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도덕경42장,억지로 뻣뻣하게 버티는 사람은 제 명대로 죽지 못한다.

2009. 8. 12. 20:41성인들 가르침/노자도덕경

 

 

 

[원문]-백서본

 

道生一  一生二  二生三  三生萬物

도생일   일생이 이생삼  삼생만물

 

萬物負陰而抱陽  中氣以爲和

만물부음이포양  중기이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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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下之所惡 唯孤寡不穀 而王公以自名也

천하지소악 유고과불곡 이왕공이자명야

 

物或損之而益 益之而損

물혹손지이익 익지이손

 

故人之所敎 亦議而敎人

고인지소교 역의이교인

 

故强梁者不得死

고강양자부득사

 

我將以爲學父

아장이위학부

 

[해석]

 

도에서 하나가 나오고,

하나에서 둘이 나오며,

둘에서 셋이 나오고,

셋인 의식을 통해서 만물이 나오는 것이오. 

 

만물은 어두운 음(陰)은 짊어지고, 

밝은 양(陽)을 껴안지만,

중심기운이 어둠과 밝음을 서로 바꿔가며 조화시키는 것이외다.

 

 

("道에서 나온 하나"에 대하여 알기 쉽게, 한가지 예를 들어 보자면)

세상사람들이 싫어하는 것은

외톨이,빈털털이,미천한 사람,이라는 말인데,

그러나 왕은 남에게 자기를 지칭할 때에 이러한 명칭으로 부르는 것이오,

이 "하나"라는 것은 가장 밑바탕의 덕(德)으로 비유할 수 있소.

 

 

("둘과 셋"에 대하여 알기 쉽게, 한가지 예를 들어 보자면,)

재물은 혹 줄어들면 다시 보태지게 되고,

늘어나면  또 줄어드는 것이오

이우주삼라만상이란 역동적으로 교차하는 파동의식의 움직임일 뿐이외다.

 

 

("셋에서 만물이 나온다"라고 하는 말은~) 

옛사람들이 가르쳐 준 말이지만,

역시 (오랜세월) 검증된 것이므로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것이외다.

 

 

(" 만물은 어둠은 등지고, 밝음을 껴안지만,중심기운이 어둠과 밝음을 조화시킨다"라는 말을 다르게 말해 보자면~)

억지로 뻣뻣하게 버티고 있는 사람은 제명대로 죽지 못한다는 것이외다.

 

  

나는 이것을 배움의 근간으로써 따르고 있소.

 

 

[해설]

 

이번 42장은 다른 장과는 좀 다르게 특이한 문장구조로 되어 있읍니다.

이 장은 노자 도덕경 중에서도 상단부와 하단부의 의미가 적절하게 연결이 안되어 예전부터 논란이 많은 글입니다.

왜냐하면 상단부 문장은 道로부터 나오는 우주창조원리를 순서대로 정렬해서 아주 단순하게 묘사한 것에 반해,

하단부는 마치 겸양의 덕을 말하다가, 갑자기 집착으로부터 벗어나라는 말을 하는 것도 같다가,그 다음에는 또 사물의 변화하는 상태를 묘사해 논 것 같기도 하다가, 다시 남들을 가르치는 내용이 나오는 둥, 하단부 문장들의 각 문장마다 의미적으로 전혀 일관성이 없고, 문단 전체가 통일성이 없이 둘쑥 날쑥하며, 도데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인지 중심주제를 못 찾아 헷갈리는 글입니다.

이 42장의 하단부 문장은 다른 장에 있어야 할 문장이 잘못 끼어들어와 엉뚱하게 편집된 것이라고-,도덕경 역사이래 이천여년이상이 흘렀는데도 거의 대부분의 도덕경을 전문으로 연구한 학자들이 잘못 편집된 문장이라고만 주장들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문장구조를 대별해 보면 상단부는 우주창조의 심오한 원리를 조리있게 묘사한 것 같으나,

하단부는 문장마다 다른 뜻을 묘사하고, 또한 일관성있게 그 의미가 연결이 되지 않아서 마치 술에 취해서 횡설수설하는 사람이 이것 저것 주서섬기는 듯한 감을 받을 정도로 그 문장 내용이 의미적으로 일관성이 없어 보입니다.

아마도 도덕경을 번역하거나 주석한 분들은 누구나 한번씩 이 42장과 또한 17장에서 들쑥날쑥하는 글 내용에 대하여 공통적으로 난해함을 겪는 경험일 겁니다.

이 42장에 대해 해석을 하면서 여러가지 번역서와 주석서를 검토해 보았는데도 거의 모든 책들이 원문내용 그대로 직역하였기 때문에, 그 해석내용들은 중심주제가 애매모호하게 번역되어 있었읍니다.

42장의 하단부에 있는 문장의 내용이나 특별한 문장 구성형식에 대해서 언급한 연구서들은 전혀 찾아 볼 수가 없었고, 하단부 문단은 잘못 끼어들어간 문장일 것이라고 추측하는 책들이 거의 대부분이었읍니다.

 

그러나 결국, 혼자서 여러가지 측면에서 검토해 보고, 숙고해 본 결과,

하단부 각 문장은 상단부 문단의 각 문장을 다시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속세에서 흔히 대하는 평범한 일상사에 비유하여 보충설명한 내용이라는 사실을 발견했읍니다.

역시 노자 도덕경의 치밀함을 일견하고는 순간적으로 무릅을 치며 "그러면 그렇지 !"하고 혼자서 감탄했읍니다.

상단부에서 묘사한 내용은 도에서 세 단계를 거쳐 의식이 나오고, 의식을 통해서 물질적 우주세계가 나타난다는 내용으로 아주 간단하게 설명되어 있읍니다.

하단부는 위의 상단부에서 설명한 각 문장을 순서대로 알기쉽게 다시 해설한 것인데, 이 속세세상에서 흔하게 일어나는 일을 실례를 들어 비유하면서 일,이,삼,---,차례대로 설명해 주고 있는 내용입니다.

상단부가 도에서 나오는 우주생성원리 대한 아주 단순한 단계적 개념철학에 대한 이론적 문장이라면,

하단부는 일상 속세 생활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평범한 실례를 들어가며 순서대로 해설한 내용입니다.

이렇게 해서 이 도덕경 42장에 대해서 왕필본 이래 어떤 주석서나 해석서도 언급하지 않은 하반부의 숨겨진 의미가 일관성 있게 정리가 되는 것 같으며,

도덕경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좀 더 쉽고 옳바르게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수 있을 것 같읍니다.

 

 

道生一  一生二  二生三  三生萬物

도에서 하나가 나오고,

하나에서 둘이 나오며,

둘에서 셋이 나오고,

셋에서 만물이 나온다. 

 

이 문장은 道인 절대바탕에서 의식파동이 생기는 과정을 간단하게 묘사한 내용입니다.

절대바탕인 道는 개념적으로 아무것도 없는 無(제로)라는 것이지요.

이 아무것도 없는 無상태에서 의식의 한파동이 생기는 순서를 미분(微分)하여 일,이,삼,으로 설명한 것입니다.  

<도에서 하나가 나온다>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無에서 새롭게 어떤 것이 하나가 불쑥 튀어 나온다는 것이라기 보다는 움직임없는 절대바탕의 한점에서 그자체가 스스로 움직인다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즉 아주 잔잔한 연못 물 표면의 한점에서 하나의 물결이 불쑥 올라오는 것과 비슷합니다.

따라서 바탕인 道에서 나온 <하나>는 道와 똑 같은 것이지만, 고정된 바탕에서 그자체의 움직임이 발생하는 첫 움직임의 과정인 상승작용입니다.

이 첫번째로 발생하는 파동운동요소가 활동성,창조력 또는 탄생, 상승력,양성(陽性), 적극성 등으로 불리우는 운동의 삼요소 중의 첫번째 움직임입니다.

 

<하나에서 둘이 나온다>는 것은, 일단 첫번째 움직임이 발생하여 상승하면, 그 움직임이 어느 지점에서 하강을 하게 되는데, 이 하강력을 소멸성 또는 파괴성,음성(陰性) 소극성,등으로 불리우며, 활동력이 변해서 소멸하는 운동력을 말합니다.

연못의 파도를 비유하자면 파도의 한 파장이 내려가는 부분과 비슷하다 고 볼 수 있읍니다.

 

<둘에서 셋이 나온다>는 말은 이렇게 파동의 상승력과 하강력, 두가지 운동력은 조화유지력에 의해서 파동성이 계속 유지가 됩니다.

즉 하나는 상승력, 둘은 소멸력, 셋은 조화유지력이 되어 세가지가 평형을 이루면서 계속 안정된 반복운동의 진동파동이 유지되는데 이것이 바로 의식파동인 것입니다.

파동의식자체가 활동력과 소멸력이 합쳐져서 절대바탕의 자각력인 조화력으로  유지되는 결과입니다.

따라서 <셋>자체는 조화력이면서 <의식> 그자체를 말합니다.

그런데 파동에서 이 셋인 조화력은 절대바탕이 가지고 있는 자각(自覺)이 비친 것이며, 이 절대바탕의 자각력이 반영된 것이 의식의 시작점이자 파동의 중심력(접촉점>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셋>은 기본의식인 순수보편의식 상태를 말합니다.

이 의식은 육체마음의 근원의식이기도 합니다.

 

<셋에서 만물이 나온다>는 말은,  절대바탕의 그림자가 진동하며 움직이는 파동의식에서 이 현상세계인 우주삼라만상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셋>은 절대바탕에서 직접 나온 순수한 보편의식이며, 이 순수한 파동의 보편의식이 육체감각의식기관에 의해서 변조되어 물질오원소인 地水火風空의 기본원소 파동의식과 각원소의 상승,하강,조화력과 의식자체의 음과 양,등등의 여러 파동요소들이 서로간에 복잡한 간섭작용으로  분해되고 조합되어 또 다른 이차,삼차 기생파동들을 생성해내어 다종다양한 형태의 우주삼라만상을 그려내는 것입니다. 

따라서 현상세계에서 나타나는 陽氣의 활동성, 행복,기쁨, 삶 그리고 陰氣의 소멸성, 불행,슬픔,죽음 같은 현상들은 변화하는 파동의식에 의하여 일시적으로 나타난 것이므로, 좋은 것이나 나쁜 것으로 일정하게 고정된 것이 없고, 조화성에 의하여 항상 변화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강조하는입니다.

 

 

萬物負陰而抱陽  中氣以爲和

만물부음이포양  중기이위화

萬物負陰而抱陽 ; 모든 생명체는 어두운 음을 뒤에 짊어지고, 밝은 양기만을 가슴에 끌어 안지만,

負陰; 어두운것은 등뒤에 짊어진다.(어둡고 부정적인 것은 싫어서 등뒤로 외면한다)

抱陽; 밝은 것은 가슴에 끌어 앉는다.(밝고 긍정적인 것은 좋아서 끌어 안는다) 

中氣以爲和 ; 중심기운으로써 어둠과 밝음을 서로 교차하며 조화시킨다.

 

여기서 만물(萬物)은 모든 생명체들을 의미합니다.

<모든 생명체들이 음(陰)을 등뒤에 짊어진다>라는 말은,

음(陰)은 죽음,소멸성,하강성,어둠,슬픔,고통,가난,그늘, 어둡고 보이지 않는 것,등 부정적이고 나쁜 것을 의미하는데,

이러한 나쁜 기운을 싫어하여 등뒤로 돌려서 마주 보려고 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밝은 양기만을 끌어 안는다>는 말은,

양(陽)은 탄생,활동력, 상승성,밝음,기쁨,행복, 풍요,양지,밝게 나타난 것,등 긍정적이고 좋은 것을 의미하는데, 이러한 밝은 기운은 좋아해서 앞 가슴에 끌어안고, 선호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문장을 <만물은 음기를 지고 양기를 안는다>라고만 번역을 하면,

마치 모든 만물이 등뒤에는 음기가 고정되어 있고, 앞에는 양기가 고정되어 있다,라고 물리적인 어떤 기운의 고정된 배치구조 개념으로 이해해서, 그렇게 해석을 한다면, 다음 문장들인 <中氣以爲化>라는 문장과 의미가 연결이 안되어, 무슨 의미를 표현한 것인지 오리무중이 될 수가 있읍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해석서들과 주석서들은 그렇게 해석과 주석들을 하고 있읍니다.

따라서 이문장이 무척 이해하기가 난해한 부분이 되었고, 게다가 어떤 주석서는 음양 오행의 역학이론까지 동원하여 더욱 아리송하게 설명을 하는 책자도 있었읍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노자도덕경에 나오는 내용들은 그렇게 음양오행이론까지 동원하여 풀어야 할 복잡하고 난해한 것은 아닙니다.

 

<中氣以爲和; 중심기운으로 (陰과 양을)  조화시킨다> 이말은,

中氣는 절대바탕의 自覺이 반영된 파동성의 조화력을 말하는데, 이것은 파동의 상승성과 하강성이 적절히 평형을 조절하고 파동력을 계속 유지시키는 중심력입니다.

<하나>가 상승력 또는 활동성이라면 <둘>은 활동성의 반대인 소멸력이고,

이 활동력과 소멸력을 적절히 조절해주는 조화력이 '셋'인 것이죠.

또한 이 조화력인 의식은 생물체들의 존재를 유지하기 위한 자기사랑으로 반영되기도 합니다.

따라서 이러한 활동력,소멸력,조화력으로 형성된 파동의식에서 나온 모든 생명체들도 역시 陽氣의 활동력,陰氣의 소멸력, 그리고 中氣의 조화력의 운동에 따라갈 수 밖에 없는데, 대부분의 생명체들은 활동력만을 선호하고 소멸력을 꺼리며,

조화력은 아예 존재하는 줄도 모릅니다.

인간사회에서 이 조화력에 관심을 쓰는 사람들이 바로 구도자들이며,

도를 완성한 도인은 바로 조화력인 의식의 중심점에 완전히 안주하고 있는 존재들입니다. 조화력 자체가 되면 활동성과 소멸성이라는 파동 움직임을 지켜보는 주시자 자체가 되는 것입니다. 이 조화력의 중심이 바로 현상세계의 주시자입니다.

 

그러나 생명체들이란 각자 개체적인 존재의식에 의해서, 자기 존재를 유지하고 사랑하려는 본능적인 욕망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미세한 박테리아부터 식물,동물,사람등 생명체들은 자기삶을 현상 유지하려는 본능적 관성을 지키려고 활동적이고 발전적인 陽氣를 좋아하고 가슴에 품으려고 하지만, 죽음과 소멸,고통,퇴보 등의 陰氣的인 현상에 대해서는 맞주 대하지 않으려고 등을 돌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만물의 개체적 자기 존재성을 유지하려는 자연스런 본능이긴 합니다만,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관점에서 볼 때에는 개체만의 불필요한 의지라고 볼 수가 있겠읍니다. 개체에고가 삶 속에서 고통을 겪는 것은 바로 이 밝음과 어둠을 자기의지대로 선택하려면 욕구때문에 고생을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항상 마음의 중심점에 안주하고 있을 때는 밝음과 어둠의 분별하는 욕구가 사라집니다.

 

왕필본이나 기타 여러판본들은 백서본을 제외하고는

<沖氣以爲和>로 기록되어 있읍니다.

백서본의 <中氣以爲和>가 왕필본을 위시하여 다른 본에는 <沖氣以爲和>로 되어있읍니다.

이 경우에는 해석을 하면<텅빈 氣로써 조화를 이룬다>라고 해석이 되는데,

앞문장의 <萬物負陰而抱陽>과 합쳐서 연결해서 보면 얼핏 겉으로 보면 그럴 듯해 보입니다만, 그러나 전혀 맞는 문장이 아닙니다.

<萬物負陰而抱陽 沖氣以爲和>를 기존의 다른 해석서들의 해석대로 하면 <만물은 陰을 등지고, 陽을 껴안는다. 텅빈 기로써 조화를 이룬다 >라고 되어 있는데, 백서본의 <中氣>를 왕필본에서 <沖氣>로 바꾼 이유가 무엇인가를 검토해 본다면,

陽과 陰이 아닌, 또다른 중기(中氣)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명확히 알지 못하므로, 허공같은 충기(沖氣)라고 표현 한 것 같읍니다. 

왜냐하면 허공 안에서  陽(밝음)고 陰(어둠)이 변화할 수가 있는 것이죠.

즉 밝음과 어둠이 공통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자리는 텅빈 허공 뿐이며, 허공 안에서 밝음과 어둠이 변하지만 허공 자체는 항상 일정하게 변화가 없기 때문에 양과 음을 조절할 수 있는 것은 허공과 같은 충기(沖氣)라고 아예 고쳐서 이해하기 쉬운 개념을 만든 것 같읍니다.

텅빈 허공과 같은 沖氣는 陰과 陽이 공통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자리는 되지만, 그것을 조절하는 자각력은 없는 것이죠.

이 자각력은 단순히 허공과 같은 텅빈 충기가 아니라, 절대바탕의 접촉점에서 저절로 나오는 비춤(지혜)입니다.

이것은 텅빈 허공과 같은 것이 아니라, 절대바탕에서 저절로 내비치는 원래부터 갖춰져 있는 자연 힘입니다.

이 절대바탕에서 저절로 비추어지는 자각력을 백서본에서는 중기(中氣)라고 표현 했는데,

이 자각력이 <셋>인 보편적 파동의식의 중심점에서 조화력을 발휘하여 일정한 파동성을 계속 유지하는 것입니다.

의식이 생기면 그 파동의 중심점(절대체와의 접촉점)에 자각력이 저절로 절대바탕으로부터 유도됩니다.

그러나 왕필본이나 기타 모든 도덕경 판본들이 이러한 원리를 모르고, 그것을 텅빈 허공같은 沖氣라고 바꾸어 표현한 것입니다.

물론 沖氣자체를 자각력이 있는 기운으로써 해석을 해도 됩니다만, 절대바탕을 표현하는 "가운데 中"에 있는 중심기운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텅빈 沖氣보다는 한발 더 적절하고 직접적인 표현이라고 생각됩니다.

충기를 절대바탕 그자체라고 이해할 수도 있으나, 절대바탕에 대한 어떠한 개념이나 이미지,명칭은 눈꼽만큼도 허용될 수가 없는 것이죠.

따라서 왕필본을 위시하여 기타 판본들의 沖氣라는 단어는 적절치 못하게 사용된 단어라고 판단됩니다.

그래서 이 백서본의 <中氣>를 왕필본에서 <沖氣>로 썻기 때문에 아예 백서본 원문을 선택해서 해석한 것입니다.

이러한 심오한 근본 원리를 이해하려면 침묵의 명상 중에 깊은 삼매 속에서 아주 오랫동안 고요하게 잠기게 되면, 마치 깊은 잠속에서 꿈이 저절로 나타나듯이, 사람에 따라서는 직감적인 영감으로 우연히 깨치는 기회를 맞이할 수도 있읍니다.

 

원래<萬物負陰而抱陽 中氣以爲和>의 의미는,

<모든 생물체들은 어둡고 나쁜 음기는 싫어서 등뒤로 하고, 밝고 좋은 양기는 좋아서 가슴에 끌어안는데, (그러나) 가운데 中氣가 음기와 양기를 서로 교대로 되풀이 움직여서 변화되도록 한다.>라는 것입니다. 

모든 생물체들이 음기를 싫어하고 양기를 끌어안고 좋아하지만,

실제로는 절대바탕의 자각성이 반영된 조화성에 의하여 저절로 중기에 의하여 음기였던 것이 양기로, 양기였던 것이 음기로 교대로 되풀이 변화을 자동적으로 조화롭게 조절한다는 것입니다.

그러하기 때문에 사람은 억지로 싫은 음기를 거부할 필요도 없고, 양기만 좋아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이 아래 문장들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석하지 않으면, 이 아래 <천하 사람들--->이하 문장과 전혀 연결이 안되고 전체 문장이 상,하 두동강이 나서 엉뚱한 방향으로 해석이 되는 것이죠. 

따라서 현상세계에서 나타나는 양기의 활동성, 행복,기쁨, 삶과 음기의 소멸성, 불행,슬픔,죽음 같은 현상들은 변화하는 파동의식에 의하여 나타난 것이므로, 좋은 것이나 나쁜 것으로 일정하게 고정된 것이 없고, 조화성에 의하여 항상 변화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설명한 문장입니다.

즉 파동의식으로 변화하는 것은 진정한 "나"라고 할 수 없으며,

"참나"는 이러한 움직이는 의식의 주시자인 절대바탕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절대바탕이 되면 주시자조차도 사라지는 것이죠. 

 

天下之所惡 唯孤寡不穀 而王公以自名也

천하지소악 유고과불곡 이왕공이자명야

天下之所惡 ; 세상사람들이 싫어하는 것은

唯孤寡不穀 ; 외톨이, 모자른 사람, 비천한 사람 ,이라는 말인데,

而王公以自名也 ; 그러나 왕은 남에게 자기를 지칭할 때 이런 명칭으로 부르네.

 

이문장은 맨 윗부분의 <道生一>을 세속 세상에서의 일과 비유하여 알기 쉽고

또 다시 해설해 주고 있읍니다.

즉 道는 절대바탕이고, 道에서 <하나>가 나왔는데,이 <하나>는 바로 도인의 <德>으로 비유하고 있읍니다.

<德>이란 도인의 마음자세와 행동으로써, 가장 낮은 바탕에 거주하면서, 모든 만물에 공통되는 보편성 마음이며, 특별한 속성은 없지만, 무한하게 넓고, 형태가 없으며, 있는 그대로 자연스럽게 행하며, 차별없이 평등하고,모든 만물의 가장 밑바닥에 거하고, 모든 것을 포용하는 자비가 있으며, '나'라는 개인 정체성이 사라진 마음 등등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세상사람들이 가장 싫어하는 말인 '외톨이'라는 말도 도인에게는 전체가 하나라는 의미에서 수용이 되며, 아무것도 모르는 무식함도 도인에게는 앎을 완전하게 벗어버린 것으로 해당되며, 또한 물질적으로 전혀 욕망이 없으므로 스스로 빈털털이라는 말은 모든 것을 벗어 버려서 초연해진 상태와 어울리는 것이죠.

 

중국에서는 고대부터 왕이 자기 자신을 남에게 지칭할 때에 과인 또는 불곡인, 유고인 등으로 스스로 불렀읍니다만, 아마도 그 옛날부터 왕이 자신을 가장 낮추는 말로  부르는 것이 고대부터 전통화 되어 있었던 것 같읍니다.

물론 우리나라의 조선시대에도 중국을 따라서 왕이 자신을 <과인은--어쩌구 저쩌구-->하는 대화를 역사물 연속방송극에서 자주 들어볼 수가 있읍니다.

이것은 바로 지상의 국가에서 절대권력을 가진 왕조차도 스스로 가장 낮은 절대바탕에 있다는 것을 은연 중에 나타내는 것으로, 고대관습이 전해져 내려온 것이며, 그러한 겸손과 낮은 곳에 임하는 모범자세를 백성들에게 보여준다는 뜻도 있지만, 그러나 세월이 오랫동안 흘러감에 따라 그렇게 겸손한 것처럼 관습화된 왕의 의례적인 자칭은 형식화된 것일 뿐이지 세월이 더 흘러가면서 아무런 의미도 없게 되었죠,  

 

物或損之而益 益之而損

물혹손지이익 익지이손

物或損之而益 ; 재물이야 혹 줄어들면 보태지고 ,

益之而損 ; 늘어나면 줄어들게 된다. 

이 문장은 위의 <一生二 二生三>을 이 속세세상에서 흔하게 접하는 일로 비유하여 알기 쉽게 설명한 내용입니다.

즉, 모든 사물, 특히 돈이나 재물은 줄어들거나 손해보는 때가 있으면 다시 크게 이익을 보아서 느는 경우도 있고, 반대로 크게 불어들다가 줄어들기도 한다는 것이죠.

비록 재물 뿐 아니라, 이 우주 삼라만상은 항상 움직이며 역동적으로 변하는 것이죠.

밝음과 어둠, 상승과 하강, 호황과 침체, 영광과 치욕, 등등이 교차하며 변화하므로 어느 한편도 진실한 것이 없고, 잠간 스쳐가는 것이어서, 그것에 좋아하거나,싫어하거나, 바라거나, 혹은 증오하거나 하는 것은 흘러가는 시냇물 위에 손가락으로 그림 그리기처럼 헛손질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파동의식의 상승성(1)과 하강성(2)이 조화성(3)에 의하여 항상 반복 운동을 하기 때문에

이 보편의식에 의하여 운행되는 전체 우주삼라만상도 그에 따라서 어떤 것은 아주 긴 주기로 파동성 운동을 하고, 어떤 것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아주 미세한 파동 운동을 하고 있는 것이죠. 

미립자,원자, 중성자,분자,이러한 미세분자들이 모두가 파동에너지 뭉치라는 것은 잘 알려져 있읍니다.

태양빛 자체도 파동에너지이고, 거대우주인 태양계,은하계, 모두가 일정한 주기를 가지고 파동운동을 하고 있는 것이죠.

이렇게 모든 것이 파동운동이며, 인간의 육체자체도 지수화풍공 오원소로 구성되어 있고,육체감각기관들도 모두가 파동에너지를 감지하는 파동 모니터들이 조합된 것입니다.

따라서 파동성 보편의식에 의하여 육체감각기관이,

마치 방송국 송신소에서 퍼져나간 전파가 각집 테레비 안테나에 유기되어 온갖 그림과 소식을 접하듯이,

전체 보편의식에서 개인 육체에 일부 의식이 유기되어 개인 마음과 감각기관이 되고, 육체감각기관은 감지작용의 기능을 그리고 보편의식은 보이지 않는 앎의 주시자로 결합되어 다양한 세상을 접속하는 것입니다.

나라는 개체와 밖의 우주는 다 똑같은 보편 의식 그 자체입니다.

따라서 이 우주삼라만상은 모두가 보편적인 순수파동의식 그자체의 움직임입니다.

그러나 이 다양한 파동의식을 보는 "참나"는 그 무시로 움직이는 의식조차도 아니며, 주시자조차도 초월해 있는 움직임 없는 절대본체일 뿐입니다. 

 

故人之所敎 亦議而敎人

고인지소교 역의이교인

故人之所敎 ; 옛사람들이 가르쳐 준 이것은

亦議而敎人 ; 역시 (오랜세월) 검증된 것이므로 사람들에게 가르쳐 주는 것이다.

이문장은 <三生萬物 >이라는 문장에 대해서 말한 것입니다.

즉, 언제부터인지 알 수없는 그옛날의 도인들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이러한 말씀을 그동안 오랜 세월을 거쳐서 여러사람에 의해서 직접 체험하고 확인된 것이며, 수많은 도인과 구도자들이 수행으로써 직관적으로 확인한 말이라고 확신하므로, 역시 자기도 이것을 굳게 믿고 사람들에게 가르쳐 준다는 것입니다.

그 말이 바로 <三生萬物>이라는 <파동의식으로부터 이 우주삼라만상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이 말은 비밀전수된 비의가 아니라, 일반적인 철학상식으로 잘 알려져 있고, 현대 양자물리학이 그것을 하나하나 증명해 가고 있는 것입니다. 

 

故强梁者不得死  ; 

억지로 뻣뻣하게 버티는 사람은 제 명대로 죽지 못한다는 것이다. 

고강양자부득사

故强梁者: 억지로 뻣뻣하게 버티는 사람

不得死; 제명대로 못죽는다.

이 문장에서 <故>는 <그러므로>라는 뜻이 아니라 <억지로 또는 일부러>라는 뜻입니다. 

이 문장은 위의 <萬物負陰而抱陽 中氣以爲和>라는 문장<만물은 어두운 음기는 등뒤로 짊어지고, 밝은 양기는 가슴으로 품으려고 하지만,중심기운이 음과 양을 바꿔가며 조화시킨다>라는 내용에 대하여 속세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예를 들어 마지막으로 한마디 충고하는 내용입니다.

이 우주삼라만상은 의식의 움직이는 파동성 교번작용에 의하여 항상 역동적으로 변하는데, 주변의 변화에 적절하게 적응하지 못하고,

일부러 뻣뻣하게 버티는 사람은 천운(天運)에 저항하므로 제 타고난 자연수명대로 다 채우지 못하고 일찍 죽는다,라는 말로 비유했읍니다.

 

이 세상 살아있는 생물들은 누구나 자기가 잘 살려고 하고, 풍족하게 먹을 거리가 있어야 되고, 따스하게 살기좋은 보금자리가 있어야 하고, 즐거운 오락거리를 즐겨야 하는 것은 생명체들의 존재의 기본욕구들입니다.

이러한 밝은 陽氣는 박테리아부터 인간에 이르기 까지 무엇이든간에 좋아해서 자기가슴에 끌어 안는 것이고, 반대로 죽음이나 병이나 슬픔,비극,어둠 등 陰氣는 등뒤로 돌려 버리려고 하는 것이 개체적 존재의 본능적 욕구입니다.

그러나 자기의 욕망만으로 좋은 것만 끌어안고 나쁜 것은 등뒤로 외면하는 에고적인 분별마음은 자기 의지대로 유지될 수가 없는 것이고, 결국은 전체성의 자연 조화법칙에 따라서 그것이 역동적으로 변하게 되므로, 자기 아집과 욕망에 대한 집착이 강한 사람은 자기의 원래 타고난 수명조차도 채우지 못하고 자연스럽게 죽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결국은 "나"라는 에고의 아집을 버리고 자연에 동화되어 무위적인 자연스러움이 되라는 말입니다.

 

또한 어떤 개념이나 습관에 사로 잡히는 것은 그것에 속박당하는 것이고, 일단 어떤 것에 속박 당하게 되면 스스로 그 속박을 풀기가 거의 불가능하다고 여기죠.

그런 사람은 스스로 어떤 습관이나 집착 속에 있는 것을 보호받는다고 착각하면서 거기서 벗어나는 것을 죽는 것보다도 어렵게 여깁니다.

자기의 에고성 고집이 자연의 무위법칙에 저항을 하는 것이죠.

 

원래 종교나 철학의 최종목표는 이러한 특정적인 개념과 자아습관으로부터 벗어나고, 육체와 동일시된 개인 에고인 나를 벗어 버리고, 전체로써 자유롭게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특히 도를 공부하는 구도자들이나  특정종교 신앙인들은 자기가 믿는 종교나 철학, 또는 수행행위로부타 훨훨 벗어나서 자유롭게 되는 것이 최종 구도목표이며 신의 구원입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은 진동하는 의식에 의해서 속절없이 변하고 실체가 없는 꿈처럼 무상하다는 것을 절실하게 깨치면, 어떤 개념이나 물질적인 욕망과 집착을 그 자리에서 놓아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동안 쌓아온 욕망과 집착의 습이 남아 있어서, 그것을 수행으로써 닦아내야 한다는 것이죠.

이렇게 수행을 해서 마음을 고요히 안정시킨다면 누구처럼 뻣뻣하게 무엇인가를 지키며 버티고 있는 집착성이 자기도 모르게 저절로 서서히 녹아내리는 것입니다.

 

여하튼 위의 본문 문장에서 전달하고자 하는 것은,

음과 양,밝음과 어둠,좋음과 나쁨,행복과 불행, 슬픔과 기쁨,부와 가난, 병과 건강, 쾌락과 고통, 환희와 비애, 사랑과 미움, 자애와 질시, 생과 사, 평온과 혼돈,

등 등,모든 양기 또한 음기는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중심기운에 의하여 교차되면서 무시로 변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신을 어떤 사람 또는 어떤 정체성,지위,신분,외모,재산,행복 등이 항상 긍정적인 방향으로만 향해 간다는 착각과 집착을 버리고, 또한 그러한 물질적인 것이 부족하여 욕망하면서 집착하거나 비애와 고통에 휘말리지 말고, 자기의 원래 타고난 정체성이 무엇인지, 내 마음의 중심이 어디에 있는지, 탐구해서 중심을 지키라는 것이며, 그 움직임에 영향받지 않는 중심 속에서 자연 무위적인 평온함을 유지하라는 가르침입니다.

"뻣뻣하게 지키고 있는다"라는 말은 바로 욕망이나 어떤 개념,습관, 자만감 등 속세의 어떤 대상에만 집착하고 있다는 것을 비유한 말입니다.

 

사람이 온갖 욕망과 나라는 존재성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벗어나자면, 

스스로 직접 자기자신이 무엇이며, 어디서 나왔는지를 탐구하고,성찰하며, 한생각으로 내면에 깊숙히 집중해 들어가 보편적 자기 중심에 안정되어 있으면, 저절로 모든 집착으로부터 벗어나며, 자기 내면의 신을 직접 만나게 됩니다.

그러면 죽음과 탄생, 고통의 굴레로부터 벗어나서 영원한 자유를 주는의 감로수를 마실수가 있읍니다.

탄생과 죽음에 관계없이 <있는 그대로> 항상 존재하는 내면 바탕이 되는 것이며, 이것이 뻣뻣하게 버티는 자세를 벗어나서, 무위 자연과 하나가 되는 진정한 대자유인이 되는 길입니다.

그래서 억지로 뻣뻣하게 버티는 사람은 원래 타고난 자기의 수명조차 다 채우지 못하고 죽는다는 비유적인 경고를 하고 있읍니다. 

속세의 욕망이나 집착을 버리지 않는 사람을 "뻣뻣하게 버티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나'라는 존재를 포함에서 세상 삼라만상 모든 현상이 끊임없이 파동성으로 왔다갔다하며 변화하는 의식의 허황한 빛그림자일 뿐이기 때문에, '나'라는 자만감(自滿感),자존심,내가 있다는 생각, 내가 행위자의 주체라는 생각등 등,자신이 하나의 개체존재로써 실재(實在)한다는 에고적 환상으로부터 벗어나라는 것입니다.

 

我將以爲學父 ; 나는 (이것을) 배움의 근간으로 삼으려고 하네. 

아장이위학부

將: 따른다. 받들다,지키다,삼다.

나는 (이것을) 배움의 근간으로 받들려고 하네. 

위문장에서 <將>은 <장차>라는 의미가 아니라, <받들다,따르다, 삼다>라는 의미입니다.

위의 내용으로 도를 완성하는 기본 지침으로 공부하겠다고 맺는 말입니다.

위의 문장 중에서도 특히 어떤 것에 집착하거나 속박 당하지 않고 자연의 흐름과 같이 <있는 그대로> 자유스러운 무위행을 지침으로 삼겠다는 뜻인 것 같읍니다.

그러나 자유를 갈망한다는 것은 무엇엔가 속박당하고 있다는 것이며,

그 자유라는 개념마저 훌쩍 벗어 버려야 되겠지요.

원래 모든 존재는  태어나기 이전부터 지니고 있는 자유 그 자체라고 합니다.

다만 자기가 육체를 가진 개인, 사람이라는 자기 동일시 생각만 벗어버린다면,

전체가 나자신으로 드러나며,

내가 자유 그 자체이므로 자유라는 말조차 사라지는 것입니다.

긴글 읽으시느라 수고하셨읍니다. 감사합니다.    -무한진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