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잠과 생시, 그리고 순수의식

2009. 7. 17. 12:05성인들 가르침/라마나 마하리쉬

 

 

 

방문자 : 상대적으로 말해서, 잠의 상태가 생시상태보다 순수의식에 더 가깝지 않읍니까?

 

마하리지 : 그렇지요. 그것은 이런 의미에서 입니다.

잠에서 생시상태로 넘어 올 때 '나'라는 느낌이 시작되고,

마음도 활동을 개시하며, 생각들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이때 몸의 기능들도 작동하기 시작합니다.

이 모든 과정이 일어났을 때 우리는 깨어 있다고 말하게 됩니다.

잠의 상태는 이런 과정이 전개되지 않는 것이 특징이고,

따라서 그것은 생시의 상태보다 순수의식에 더 가깝읍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언제나 잠만 자고 있으려고 해서는 안되겠지요.

첫째로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잠은 반드시 다른 상태들과 번갈아 들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잠은 진인의 지복상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의 상태는 영구적이며 번갈아 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잠의 상태는 사람들이 자각의 상태로 인식하지 못하지만,

진인은 항상 자각하고 있읍니다.

이처럼 잠의 상태는 진인이 자리잡고 있는 상태와 다릅니다.

 

더욱이 잠의 상태에서는 개인의 생각과 외부에서 받는 인상에서 벗어나 있읍니다.

그것은 우리의 의지로 어떻게 할 수가 없읍니다.

그 상황에서는 어떤 노력도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순수의식에 더 가깝기는 하지만,

진아를 깨닫고자 노력하기에는 적합한 상황이 아닙니다.

 

깨닫고자 하는 동기는 생시의 상태에서만 일어날 수 있고,

노력도 우리가 깨어있을 때만 할 수가 있읍니다.

우리는 생시상태에서 생각들이 잠과 같은 고요함을 얻는데 장애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고요히 있으라, 그리고 내가 신임을 알라"

그래서 <고요함>이 구도자의 목표입니다.

최소한 한순간에 한 생각이라도 고요히 하려는 단 한번의 노력이라도 거듭하기만 하면 침묵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노력은 필요하며, 그것은 생시상태에서만 가능합니다.

여기에 노력이 있고, 여기에 자각도 있으며, 여기에서 생각도 고요해 집니다.

 

그래서 생시상태에서도 잠과 같은 평안을 얻습니다.

그것이 진인의 상태입니다.

그것은 잠도 아니고, 생시도 아닌, 그 둘의 중간입니다.

생시상태의 자각과 잠의 고요함이 동시에 있읍니다.

그것을 잠-생시라고 합니다

또 그것을 깨어있는 잠, 잠자는 생시, 잠없는 생시 혹은 깨어있는 잠이라고도 합니다.

그것은 잠이나 생시, 둘 중에 어느한쪽과는 다릅니다.

그것이 "생시넘어 깨어있음" 혹은 "잠 너머 깨어있음" 입니다.

그것은 완전한 자각과 완전한 고요함이 결합된 상태입니다.

그것은 잠과 생시의 중간이며, 또한 연속하는 두생각 사이의 간격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거기서 생각들이 솟아나는 근원인데, 우리는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 그것을 얼핏 봅니다.

바꾸어 말하면, 생각들은 잠의 고요함 속에 그 기원을 가지고 있읍니다.

생각들이 잠의 고요함과 생시의 소란함 사이의 모든 차별을 만들어 냅니다.

생각들의 뿌리로 나아가십시요.

그러면 잠의 고요함에 도달합니다.

그러나 왕성한 탐구로 생생하게 깨어있는 상태에서, 즉 완전한 자각을 가지고 거기 도달해야 합니다.

그것이 또 앞에서 말한 생시-잠 입니다.

그것은 둔한 상태가 아니라 지복입니다.

그것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입니다.

거기에서 모든 생각들이 시작됩니다.

우리의 모든 경험들이 생각들이 아니고 무엇이겠읍니까?

쾌락과 고통은 생각에 불과합니다.

그런 것들이 모두 우리자신의 내면에 있읍니다.

생각에서 벗어나 있되 그러면서도 자각하고 있으면,

그대는 바로 저 완전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방문자: 너무나도 수숭한 가르침의 말씀입니다.

이 은혜를 무엇이라 감사드려야 할 지 모르겠읍니다.

(다시 한번 마하리지 앞에 공손히 절을 하며)

이제 저는 그 가리침 말씀을 가슴에 고히 간직하고, 내일 이곳을 떠나야겠읍니다.

 

마하리지 : (미소를 지으시며) 그대가 한장소를 떠나 다른 장소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대는 항상 움직이지 않읍니다. 주위의 장면들만 그대를 지나갑니다.

보통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그대는 배안의 선실에 앉아 있고 배가 항해합니다.

그대는 움직이지 않읍니다.

우리는 영화에서 사람이 먼길을 달려가고 우리에게 달려오는 장면을 보지만, 화막(스크린)은 움직이지 않읍니다.

계속 움직이며 변해가는 것은 빛그림자일 뿐입니다.

 

방문자 : 알겠읍니다. 그러나 저는 진아를 깨달은 뒤에야 그것을 이해할 수 있읍니다.

 

마하리지 : 진아는 항상 깨달아져 있읍니다.

깨달음이 앞으로 언제가 그대가 얻을 어떤 것이라면 그런 것은 또한 잃어버릴 가능성도 있읍니다.

따라서 그것은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겠지요.

일시적인 지복은 고통도 함께 따라옵니다.

그런 것은 영원한 해탈일 수가 없읍니다.

 

그대가 그것을 나중에 깨닫는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지금은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현재의 순간에 깨달음이 없다면 미래에도 언제든지 그것이 있을 수가 없읍니다.

왜냐하면 시간은 무한하니까요.

그래서 역시 그런 종류의 깨달음은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영구적이지 못하다면 그것은 깨달음이 아닙니다.

깨달음이 영구적이지 않다고 여기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것은 변할 수 없는, 참되고 영원한 상태입니다.

 

방문자 : 예, 저도 때가 되면 그것을 이해하겠지요.

 

마하리지 : 그대가 이미 그것입니다.

시간과 공간은 진아에 영향을 줄 수 없읍니다.

그것들은 그대의 안에 지금 있읍니다.

마찬가지로 그대가 주위에서 보는 모든 것이 그대의 안에 있읍니다.

이점을 잘 보여주는 이야기가 있읍니다.

 

한 여자가 귀중한 목걸이를 목에 두루고 다녔읍니다.

한번은 경황 중에 그것을 잊어 버리고 목걸이를 잃어버렸다고 생각했읍니다.

그녀는 걱정이 되어 집안을 뒤져 보았지만 찾지 못하였읍니다.

친구와 이웃들에게도 목걸이를 본적이 있느냐고 물었지만,

그들도 보지 못했읍니다.

마침내 한 친절한 친구가 그녀에게 목에 걸려 있는 목걸이를 만져 보라고 말헀읍니다.

그녀는 그것이 내내 자기 목에 걸려 있었다는 것을 발견하고 기뻐했지요.

다른 사람들이 나중에 잃어버린 목걸이를 찾았느냐고 묻자,

"예 찾았어요"하고 대답했읍니다.

그녀는 내내 잃어버린 목걸이를 되찾은 것처럼 느끼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그녀가 그것을 잃어버리기나 했읍니까?

그것은 처음부터 목에 걸려 있었읍니다.

그러나 그녀의 심정을 헤아려 보십시요.

마치 잃어버린 보물을 되찾은 듯이 기뻐합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언젠가는 나도 진아를 깨달을 날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들을 하지만,

우리는 누구나 결코 진아가 아닌 적이 단 한 순간도 없었는데 말입니다.

 

                                                        -라마나 마하리시와의 대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