벽돌"이라는 이름과 " 딱딱하고 네모 반듯한 모양"만 있는데, 그 전의 원료 상태인 진흙이 하나도 달라진 것은 없읍니다. 즉 두가지 또는 그 이상의 재료와 인력이 조합되어서 어떤 물건이 만들어지면 그 이전의 부모(원료)상태는 잊어지고 새로운 "모양과 이름" 만이 달라져 있습니다. 

제3의 물건은 벽돌이라는 "이름과 모양"만 새로 태어났을 뿐이지, 그대로 진흙일 뿐입니다. 나중에 벽돌이 부서지면 흙만 남게 됩니다.

 

다시, 이 벽돌로 집을 짓는다면, 벽 자체가 벽돌로 단단하게 구축되었지만, 사람들은 그것이 벽돌이라는 생각은 잊어 버리고, 그저 집으로만 봅니다. 이때 역시도 벽돌로 된 집이지만, 벽돌 자체는 잊어버리고 집이라는 형태만 관심을 갖읍니다.

이 세상 모든 물건들이 이렇게 몇가지 기본 재료로 가공해서 "이름과 모양"만 다르게 만들어 나오고 있읍니다. 그러나 그 새로 태어난 '이름과 모양'자체는 아무 실체도 없읍니다. 그냥 개념으로서 '벽돌이라는 이름과 모양'만 새로 태어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일반적으로 "안다"라고 말하는 지성(知性)은 진지(眞知)와 무지(無知)가 합해져서 새로 나타난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안다"라는 기능은 바로 진지(眞知)라는 아버지와 무지(無知)라는 어머니가 합방해서 나온 사생아(死生兒)입니다.

왜 사생아냐 하면 지성(知性)이라는 아이가 나오자 마자, 진지(眞知)라는 아버지와 무지(無知原理)라는 어머니는 모두 가려져서 잊어 버리고, 그 무지가 낳은 자식인 지성(知性)만이 보여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금 쓰고 있는 앎의 기능, 내가 살아 있다는 이 존재앎의 느낌인 지성(知性)은 바로 무지(無知)로 부터 생겨난 자식입니다. 이 무지의 지성 때문에 세상도 다양하게 나타나 보이는 것이죠.

 

진지(眞知)는 바로 실체인 절대진아(眞我)를 말하는 것이고, 무지(無知)는 마야, 즉 원래 없는 것인데 '마치 있는 것처럼 여기는 환영'이며, "나라는 존재"는 "지성(知性)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으로 그 어머니가 바로 무지(無知)의 원리인 것입니다.

따라서 "나라는 느낌"은 있지도 않은 '무지라는 모친'으로 부터 태어난 것입니다.

인도 우파니샤드에서는 이 무지를 마야라고 하며 마야라는 말뜻이 "원래부터 없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나"라는 존재는 마야로부터 태어났기 때문에 "불임여성의 아이" 또는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인의 아이"라고 표현하고 있읍니다.

 

말하자면 마야인 "나의 뿌리"라는 것은 원래 태어나지 않았는데, 단순히 '진아와 움직임의 그림자'가 결합해서 하나의 '모양과 이름'만이 잠시 나타나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천부경에 절대본체에는 세 가지 기본성분이 있는데 천(天),지(地),인(人)이 잠재해 있다고 되어 있읍니다. 이 천,지,인을 불교 대승기신론식으로 말하면 체(體), 상(相), 용(用)에 해당한다고 볼 수가 있읍니다.

그런데 이 천지인에서 天은 절대본체의 '움직이지 않는 절대공간성', 지(地)는 '움직이는 절대시간성', 인(人)은 '정지와 움직임의 자각성'이라고 볼 수도 있읍니다.

천(天)은 "1"이고, 지(地)는 "2"이며, 인(人)은 "3"인데, "1"은 영원히 고정되어 있는 절대본체의 바탕이며, "2"는 절대바탕의 일부분에서 움직일 수 있는 잠재성이고, "1"과 "2"가 합쳐져서 "3"이라는 잠재적인 절대 자각성(앎,의식,파동성)이 만들어 집니다. 이 "3"의 성분이 움직이기 시작하면 그 자체가 "4"라는 의식바탕에서 "5"(움직임)로 움직여서 "6"(의식파동)이라는 교번운동의 "파동성"의 의식 작용으로서 드러납니다. 

 

따라서 이 의식이라는 파동성 자각이 생긴 원리를 보자면,

정지상태의 절대바탕(아버지)과 움직임(어머니)이 합쳐져서 반복진동(자각운동)을 하므로서  제3의 파동성 의식이라는 아이가 태어난 것입니다. 이 파동성 첫 아이를 베단타 계통에서는 마야(환영)이라고 부르며, 불교에서도 무지(無知)라고 부르고 있읍니다. 왜 무지(無知)라고 부르냐 하면 그 파동성 의식이 태어나자 마자 자기 아버지인 절대 진아를 어둠으로 가리고 오직 자기가 주인공인 것처럼 행세를 하기 때문에 무지(無知)라고 이름을 붙였읍니다.

 

이것을 왜 꿈과 같은 환영이라고 하며 또는 원래는 있지도 않은 마야라고 하느냐 하면 그것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항상 진동하며 움직이므로 고정된 장소에 안정되어 있는 실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즉 한 순간도 어느 한 장소에 머물지 못하고 계속 움직이기 때문에 존재한다고 딱 잡아서 말할 수가 없는 것이죠. 바로 지금 여기 "이것이다 !" 하고 지적하는 순간에 이미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는 것처럼, 저 멀리 날아가는 새 그림자를 쫏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라고 말하고 있읍니다. 

 

마치 옛날에 정월대보름날 아이들이 쥐불놀이 할 때 깡통에 불을 담아서 철사 끈을 달아 뱅글뱅글 돌리면 커다란 불꽃 동그라미가 멋지게 생기는데, 그 불꽃 동그라미는 불이 빠르게 회전하면서 생기는 동그라미이지 실제로 정지할 때 있는 것처럼 고정된 불꽃 동그라미가 아닌 것과 비슷한 현상입니다.

현대에도 큰 행사에서 불꽃놀이라는 것은 불꽃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작은 화약의 불덩어리들이 순간적으로 확 퍼져 나가면서 움직이는 순간에 그 움직이는 불덩어리 괴적이 마치 불로 그린 꽃처럼 아름답게 그려지는 것이죠. 한순간에 생겨났다가 바로 사라지는 허망한 그림자죠.

 

이렇게 움직이면서 잠시 생긴 것은 실체가 없고, 항상 변하므로 원래는 없었던 것이 움직임으로 인해서 그 그림자 모양이 생겨나서, 환영, 환상과 같다고 말합니다. 바로 항상 움직이는 파동성 의식이 정월 대보름날 불꽃놀이 꽃처럼 실체가 없는 것이며, 그래서 마야 또는 무지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의식 자체가 무시로 진동하는 파동성이며, "나"라는 느낌도 의식으로 만들어진 느낌이므로 실체가 없이 잠시 나타나는 환영, 즉 꿈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죠.  

그래서 이 "나"라는 존재자체도 항상 진동하는 미세한 파동성 의식이므로 실체가 없고, 잠시 빌린 "모양과 이름"만 있을 뿐인 것입니다.

 

정월 대보름 날이 되니 어린 시절 시골고향에서 빈 깡통으로 쥐불놀이 하던 생각이 문득 납니다, 보름달이 환하게 떠 있는 동네 큰집 마당에서 쥐불놀이 하다가 동네 어른들 한테 혼나면서, 다른 아이들과 함께 빈논 한가운데로 쫏겨나면서도 신나게 불깡통을 돌리면서 불꽃 원 속에서 즐기던 어린 시절 추억이 문득 떠 오릅니다. "나"라는 것은 마치 잠시동안 보여지는 불꽃의 동그라미 그림자와 다를 바 없읍니다. 의식의 불꽃이 진동하면서 그려낸 허망한 그림자죠.

 

                                                                        -무한진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