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도덕경37장, 분별망상은 순수앎으로 덮어 누리시오.

2008. 9. 28. 21:15성인들 가르침/노자도덕경

 

 

 

[원문] <곽점 죽간본>

 

道恒亡爲 侯王能守之 而萬物將自化

도항망위   후왕능수지  이만물장자화

 

化而欲作 將鎭之以亡名之樸

화이욕작   장진지이망명지박

 

夫亦將智 智以靜 萬物將自定

부역장지   지이정 만물장자정

 

 

[해 석]- 곽점본

 

道는 늘 있는 그대로 이며,

억지 행위와 분별망상이 전혀 없는 것이외다. 

 

여러 제후들을 지배하는 대왕이 자기 권좌를 굳게 지킬수 있는 능력처럼,

(구도자가) 무위의 도를 굳게 지키고 있으면, 

만물은 문득 온갖 경계가 사라져서 자기와 일체가 되는 것이오.

 

이 일체 상태에서 분별망상이 일어나려고 할 때는,

즉시 이름없는 순수앎(樸)의 자각으로 덮어 누르시오.

이를테면 또다시 즉각적으로 알아차리는 것인데,

이 알아차림이 (분별망상을)고요하게 진정시키므로써 

만물은 문득 경계가 사라지며 자기와 일체가 되어 저절로 안정되는 것이외다.  

 

 

[해설]

 

이번 37장은 道 수행자가 구도 수행 중, 분별망상이 일어날 때에 전체적으로 주시하여 망상을 소멸시키는 방법을 간단하게 가르쳐 주는 내용입니다.

구도자 중에서도 비교적 높은 경지까지 이르렀으나, 아직 완전하게 절대바탕에 안정적으로 머무르지 못하고 있는 수행자들에게 충고하는 내용입니다.

구도자에게 불시에 불필요한 망상이나 분별행위가 일어나게 되면, 일어나는 즉시 배면의 무한한 앎으로 주시하여 즉각 자각함으로써 항상 순수한 일체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이번 해석은 왕필본이나 백서본에서는 글자들이 몇개 바꿔졌고, 불필요한 문장들이 삽입되어 있어서, 곽점본 원본을 중심으로 해석을 하였읍니다.

그러나 백서본이나 왕필본에서 곽점본과 다른 부분에 대해서는 별도로 해설을 붙혔읍니다.

나름대로 해석을 하다보니,

기존의 다른 주석서나 해석서들의 내용들과는 좀  다르게 해석이 된 것 같읍니다.

 

 

道恒亡爲 侯王能守之 而萬物將自化

도항망위   후왕능수지  이만물장자화

恒; 항상, 변하지 않고 늘 그러하다. 亡;망하다,잃다,죽다. 爲;하다,행위,생각.

侯;제후,임금. 能;능하다,능력. 이: (말을 잇다), 將; 문득. 化;되다,감화하다.따르다,없애다.

조화하다. 

道恒亡爲; 도는 항상 있는 그대로 이며,억지 행위와 생각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侯王(若)能守之; 여러제후들을 지배하는 제왕이 자기권력을 굳게 지킬수 있는 능력처럼(구도자가) 무위의 도를 올곳하게 지키고 있으면.

而萬物將自化; 만물은 경계가 사라져서 문득 저절로 자기와 일체가 된다.

 

[道恒亡爲] 道恒,은 <도는 항상 변함없이 그대로 있는 것이다>라는 의미입니다.

또한 <恒>자는 뒤의 <亡爲>가 언제나 변함없이 유지되는 것을 뜻하므로,

<항상 亡爲하다>라는 뜻도 포함됩니다.

<亡爲>는 <無爲>와 같은 의미라고 볼 수가 있읍니다.

즉 <亡爲>란 <의도적인 행위 또는 억지로 지어내는 행위가 없는 상태>를 의미하는데, 요즘 용어로 풀이하면 <나라는 에고관념>이 사라진 상태를 말합니다.

<나라는 생각, 또는 내가 있다는 느낌> 을 바탕으로 모든 생각과 에고의 지어낸 행위가 생기므로 이러한 <에고의 나>가 사라진 상태를 <亡爲>라고 표현했읍니다.

그래서 여기서는 현대인의 사고방식에 좀 적합하게 표현하기 위하여,

<亡爲>는 마음의 흐름인 생각(妄想)과 에고적인 의도된 행위가 사라진 것으로 해석을 했읍니다. 

 

백서본에서는,

<道恒無名>으로 되어 있는데,<도는 항상 이름이 없다>라고 직역이 되겠죠.

이뜻은 <도는 항상 아무런 경계도 없다>또는 <도는 무한하다>는 뜻이며,

의식적인 측면에서는<도는 항상 아무런 분별의식이 없다>는 의미로 해석해 읽어야 합니다.

 

왕필본에서는,

<道恒無爲 而無不爲>로 '而無不爲' 문장을 덧붙혀 놓았읍니다.

<도는 항상 억지로 하는 바가 없으며, 하지 못할 것도 없다>이렇게 해석이 되는데, 곽점본의 <亡爲>를 <無爲>로 바꾼 것은 뜻이 같다고 볼 수 있읍니다.

그러나 <而無不爲>를 덧붙힌 것은 본 37장의 문장전체 의미하고는 전혀 연관이 없는 불필요한 문장이 삽입된 것 같읍니다.

아마도 왕필본 필사자가 37장의 문장을 잘못 이해하여, 보완한다는 의미에서 후대에 덧붙힌 것 같읍니다만,전체 문장이 가르키는 의미와는 별 관련이 없는 구절입니다.

 

<侯王(若)能 守之>- <제후들을 지배하는 후왕이 자기 권좌를 굳게 지키는 능력처럼,구도자는 굳은 의지를 가지고 무위의 도를 지키고 있으면>이라고 해석이 됩니다.

<侯王>은 <여러 제후들을 지배하는 가장 높은 왕>을 말합니다.

여러제후들을 지배하는 왕은 자기의 왕좌와 절대권력을 뺏기지 않기 위하여 항상 빈틈없이 기민하게 정신을 차리고 있어야 하고, 나라전체의 유일한 주인으로써 절대권력을 지키고자 노력하겠죠.

이렇게 <侯王能>이란 <제후중에서 가장 강력한 왕이 절대권력을 굳게 지키고 있는 능력처럼>하고 비유법을 쓴 것입니다.

그런데 이문장에서 의미적으로(마치 왕과) "같다"는 의미의 <若>자가 중간에 생략되었기 때문에 오역할 수 있는 소지는 충분히 있읍니다.

그러나 백서본과 왕필본에 이 "같을<若>"자가 삽입되어 있어,이에 대한 한가닥 실마리를 붙잡을 수 있어서, 이것으로 대략 직감적으로 후왕의 능력을 비유한 것이라고 짐작할 수가 있었읍니다.

 

대부분의 해석서들은 직접 <만일 후왕이 도를 지킨다면>이라고 해석을 했읍니다.

그래서 기존의 해석서와 주석서들은 이문장에서 부터 방향이 좀 다르게 해석이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입니다.

즉 <만일 왕이 도를 지키므로서 천하를 도로써 제어하여 안정시킨다면> 이런 의미로 해석들을 했는데, 이렇게 해석하면 그 아래문장의 해석도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내용이 전개되는 것이죠.

 

후왕이 도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마치 제왕이 절대권력을 지키듯이, 구도자는 무념과 무위의 도를 굳게 지켜야 된다는 것이죠.

구도자는 작은 개체인 육체 동일시의 개인의식에서 벗어나서 의식적으로 전체세상과 하나가 되는 무위의 도를 후왕처럼 지키고 있으라는 말입니다.

 

이 37장에서는 이문장의 곽점본 문글자풀이만 가지고는 '같을<若>'자가 생략되어, 잘못 해석할 수 밖에 없는 아주 어려운 문장인데, 전체 문장 내용의 맥락을 완전히 파악해서 숙고해 보아야 이 문장의 정확한 숨은 의미를 파악할 수가 있읍니다. 

 

백서본,왕필본에서는,

<侯王若能守之> - <후왕이 마치 (절대권력을)지키고 있듯이, >

백서본과 왕필본에서는 그것을 이해하기 쉽도록 "같을"<若>자를 새로 삽입되었는데, 기존의 다른 해석서들을 보면, "만약 후왕이 이 도를 지킨다면"이라고 해석하여, 이 <若>자를 "만약"이라는 의미를 가진 가정법으로 해석한 것 같읍니다.

그러나 이 <若>자를 "후왕의 능력같이,구도자가 도를 지킨다."라고 비유법으로 해석을 하면, 제대로 전체 의미를 파악할수 있었을 텐데, 가정법을 써서 왕이 직접 도를 지킨다는 의미로써 해석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전체 37장의 내용이 완전히 다른  방향을 향하고 있는 것 같읍니다.

 

[而萬物將自化] - <만물이 문득 자기와 하나가 된다>이렇게 해석이 됩니다.

[구도자가 무념과 무위의 도를 오롯이 지키고 있으면, 삼라만상의 경계가 문득 사라지고 저절로 구도자 자신과 일체가 된다]라는 의미입니다.

쉽게 말해서 억지로 수행이라는 행위를 짓지도 않고, 생각도 전혀 없는 무념상태를 지키고 있으면, '나'라는 에고의식이 사라지고, 온갖 세상의 차별상이 사라져서 우주전체가 나와 하나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선불교에서 부처가 말하는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有我獨存)>-  이우주전체에 오직 나홀로 있을 뿐이다.- 하는 경지가 된다는 것이죠.

 

위의 세문장을 다시 쉽게 연결해서 풀어 보자면,

[도는 항상 있는 그대로이며, 억지 행위와 망상이 사라진 무념의 상태로서,

여러 제후들을 지배하는 제왕이 자기의 절대권력을 굳게 지키는 능력처럼,

구도자는 오로지 무념,무위상태만을 오롯하게 지키고 있으면,

우주삼라만상의 분별경계가 사라지고 문득 우주와 자기가 일체가 된다]라는 의미입니다. 

 

化而欲作 將鎭之以亡名之樸

화이욕작   장진지이망명지박

欲;~하기 시작하다, 막~될려고 하다.하고자하다. 作; 일어나다,일으키다.짓다,움직이다.

將;문득, 鎭;누르다,진정시키다.진압하다. 以; ~로써, 樸;꾸밈이 없다,순수하다.바탕.

 

化而欲作 ;일체된 상태에서 (분별망상이) 일어나기 시작하면,

將鎭之以亡名之樸 ; 문득 이름(경계)없는 순수앎으로써 덮어 진정시키면.

 

[化而欲作] - <만물과 일체가 된 상태에서 분별생각이 일어나려고 한다면>

<化>는 만물의 경계가 사라지고 나와 우주가 일체가 된 상태를 말합니다.

우주삼라만상의 다양한 분별경계란 육체의 감각작용이 그려낸 의식의 움직임인 변상들로써 분별의식입니다.

분별의식인 개인성을 초월하면 다양한 특성과 모양으로 경계가 구분되었던 만물들이 오직 동일한 하나의 모양도 없고,속성도 없는 순수의식일 뿐이라는 것을 깨치게 됩니다.

그 하나의 순수한 보편의식은 경계로 구분지어진 분별의식이 하나로 통합된 것이며, 움직임이 없이 고요하고,전체만물에 두루 편재되어 존재하는, 만물에게 공통된 우주적 보편(공통)의식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이상태가 우주전체와 나가 일체가 된 상태라고 합니다.

여기서 <化>의 상태는 이러한 경계가 사라진 순수한 보편의식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을 말합니다.

 

<欲作>은 "행위 또는 분별망상(생각)이 일어나기 시작한다"는 뜻입니다.

<作>은 "(행위를)지어낸다,(생각이)일어난다"라는 글자뜻이 있읍니다,

<欲>은 "~하려고 한다" 또는 "~일어나기 시작하려고 한다"라는 뜻입니다.

여기서는 "하나가 되어 고요했던 의식이 움직여서 분별경계가 나타나기 시작한다"는 뜻입니다.

좀 간단하게 표현하면  "분별망상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는 의미입니다.

전체와 일체가 된 고요한 순수의식이 움직이려고 한다는 것은 분별적인 경계를 만드는 개인의식의 망상이 나타나려고 꿈틀거리기 시작한다는 것이죠.

즉 "한 생각 또는 한 행위가 일어나려고 하는 순간"을 묘사한 것입니다.

 

[將鎭之以亡名之樸] 직역해 보면- <문득 이름없는 통나무로 진정시킨다>라고 해석할 수 있지만,

<亡名之樸>을 단순히 <이름없는 통나무>라고만 해석하면 확실한 개념이 무엇인지 이해하기가 어렵잖읍니까?

<亡名之樸>- 이름없는 통나무란, 이름도 모양도 없고, 속성도 없는, <순수한 보편의식>을 말합니다.

가공하지 않은 원시의 통나무는 전혀 사람의 손길을 타지 않은 순수함과 쪼개지지 않은 통짜 원목 그대로를 말하며, 이것은 순수의식을 통나무로 비유한 것입니다.

즉, 경계없고 순수하며, 전체에 두루 편재되어 모든 만물 속에 똑같이 하나로써 존재하는 보편의식을 말하는 것이죠.

 

이 보편의식이 모든 만물의 경계를 주시하는 배면의 주시자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경계있는 것들은 경계없는 바탕이 그 주시자라고 할 수 있읍니다.

백지 스크린 위에 그려진 모든 그림들은 백지 스크린의 바탕이 전체그림의 주시자가 됩니다.

그래서 분별의식이 일어날때에 주시자인 이 순수앎의 주시로 덮어 눌러서 진정시킨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선불교의 선사들이 흔히 말하는 <회광반조(回光反照) 하라>는 말씀과 똑같은 뜻입니다.

즉 배면의 무한한 순수앎의 주시자 입장에서 되비춰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일어나는 분별의식을 순수한 보편의식인 주시자입장에서 되비춰보면 저절로 잠시 나타나던 경계의 분별의식이 전체 보편의식의 빛속으로 그대로 흡수되어 또다시 경계가 사라진 고요한 마음이 되는 것이죠.

 

통상 깨달은 스승들이 <주시하라>하는 말씀은 이러한 내면을 통해서 전체적으로 주시하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전체성의 내면으로 되비쳐 보는 주시를 하려면, 단순히 앞의 대상을 개인의 시선으로 쳐다보는 행위가 아니라, 전체성의 주시자 입장에 확고하게 자리잡고 있어야 옳바른 주시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주시한다>는 것은 보통사람들이 지나가는 대상을 관찰하듯이 그렇게 개인이 의도성을 가지고 지켜보는 것이 아니라, 일단은 자신이 전체성의 주시자입장인 앎자체가 되어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자신이 분별성과 개체성이 사라진 전체성의 순수한 앎이 되어 자연적으로 모든 것이 보여지는 자연주시상태를 깨달음법에서는 <저절로 주시된다>라고 말하고 있읍니다.

이것이 구도자들이 확보해야 할 특별한 관점으로 보는 것이며 <전체성의 입장에서 보는 것>이고, 보통 개인이 무엇인가 대상의 움직임을 관찰하는 주체와 대상이 갈라진 이원적인 봄과는 전혀 다른 양상입니다.

소위 <보되 보지 않는다>라는 말로 표현되기도 합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鎭之以亡名之樸]은, <순수의식(통나무)으로 눌러서 진정시킨다>라는 뜻이지만, 

<순수의식으로 되비쳐 본다> 또는 <회광반조(回光反照)한다>, <내면을 본다> 

<전체적으로 주시한다> 등등의 말과 다른 의미가 아닙니다.

 

백서본과 왕필본에서는,

[吾將鎭之以無名之樸]으로 나<吾>자를 앞에 삽입했는데, 곽점본의 문장에는 없는 것을 삽입해서, 오히려 다른 문장은 "나"와는 관계 없고,왕이 주체가 된 듯한 문장으로 후세사람들이 오역할 소지를 준 것 같읍니다.

따라서 이 "吾(나)"라는 글자는 해석하는데 오역할 소지만 있을 뿐,불필요하게 삽입한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무시했읍니다.

참고로 곽점본에서는 화자(話者)가 노자이며, 불특정 구도자를 상대로 도수행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는 것이므로 "주어"가 전체적으로 생략되어 있는 문장입니다.

그러나 전체 주어가 "나(吾)라고 해석해도 그렇게 틀리지는 않겠지만, 이 문장만 "나"가 주어로 들어가면, 전체적인 문장구성이 어색하게 변해 버립니다.

 

夫亦將智 智以靜 萬物將自定

부역장지   지이정 만물장자정

夫;대저,다시,남편,사내. 亦; ~도역시,또, 또한, 智(知); 알다,깨치다.알게되다,드러나다.

靜; 고요하다,깨끗하다. 定;안정시키다,머무르다,편안하다.평정되다,바로잡다.

 

夫亦將智; 또다시 문득 알아차리게(자각) 되는데,

智以靜; 그 알아차림은 고요함이 되어

萬物將自定; 만물은 즉시 경계가 사라지고 저절로 안정되게 머무르는 것이다. 

 

[夫亦將智]에서, <夫>는 "다시", <亦>은 "또" , <將>은 "문득"이라는 글자 뜻으로 해석해서,

<夫亦將>은 <또다시 문득>이라고 말을 잇는 문장입니다.

여기서 "또다시"라는 반복어는 "맨 처음에 경계없는 일체자각상태"로 다시 되돌아 간다는 것을 가리키는 접속어입니다. 

<智>는 "깨친다, 알아차린다" 또는 "자각한다"라는 뜻입니다.

즉, < 또 다시 문득 알아차린다, 또다시 문득 자각한다>는 뜻이죠.

 

처음에 전체와 일체가 된 고요한 마음상태에서 한생각의 분별망상이 갑자기 일어나기 시작할 때에, 즉시 모양도 없고 속성도 없는 무한한 순수의식의 앎으로 되비쳐서 눌러버린다. 그러면 또다시 이전의 원래상태를 즉시 알아차린다.

즉 맨처음의 自化(만물이 자기와 일체가 된 상태)상태로 되돌아 간다는 것입니다.

 

[智以靜]은, <이 알아차림(자각)이 고요함으로 되어>라고 해석이 되겠죠.

즉시 자각하는 것이 바로 마음이 고요해진 상태라는 것입니다.

전체가 하나상태에서 망상이 일어나려고 할 때에, 그 즉시 깨어서 전체로써 알아차리면, 곧바로 고요한 순수의식의 원래상태로 회복된다는 것이죠.

 

위에서 말하는 <알아차림,자각(自覺)>이라는 용어는 자기가 자기를 자각하는 순수자각상태를 말합니다.

보통 자기를 대상으로 인식하는 것을 자기인식 또는 자각이라고 부릅니다만,

자기가 자기자신을 완전히 인식한다는 것은 아는 자기와 알려진 자기가 일체가 되어, 아는자와 알려진 자가 둘다 사라진 일원화 상태를 말합니다.

인식주체와 대상이 하나가 되어, 하나 마저 사라진 상태를 말하는데,

이 상태를 순수자각 또는 일원적인 상태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 '알아차림'이란 안다는 느낌조차 없는 상태이며, "순수자각"이라고도 하고, 

"말없는 알아차림" 또는 "모르는 앎", "전체적인 자연주시상태"라고도 합니다.

 

보통사람이 "나는 나를 안다, 또는 자각한다"라고 말한다면, 그 경우는 위에서 말한 순수자각상태와는 다르고, 단순히 육체의식적인 자기인식상태이며,

이경우는 보는 자와 보이는 자가 따로 따로 분리된 이원화 상태라고 볼 수 있읍니다.

즉, 아는 자도 있고, 아는 대상도 남아 있는 보통 이원화로 분리된 개인의식상태입니다.

만일 자기자신과 전체(우주포함)가 합쳐져서 일원화 자각할 때는 "나"와 전체 만물의 경계가 모두 사라져서 아무것도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萬物將自定]- 직역하면 <만물은 문득 스스로 안정된다> 라고 해석할 수 있지만,

좀 더 상세하게 설명을 더 붙히자면,

<우주삼라만상의 경계가 사라지면서 저절로 자기와 일체가 되어 안정된다>

이렇게 해석이 됩니다.

망상이 일어날 때에는, 그것을 전체적으로 자각하면,

곧바로 마음이 고요해져서, 맨처음 원래상태로 되돌아와 모든 삼라만상의 경계가 사라지는 일체상태가 되어 저절로 안정된다는 뜻입니다.

 

백서본은,

[夫將不欲 不欲以靜 天地將自正]이라고 '夫將不欲'이 한문장 더 삽입되어 있읍니다.

해석을 해 보면, <다시 문득 망상이 일어나지 않으며, 망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고요함으로써, 천지가 문득 스스로 옳바르게 된다>

그러나 다른 해석서들은 이렇게 해석하지 않고 있읍니다.

 

왕필본은,

[無名之樸 夫亦將無欲 不欲以靜 天下將自定]으로 해석해 보면,

<경계없는 순수의식은, 또 다시 문득 망상이 일어나지 않으며, 망상이 일어나지 않음은 고요함이 되어, 천하가 저절로  안정된다> 이렇게 해석이 됩니다.

그러나  다른 해석서들은 이렇게 해석하지 않고 있읍니다.

 

이번 37장까지가 백서본에서 분류한 道經입니다.(道二千四百二十六)

다음 38장부터는 德經이라고 하는데, 사실 내용적으로 엄밀하게 도경과 덕경이

분류된 것은 아닌 것 같읍니다.

道經 속에 德에 관한 내용도 있고, 德經 속에 道의 요체에 대한 것도 많이 있읍니다. 

 

본 노자도덕경 해설 내용은 기존의 다른 해석서들과는 좀 달리,

道의 순수한 구도측면에 중점을 두고서, 주로 구도 열망자나 정신수행을 공부하는 분들을 대상으로 구도공부에 참고할 수 있도록  해설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따라서 구도에 별 관심이 없는 일반 지식인들이 읽을 경우는, 기존의 다른 해설서들과는 좀 다른 관점에서 해석하고 있기 때문에, 몇몇 특별한 어휘나 특정한 관점에서 다루고 있는 해설내용에 대해서 다소 생소하거나 심지어 거부감마저 일어날 수도 있을지 모르겠읍니다만, 이글을 쓰는 이는 가능하면 노자의 원래 무위적인 도의 관점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심혈을 기우리고 있으므로, 이점 감안하시고   이해하시면서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무한진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