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도덕경23장, 도는 있는 그대로 일체가 되는 것이다.

2008. 7. 10. 11:07성인들 가르침/노자도덕경

원문]-백서본

 

希言自然

희언자연

飄風不終朝  暴雨不終日

표풍부종조          폭우부종일

孰爲此?

숙위차

天地而不能久  又況於人乎 !

천지이불능구           우황어인호

 

故從事而道者  同於道

고종사이도자          동어도

德者 同於德

덕자    도어덕

失者 同於失

실자    동어실

同德者 道亦德之

동덕자     도역덕지

同於失者 道亦失之

동어실자       덕역실지

 

[해석]

 

말이 그친 고요함(道)은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이외다.

 

회오리 바람은 아침내내 몰아치지 못하고,

소나기도 온종일 �아 붓지는 못하오.

 

누가 이러한 변화를 일으키겠소?

하늘과 땅조차도 오래동안 가만히 있지 못하거늘,

하물며 사람에게 있어서야 !

(어찌 바위처럼 움직임없이 머물러 있을 수가 있겠소?)

 

그러므로

일상적인 일을 하고 있는 도인은 ,

그일을 하면서 道와 일체가 되고.

 

일상적인 일을 하고 있는 순수의식을 지닌 덕인은,

그일을 하면서 의식(德)과 일체가 되며,

 

일상적인 일을 하고 있는 도와덕을 잃어버린 무지한 사람은,

그일을 하면서 無知(失)와 일체가 되오.

 

이렇게

일상사와 의식이 일체가 된 상태에서는

道 역시도 그 일체가 된 의식인 것이며,

 

일상사와 無知가 일체가 된 상태에서도,

道 역시 그 일체가 된 無知인 것이외다.

 

 

 

[해설]

 

이번 23장은 전체적으로 어려운 문장은 없읍니다만,

왕필본 원문은 많이 개작되어 있어서 백서본 원문을 가지고 해석했읍니다.

그러나 백서본도 원래 발굴시 원문엔 내용중에 德者로 되어 있는 것을 전문학자들이 得者로 바꿔서 해독하여 주석해 온 전통을 무시하고,

그대로 발굴당시 원문인 德者로 해석을 했읍니다.

 

기본 내용은,

말이 그치는 절대본체의 침묵상태는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이지, 억지로 되는 것은 아니라고 전제한 다음,

천지간 자연의 움직임을 회오리 바람과 폭우를 예를 들어가며,

천지의 언어인 자연의 움직임도 계속 이어지질 못하는데,

하물며 인간이야 어떻게 도의 본체인 절대침묵상태로 억지로 가만히 있을 수가 있겠느냐?고 넌즈시 말하고 있읍니다.

 

그러므로 평상시 평범한 일상 활동이 바로 도 그자체라는 것인데,

일상사가 道가 되려면 그것과 일체가 된 상태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상사를 하면서 도를 체득하는 방편으로 두가지 방법을 제시하고 있읍니다.

첫째는 일상적으로 하는 일이 德, 즉 의식자체라고 여기며, 의식과 일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일상사와 일체가 되면 일과 자기도 잃어버리며(失),  전체 잃어버림 상태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일상사와 의식이 일체가 되면 도는 저절로 그 일체의식이 된다는 것이죠.

또 일상사와 일체상태에서 모든 것을 잃어버리면, 도는 저절로  일체의 잃어버림  그 자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도덕경에서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억지로 구도 수행을 한다고 일상적인 활동은 안하고 절대 도의 본체상태인 침묵속에서만 그대로 유지 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일상 평범한 활동 속에서 자연스럽게 저절로 활동과 일체가 되어 무아상태에 있는 것이 道라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주석서와 해석서들은 23장 후반부의 해석에 있어서

위에서 언급한 일상생활에서의 활동에서 자연스럽게 일체가 되는 것이 道라는 내용과는 전혀 다르게 해석들을 하고 있읍니다.

그래서 백서본의 德자를 得자로 바꾸어 주석한 부분과 왕필본의 원문개조및 해석들에 대하여

개인적인 제 나름대로의 관점에서 약간의 비판적인 해설을 좀 붙혀 보았읍니다.

 

希言自然; 말없이 조용해지는 것(道)은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이다.

希; 고요하다,조용하다.바라다,드믈다,적다. 然; 그러하다.허락하다.당연하다.

希言; 말(움직임)이 그치는 것은~ .

自然; 있는 그대로 그러하다.저절로 그러하다. 저절로 당연하다.

말이 없어지고 고요한 침묵상태가 되는 것은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言(말)이라는 뜻은 사람이 입으로 하는 언어,생각,행동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자연의 모든 움직임과 흐름,변화를 자연의 언어로 여겨서 言자로 묘사한 것이죠.

 

또한 希言自然을 또 다른 측면으로 해석할 수도 있읍니다.

즉, -움직이고자(말하고자) 하는 것은 저절로 그러한 것이다.-

希言은 말(움직임)을 하고자 원하는 것, 으로 해석할 수가 있읍니다.

그러나 이 다음 문장인 회오리 바람과 폭우가 결국은 잠잠해 진다는 내용과 맞추려면 '말이 적어져서 고요해진다'는 내용이 더 적절할 것 같아서 "말이 없다"는 의미로 해석을 했읍니다.

 

움직임 자체도 저절로  움직이는 것이고, 고요해져 움직임이 없는 것도 저절로 그렇다는 것이죠.

그래서 자연이라는 단어자체가 요즘은 아예 명사가 되어 있지만, 그원래 뜻은 있는 그대로 인의적인 것이 없이 저절로 그러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어떤 특정 주체에 의해서 억지로 움직이고 침묵하는 것이 아닌 것이 자연이라고 합니다. 자연은 바로 道자체이며, 그것은 있는 그대로, 저절로 그렇게 된다는 것이죠.

希言이란 "말이 그친 침묵상태"라고 이해해도 되지만, 자연의 말이라는 것은 삼라만상의 변화되는 움직임자체를 의미하므로 <움직임이 없는 고요함은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이다.>라고 해석이 되는 것이죠.

또한"움직이고자 하는 경향성은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이다."라는 뜻도 있읍니다.

한마디로 현상세계의 움직임과 그침은 어떤 주체가 없이 저절로 그렇게 변한다는 말이죠.

이 <希言自然>이라는 도입부 첫문장은,

道라는 것은 억지 수행행위로 되는 것이 아니라, 일상활동에서 자연스럽게 도와 하나가 되는 방편을 설명하기 위해서 제시한 이23장의 핵심주제입니다.

 

사람의 육체가 나타나서 잠시 머물다가 사라지는 것도 저절로 그러한 자연 움직임의 극히 미세한 일부분이죠.

 

飄風不終朝; 회오리 바람도 아침내내 몰아치지 못한다.

飄; 회오리 바람,몰아치다. 終;마치다,끝내다, 朝; 아침

회오리 바람이 몰아친다는 것은 자연의 움직임이고, 이것이  바로 위에서 묘사한 자연의 말(言)이죠.

자연의 언어도 아침을 넘기지 못하고 잠시동안의 일시적인 움직일 뿐이라는 묘사입니다.

회오리 바람이라는 자연의 움직임도 어느 한때에 몰아치다가는 이내 항상 있는 그대로의 자연의 침묵 속으로 저절로 사그러진다는 의미죠. 

사람이 태어나서 세상에 머물다가 이내 사라지는 것도 회오리 바람이 잠시 몰아치다가 사라지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읍니다.

 

暴雨不終日; 폭우도 하루종일 �아 붓지 못한다.

暴雨; 거센 비바람, 

폭우도 하루종일 �아 붓지 못한다.는 뜻은 자연의 언어인 폭우조차도 잠시 지나가는 일시적인 자연의 현상(언어)일 뿐이라는 것이죠.

이내 항상 있는 침묵속으로 사라진다는 말입니다.

즉 자연의 언어인 움직임으로 변화되는 모든 현상은 저절로 그렇게 생겨 났다고 저절로 자연의 침묵 속으로 사라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묘사한 문장입니다.

 

역시 사람의 일생도 잠시 이 현상계에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전체 현상계안에서 일어나는 일부분의 변화이며, 여름날 오후 잠깐 스쳐지나 가는 소나기와 같은 일시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이 아닐까요?

 

孰爲此?누가 이렇게 만드는가?

孰; 누구,어느,무엇,무르익다. 爲; 하다, 此; 이,이에 

누가 이렇게 변화시키는가? 하고 변화시키는 주체에 대하여 묻는 것이죠.

자연의 움직임 언어가 침묵속으로 잠기는 그 변화를 주도하는 것은 누구인가? 하고 묻는데,

이 물음에 대한 답변은 이23장 맨처음에 나온 "希言自然"인 "자연의 침묵은 저절로 그러한 것이다"라고 맨 첫번째로 주제로 답을 올려 놓고,

그것에 대한 이 의문태를 그 뒤에 배치하여,

자연의 침묵은 그움직임 자체가 저절로 그렇게 된다는 사실을 재강조한 것입니다.

즉, 그 움직임을 주도하는 주체는 아무도 없고, 움직임 자체가 저절로 그렇게 말이 없는 침묵 속으로 스스로 사라진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왕필본의 필사자는 여기에 또 답을 임의로 추가 삽입해 놓았읍니다.

熟爲此者? 天地.라고 덧붙혀 놓았읍니다.

이 "천지"라는 답은 이 문장에서 전혀 불필요하게 붙힌 것이죠.

왜냐하면 맨위에 "희언자연"에서 " 침묵은 스스로 움직임 자체가 그렇게 되는 것"이라고 전제했는데,

그것을 재강조하기 위해서, 회오리 바람과 폭우라는 자연현상인 천지의 언어를 실례를 들고나서 이를 다시 한번 강조하기 위해서 의문태를 사용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천지"라고 또 답을 붙히는 것은 아무 주체도 없이 움직임 자체가 "저절로 그러한 것"이라는 맨 앞의 전제조건이 분명히 있는데도,

"천지"라는 주체를 말해버리므로써,

 "저절로 그러한 것"에 대한 의미를 희석해 버리는 묘사가 되어 버렸읍니다.

"저절로 그러한 것"이라는 의미는 어떤 변화시키는 특정한 주체가 없다는 의미이고, 천지라는 것은 세상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인데 마치 천지가 주체인 것처럼 답을 써 놓은 것이죠.

 

따라서 왕필본에서 추가 개조된 문장들이 전체 백서본 문장의 원래 의도된 뜻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필사자가 이해할 수 있는 범위로 몇구절을 뜯어 고친 것이 해석하기에 애매한 점이 있어서 백서본의 원문을 선택한 것입니다.

 

天地而不能久; 하늘과 땅조차도 (이렇게) 오래동안 가만히 있지 못하거늘,

能;능히 할수있다. 久; 오래다,오래 머므른다.

-하늘과 땅조차도 (이렇게) 오래동안 고요하게 있지 못하는데-,

이문장에서 하늘과 땅조차도 그 주체가 없이 저절로 움직인다는 것이죠.

하늘과 땅이 쉬지 않고 변하는 그 현상은 변하지 않는 것(道)안에서 나타나는 것이겠죠?

 

又況於人乎 !; 하물며 사람에게 있어서야 ! (침묵으로만 가만히 있을 수가 있겠는가?) 

又; 또,또한. 況;하물며,상황,형편,모양. 於; 어조서(에, 에서), 乎; 감탄사(그런가) 

천지조차도 한나절을 가만히 침묵으로 있지를 못하는데, 사람이야 어떻게 계속 말이 없이 침묵만을 유지 할수가 있겠는가? 하고 탄식 비슷하게 강조하는 것이죠.

즉, 아무리 절대 궁극의 본체에 자리잡은 도인이라도 절대 침묵속에서 가만히 도의 본체상태에만 있을 수가 없는 것이죠.

그리고 억지로 수행만 한다고 해서 자연스러운 도에 이를 수가 있는가?라는 물음도 될 수가 있읍니다.

그러하기 때문에  맨 첫문장인 希言自然인 "말이 없음은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이다"라고 묘사한 것입니다.

즉, 아래문장에서 이야기 할, 평범한 일상생활의 활동 속에서 저절로 도와 함께 해야 된다는 내용을 말하기 위해서, 하물며 사람이야 억지로 도를 취득할 수가 있겠는가? 자연스럽게 도와 함께 살아야지,라고 말하고 있는 것과 같은 뜻입니다. 

 

사람이 살아 있는 것,그 낼름거리며 타오르는 생기의식의 불꽃 그자체는,  

태어나기 이전과 죽음이후의 상태와 같은  생기불꽃이 없는 영원한 바탕,

그 불꽃의식과는 전혀 다른 순수바탕 위에서,

잠시동안 타오르다 이내 저절로 꺼져버리는 일시적인 불꽃과도 같다고나 할까요?  

 

故從事而道者,  同於道;

그러므로 일상적인 일을 하는 이가 도인이면

일상사(日常事)가 道와 함께 一體가 되는 것이오. 

 故; 그러므로, 從; 쫏다,나아가다,일하다,따르다. 事; 일,업무. 者; 놈,사람,~이라는 것.

從事; 일하는 것, 생업을 하는 일, 직업생활을 하는 일.日常事

보통 일상적으로 먹고 살기 위하여 일하는 것,생업을 하거나 자기 직업생활을 하는 日常事를 여기서는 從事라고 묘사했읍니다.

 

여기서 대부분의 주석서나 해석서들이 "도를 추구하는 일에 종사하는 사람"으로 주석과 해석들을 했읍니다만, 이렇게 해석하면 원래 전달하고자 하는 메세지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는 것 같읍니다.

글자 나열 순서대로 읽으면 표현 그대로 의미가 전달이 되는데, 문장을 거꾸로 읽어서 해석을 함으로써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가 전혀 다르게 표현됩니다.

 

글자 그대로 읽으면,

<그러므로 일하는 것이 道라고 하는 것은, 그 일하는 것 자체와 道가 하나가 되는 것이다.>

道者라는 말은 道人이라는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도라고 하는 것은> 이라는 뜻으로 해석해야 문장이  제대로 구성이 되는 것 같읍니다.

道者는 <道라는 것은~,도이며,>

 

또 同於道는 (從事而)同於道, 로서 읽어야 됩니다.

따라서 다시 생략된 문장을 제대로 다시 붙혀 보면,

故從事而道者, (從事而)同於道, 와 같이 풀어 놓아야 제대로 해석이 될 수가 있는 것이죠.

-그러므로 평상시에 일을 하는 것이 道라고 하는 것이며, 그 일상사가 道로써 하나가 되는 것이다.-

 

이 말은 평상적인 일상생활을 하면서 일하는 것이 바로  道라고 하며,

그 일상사 와 도는 같은 하나가 된다는 것이죠.

이세상과 일상적인 생활전체가 바로 도에서 나온 도의 작용 그자체입니다.

그래서 도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면, 모든 일상사가 도 아닌 것이 없는 것이죠.

그 모든 세상 움직임과 도와 하나가 되었을 때에 모든 것이 일체가 된 도인이 되는 것이죠.

 

여기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사람으로써 도인은 움직임없는 절대본체의 삼매상태에 꼼짝않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일상적인 활동 자체가 도와 함께 한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해석서들은 이 부분의 문장을 "그러므로 도에 힘쓰는 자는 도와 하나가 된다"라고 해석을 해서 從事而 道者를 "道에 관계된 일을 하는 사람 또는 수행자"로써 묘사하고 있지만,

그러한 道를 수행하는 일이 아니라, 평범한 일상사 또는 자기 직업활동에 종사하는 일 자체를 말합니다.

일상적인 활동자체가 바로 道라는 말씀입니다.

道라는 바탕이 없으면 일상활동이라는 것조차 있을 수가 없읍니다.

 

 

왕필본은 이문장을 좀 개조해서 다르게 오역할 수 있는 소지를 더 만들었읍니다.

왕필본-故從事於道者  道者 同於道.

-그러므로 도를 따르고 섬기는 사람은 도와 함께 한다-

이렇게 해석하게끔 아예 글자를 바꾸어 버렸읍니다.

故從事而道者를 而자를 於자로 바꾸고, 원래는 從事而가 생략된 자리에 道者를 삽입해서 완전히

-道人은 道와 함께 한다-라는 뜻인데, "일상사가 도"라고 하는 중요한 의미가 빠져 있읍니다.

 

왕필본의 한문원문이 백서본에 비해서 너무 개작되어 있어 정확한 뜻을 해석할 수가 없어서 이번 23장은 백서본 원문을 채택했읍니다.

그러나 기존 백서본의 원문도 주석가들이 원래 德자를 得자로 해석해서 읽으므로서 모든 해석서들이 이것을 따라가서 전체가 완전히 원래 백서본의 의미와 다르게 해석을 하고 있읍니다.

여기서는 주석가 들이 德자를 得자로 읽은 것을 무시하고 그대로 德자로 고집해서 해석해 보겠읍니다.

    

德者 同於德;

일상적인 일을 하는 이가 순수의식의 지닌 덕인이면,

일상사가 의식으로써 일체가 되는 것이오.

德;크다,덕,은혜,의식 同;한가지,하나,같다,함께,일체

德者; 덕(의식)이라는 것,

德者 同於德을 제대로 읽으려면 위의 從事而 가 생략된 것을 앞에 덧붙혀 읽어 보아야 합니다.

(從事而)德者  (從事而)同於德, 이렇게 생략된 문장을 붙혀 보면,

<일하는 것이 덕(의식)이라는 것은, 일하는 것이 덕(의식)으로써 하나가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직역이 되는 것이죠.

 

여기서 德이라는 것은 道의 본체에서 나온 작용,그자체를 말하는데 그것이 바로 의식이죠.

태양이 道의 본체라고 비유해 보면 태양에서 직접 뻣쳐나온 햇빛이 도의 직접적인 작용이며, 그것은 바로 순수한 의식을 말합니다.

따라서 德行이라는 것은 절대본체에 든 도인의 행동과 말을 말하며, 전체가 하나가 되는 순수한 의식에서 나온 행실과 말을 말합니다.

도덕경에서 德이라는 것은 이러한 도의 직접적인 작용으로써 순수한 보편적 의식작용을 말합니다.

 

그래서 이 문장에서도 일하는 것이 보편적 순수의식자체가 되면 일하는 것이 의식으로써  일체가 된다는 것이죠.

일자체가 의식이고, 세상자체가 의식이며, 모든 것이 의식이므로 전체가 의식자체로써, 하나의 보편의식안에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백서본이 발표되면서 최초의 주석가들이 이 德자를 得자라고 읽어서 발표를 했읍니다.

그 이유는 뒤에 나오는 失者 때문인데, 失者를 해석하기가 무슨 의미인지 잘 파악할 수가 없으므로, 그 이전에 있는 德者를 得者로 읽어야지 전체적으로 해석이 조화가 맞는다는 일부학자들이 주장을 한 것 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석과 해석은 도의 수행체계에 대해서 무지한 학자들이 문장의 구조적인 측면에서만 해석하려다 보니 失과 반대되는 得으로 德자를 임의대로 수정해서 읽은 것이죠.

 

從事而得者 從事而同於得- 을 가정해서 해석해 보면,

대부분의 해석들은 -얻음에 힘쓰는 자는 얻음과 하나가 된다-라고 해석을 하고 있읍니다.

 

이렇게 해석되는 내용은  원래 백서노자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와는 그 의미상으로 너무나 거리가 떨어져 있읍니다.

따라서 백서본 발견초기 주석가들이 주장하는 德者를 得者로 읽어서 해석하는 것은 전혀 잘못된 주석이라고 제 나름대로 주장하고자 합니다.

 

그런데 왕필본은 이문장은 다르게 개조하지 않았읍니다.

德者 同於德,이라고 변형하지 않고 유지했읍니다.

왕필본 해석서들을 보면,

-덕을 따르고 섬기는 사람은 덕과 함께 하게 된다.-

이말은 -德人은 德과 하나다.- 라는 뜻으로,

이 해석문만 가지고는 전달하고자 하는 핵심이 무엇인지 애매모호합니다.

德을 따르는 사람이 德人이고, 그자체가 德인데, 德과 하나라는 말이 필요없는데,

하나마나 한 말을 계속 반복한다는 것은 어딘가 해석이 잘못되었다는 것이죠.

 

失者 同於失;

일상적으로 일하는 이가 무지한 사람이면,

일상사와 무지한 에고가 일체가 되는 것이오.

失;잃다,잊다.없어지다.그르치다.벗어나다.

이문장도 앞서 생략된 從事而를 붙혀서 해석해 보겠읍니다.

(從事而)失者, (從事而)同於失,

일하는 것 자체를 잃어버린다는 것은,

일하는 것이 잃어버림과 함께 일체가 된다는 것입니다.

일에 몰두해서 나가 사라지면 그것이 바로 몰아(沒我) 또는 무아(無我)상태죠.

 

즉 일하는 활동과 하나가 되어 자기라는 에고와 일자체가 일체가 되는 몰입속에서는 일과 나라는 자아가 둘다 사라지는데, 그것이 바로 전체가 일체가 된 상태입니다.

그렇다고 어떤 단편적인 일부분에 집중해서 자신을 상실하는 상태가 아니라, 자신과 전체 현상계가 하나가 되는 상태를 말합니다.

 

失이란 道와 德을 잃어버린 무지(無知)상태인데, 그 무지상태란 개인 에고의 상태를 말합니다.

그 무지상태와 일체가 된다는 것은 자기 자신(에고)조차 잃어버린 상태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상태는 자기자신을 일 속에 몰입하여 자아를 잃어버린 상태라고 볼 수가 있읍니다.

 

여기 23장에서 가장 파악하기 어려운 글자가 이 失(잃다)라는 글자입니다.

그래서 백서본 발표초기에 노자도덕경의 전문연구학자들이 失자의 해석을 도저히 파악을 할 수가 없으므로, 위의 德자를 아예 得자로 바꿔서 읽으면서,

得과 失이라는 반대되는 단어를 만들어 이 23장을 주석을 한 것이죠.

 

그러나 이 失자는 도와 덕을 잃어버린 무지한 보통 개인의식 상태이지만, 

일하는 활동과 완전히 일체가 되어 일과 자신마저 잃어버리는 전체적 몰아(沒我)상태 또는 무아(無我)상태를  同於失이라고 묘사한 것입니다.

사람이 일을 하면서 "나"라는 에고가 없이 일상일을 한다면 개체성이 없는 전체성이 되어 바로 그것이 道상태죠.

그래서 同於失이란 일에 몰두하여 "에고적인 자아"가 사라진 상태인 전체적 "無我상태"라고 보아야 합니다.

즉, 의식의 바탕상태가 "에고적 자아"가 사라진 상태입니다.

 

 

다른 해석서는 - 잃음에 힘쓰는 자는 잃음과 하나가 된다-이렇게들 해석을 했는데, 잃음을 힘쓰는 자가 어떤 상태인지 애매하죠.

잃음과 얻음이라는 이원적인 현상들에 힘을 쓴다는 것은 자연적인 도와 저절로 일체가 된다는 맨첫문장의 주제와도 맞지가 않읍니다.

 

또 이부분의 왕필본 해석서들을 보면,

-(도와 덕을)잃어버리는 사람은 그 잃어버림과 함께 하게 된다.-

도와 덕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결국 에고적인 자아상태라고 볼수 밖에 없죠.

따라서 위와같은 해석은 전체적으로 전혀 앞뒤의 흐름도 맞지 않고, 의미적으로도 타당한 곳이 하나도 없읍니다.

 

왕필의 주석을 보면 잃어버림은 지식이나 소유를 많이 쌓는 것을 의미한다고 주석을 했읍니다.

많이 쌓이면 잃게 되므로 "잃어버림"이라고 해설을 하고 있읍니다.

또 얻음이란 (의도적인) 행위를 적게 한다고 하며, 의도적인 행위를 적게 하면 얻기 때문에 "얻음"이라고 주석을 했는데, 이야말로 억지로 의미를 반전시켜서 해석하는 것이고,

더우기 德자를 得자로 잘못 읽은 상태를 억지로 꿰어 맞추기 위한 의미 재창작에 지나지 않는 해설일 뿐이죠.

왕필본은 이러한 부적절한 주석을 하고 있으며,의도적으로 자기나름대로 해석을 맞추기 위하여 다음 구절에서는 다른글자를 더 삽입해서 내용을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바꾸어 버린 것이죠.

다음구절에 가서 자세히 살펴 보겠읍니다.      

 

同德者 道亦德之;

일상적인 일을 하는 것과 의식이 일체가 된 사람은

道 역시 일체의식 그 자체와 하나가 된 것이오.

亦; 또한,~역시

일상사와 덕이 하나가 되면 道 역시 덕과 하나가 된다.는 의미로써 다시 말하면,

일상사와 의식이 하나가 되면 도 역시도 의식과 일체가 된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之는 "하나(同)또는 같음, 일체"을 가리키는 지시대명사입니다.

즉, 사람이 하고 있는 일자체와 그사람의 의식이 하나가 되면, 일하는 것 자체가 道 그자체라는 말입니다.

 

일하는 것- 전체의식- 道, 이세가지가 일체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맨 위에서 말하는 "希言自然(말없는 것은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이란 억지로 침묵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일상적인 일을 하면서 그 의식과 하나가 됨으로서 자연스런 도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라는 말씀이죠.

道와 德, 도와 의식이 다른 것이 아닙니다.

의식은 도의 작용이므로 의식이 순수해지면서 의식의 근원 속으로 합일되어 사라지면, 그것이 바로 도라는 것이죠.

 

도의 작용인 德이란 여기서는 보편적인 의식을 말합니다.

전체가 하나되는 의식의 기본형태를 말하는데, 개인의 마음이 아니라,

개인마음을 넘어선 주시자 의식을 말합니다.

보통 존재의식이라고도 하며,경계가 사라진 空의식이죠.

이 기본의식은 모든 의식의 중심에 있는 씨앗의식이라고 볼 수가 있읍니다.

德이라고 한다면 德중에서 가장 높은 上德에 해당됩니다.

도의 본체인 절대상태와 개인의식 사이에 완충중간지대에 해당하며

절대본체와 비슷해서 일원적이지만, 의식이기 때문에 절대본체는 아니고,

의식이지만 개인의식을 넘어선 보편의식이라고 합니다.

이 절대본체 이전 상태인 보편의식 상태에서 일상사와 하나가 되면

도의 절대본체에 도달된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주지해 보아야 할 것은,

도자체는 일원적이어서,이원적인 말과 마음이전이므로 어떤 행위,글이나 말로도 접근이 불가능하죠.

사람이 언어로써는 도에 직접 접근할 수 없을 뿐더러 어떤 수행행위로도 직접 도달하지 못합니다.

마치 개가 벌겋게 달아오른 무쇠솥의 바닥을 혓바닥으로 할트려고 하지만 도저히접근할 수가 없듯이, 도에는 어떤 말과 행위로도 접근할 수가 없읍니다.

그래서 이글에서는 일상일을 하면서 도와 하나가 되는 접근방법을 두가지로 제시했읍니다.

첫째는 일상일하는 것과 德, 즉 전체의식이 하나가 되라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일상일을 하면서 그 일자체를 완전히 잃어버리는 몰입상태가 되어  자신마저 잃어버린 무아상태와 하나가 되라는 것이죠.

 

맨위의 문장인, 일하는 것이 도라고 한다면, 일하는 것과 도가 일체가 되는 것이다,라는 첫구절은 방편론이 아니라, 도와 일하는 것이 하나가 되는 기본 명제를 말한 것입니다.

일하는 것이 도와 일체가 되기 위해서는 실제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방법으로

德(전체의식)과 失(잃어버림)로써 일체가 되라는 두가지 방편을 제시했읍니다.

 

모든 일상활동 자체가 의식과 하나가 되려면,

자기자신을 육체라고 여기는 육체 동일시 관념으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즉, 자신이 한 개체적인 육체라고 여기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야 하는데,

보통 정신수행이라는 것은 바로 이 육체 동일화 관념을 버리기 위한 행위입니다.

육체 동일화에서 벗어나서 전체가 경계없는 한가지 의식일 뿐이라는 확신이 안정되어 있는 상태가 바로 모든 일상사와 의식이 일체가 된 것이죠.

"모든 것은 하나의 의식일 뿐이다"하는 확신이 서면, 저절로 그 하나의 전체의식이 됩니다. 육체가 있는 상태 그대로 보편의식상태이 되는 것입니다.

이때는 전체 보는 것이 모두 하나의 의식일 뿐이고, 개별화의 경계가 있다고 보지 않읍니다.

전체가 나이며, 사랑이며,일체의식 그자체입니다.

그것이 위에서 의식과 하나가 된 상태입니다.

그것이 신의 상태, 즉 하나(님)의 상태, 있는 그대로, 여여함 그자체 입니다.

이것이 바로 道라는 것입니다.

 

이구절에 대해서 백서본의 다른 해석서들을 보겠읍니다.

대부분은 德者를 得者로 바꿔서 해석했기 때문에 의미가 완전히 다릅니다

-얻음에 하나가 된자는 도 또한 그를 얻고-

얻음과 하나 된 자는 도가 그(얻음과 하나된 자)를 얻는다.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얻음'이라는 것이 무엇을 얻는 것인지 불분명해서 의미가 잘 파악이 안됩니다.

 

왕필본은 여기서 문장이 많이 달라졌읍니다.

同於德者 德亦樂得之

해석서들을 보면,

-덕과 함께하는 사람은 덕 역시 그와 함께 하기를 즐겁게 여기고-

우리 글이라도 그 내용자체를 명확하게 이해하기가 그리 쉽지가 않읍니다.

 

또한 왕필본에는 백서본에 없는 문장이 추가 삽입되었는데,

同於道者 道亦樂得之

왕필본 해석서들을 보면,

-도와 함께 하는 사람은 도역시 그와 함께 하기를 즐겁게 여긴다-

애당초 왕필본 원문이 잘못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해석문이 이상해집니다.

그리고 이문장은 전체 내용에 관련해서는 전혀 불필요하게 삽입된 것입니다.

왜냐 하면 도에 대해서는 故從事而道者 同於道,라는 문장 하나로 모두 표현한 것입니다.

 

同於失者 道亦失之;

일상사가 무지한 에고와 일체가 된 사람에겐

道 역시 그 무지인 것이다.

일을 하면서도 그 일을 한다는 것을 모를 정도로 몰입되어 있으면,

道 역시 그 자기 잃어버림(無我)상태와 동일하다는 것이죠.

즉, 자신을 잃어버리고 일에 몰두하여 그 일과 하나가 된다는 것이 바로 道라는 것입니다.

도의 절대본체는 보는 자와 보는 대상의 이원성이 하나로 합일되는 것입니다.

두개가 하나로 완전히 공진되면 그 공진상태는 두개가 모두 사라져서 아무것도 없는 것이죠.

일을 하고 있는 중에 일을 하는자와 일자체가 일체가 되면,

일자체와 일하는 자는 사라집니다.

즉, 나는 일한다는 것조차 모를 뿐만 아니라, 나자신 존재도 잊어 버립니다.

부분적인 일에 집중 할때도 자신과 일자체를 잃어 버릴 정도로 몰아지경에 있는데, 의식이 전체와 일체가 되었을 때는 행위는 있되, 행위자와 행위대상은 사라지는 것이죠. 이상태가 바로 위의 원문에 <失 >라고 표현된 <잃어버림>입니다.

일하는 것 자체도 함께 잃어 버려 전체의식이 된 상태입니다.

에고적인 자아가 사라질 때에 절대일원적인 도의 본체가 되는 것이죠.

그러나 이것은 단편적으로 집중하거나 어떤 한가지 대상에 자기정신을 완전히 거기에 뺏앗긴 상태라기 보다는 전체적인 측면에서 에고적인 개인이 사라질 경우를 말하는 것입니다.

 

나를 잃어버린다는 것은 의식과 하나가 된다는 말과 그 속뜻은 다르지 않읍니다.

원래 의식이 바로 나자신입니다.

따라서 나를 잃어버린다는 말은 일상사 활동과 내가 하나로 합일했다는 것이며,

개체적인 에고적인 나가 사라지고 전체의식과 일체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즉, 에고적인 나가 전체의식 속에 녹아버려서 전체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 에고의 개인 나가 사라진 상태가 바로 도의 경지라는 말씀입니다.

 

백서본의 다른 해석서들을 보면,

-잃음과 하나가 된자는 도 또한 그를 잃네.-

해석된 표면적 내용으로는 잘 이해가 안가는 문장입니다.

 

왕필본도 또한

同於失者 失亦樂得之,로 문장이 바뀌어져 있읍니다.

왕필본 해석서들을 보면,

-잃어버림과 함께하는 사람은 그 잃어버림 역시 그와 함께 하기를 즐긴다.-

이것도 역시 잃어버림과 하나가 된 사람은 에고가 사라진 자기망각상태인데,

그 자기망각상태에서 무엇을 함께 즐긴 다는 것인지 애매모호합니다.

 

이런 해석문장들을 억지로 이해하자니, 마치 선불교의 격외언어(格外言語)인 화두(話頭)같이 그 애매모호함 때문에 신비감마저 들어서 사람들이 자꾸 노자도덕경을 반복해서 탐독을 해 보지만,

볼수록 이해하기는 커녕,오히려 더 아득하고 아리송하게 의심만 생길 뿐이죠. 

물론 보는 관점에 따라서 주석가나 해석자들에 따라서는 독특한 주석을 한 분들도 계시지만 별로 적절한 해석이라고 판단할 수있는 내용이 거의 없는 것 같읍니다.

지금까지 전래되어 오는 전통적인 도덕경 주석과 해석서들은 이 23장의 후반부 해석 내용들이 거의 모두가 비슷하게 애매모호한 내용을 하고 있읍니다.

또한 백서본의 德者를 得者라고 주석하므로서 이 23장의 해석이 더 혼란되었던 것 같읍니다.

 

 

그런데 왕필본에는 위 내용과는 전혀 엉뚱한 문장이 맨 마지막에 삽입되어 있읍니다.

백서본에는 없고, 왕필본에만 삽입되어 있는 문장인데,

信不足焉有不信焉(믿음이 부족하여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이라는 문장입니다.

원래 이문장은 17장에 나오는 문장과 동일합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학자들이 17장의 문장이 잘못 끼어 들어왔다고 주장하고 있읍니다.

그렇게 생각해도 틀리다고 말할 수는 없겠죠.

왜냐하면 이 두문장은 그 위의 다른 문장의 내용과는 전혀 엉뚱한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는 좀 다르게 추측해 봅니다.

이 信不足焉有不信焉(믿음이 부족하니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문장을 삽입한 것은 왕필본 개작자가 의도적으로 맨 마지막에 집어 넣은 것 같읍니다.

그 왕필본 개작자는 위의 백서본 원문문장의 뜻을 명확하게 파악하지 못하여 자기 나름대로 추측한 내용으로 비슷하게 다른 글자를 삽입하고 바꾸어 넣었읍니다만, 개작자 자신이 보기에도 전혀 원래 뜻과 어긋나는 것같은 자격지심이 든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합니다.

즉, 마음 한구석에 약간 찔리는 약점이 이글 속에 있으므로 이글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의심하지 말고 읽으라고, 단단하게 쇠못을 박아놓기 위한 경고성 주의 사항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또한 왕필본 개작당시에 23장의 개작내용에 대한 옳고 그름에 대한 시비논란이 시끄러워서 그런 시비논란을 종비부를 찍기 위해서 단단하게 쐐기를 박아 놓는 문장일 수도 있다고 상상됩니다.

당시엔 노자도덕경이 일종의 도교경전으로서 숭배대상이었기 때문에 신성한 도덕경 내용의 진위여부에 대한 불필요한 시비를 막기 위해 23장 내용 안에 아예 인장 또는 권위자가 싸인하듯이 어떤 확증을 해둘 필요가 있었겠죠.

그 글을 공부하는 제자나 후대사람들이 왕필본 도덕경을 보고 무엇인가 잘못되었다고 의심을 하던가, 결점을 꺼집어 낼 것을 미리 염려해서 아예 사전에 글 마지막에 "이글을 보고 의심하게 되면 믿음이 부족해서 그런 것 아닌가?"라고 이글에 대한 무조건적인 믿음을 강조하고, 불신감을 사전에 봉쇄하고자 써논 경고성 글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 듭니다.

 

노자도덕경 전체를 놓고 보면 각장마다 왕필본의 개작부분은 각기 다른 사람인 것 같으며, 장기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수십명 내지는 수백명이 부분적으로 수많은 곳에 조금씩 개작이 이루어졌으리라 추측됩니다.

여하튼 이 23장의 왕필본 개작 부분은 문장자체가 잘못된 부분이 너무 많은 것 같읍니다.

그리고 백서본을 주석하는데 德자를 得자로 읽은 것에 대하여 지금까지 아무런 비판없이 그대로 전해내려 온 것도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도덕경을 나름대로 해석하려다 보니,

기존 주석및 해석내용들에 대하여 본의 아니게 비판적인 글들이 다소 포함될 수 밖에 없었읍니다.

물론 도덕경을 좀 더 구도수행의 관점에서 근접하여 주석과 해석을 하다보니,

일반적인 학문적 관점에서 주석한 기존 해석서들과는 다소 다른 의미로 파악이 되는 것 같읍니다.

따라서 읽으시면서 기존 해석들과 큰차이가 나는 것은 세밀하게 관찰하셔서 보는 분들이 스스로 판단하고 파악하시면서 공부하시는데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오랜시간 읽으시느라 고생하셨읍니다.  -무한진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