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 원리의 본질

2024. 9. 7. 20:50성인들 가르침/기타 비이원론 가르침

 

위대한 원리(참나)

 

흙의 근원은 물이고, 물의 근원은 불(빛)입니다.

불의 뿌리는 바람입니다.

이것은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습니다.

 

이제 바람의 기원에 대한 설명을 들어보십시오.

바람의 기원은 매우 쉬지 못하고 만물에 존재하는 내면의 참나(이트만)입니다.

 

내면의 참나(아뜨만)는 왔다가 가지만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한 곳에 고정되어 있지 않으며,

그 형태의 위엄은 베다와 우파니샤드를 읽는 것만으로는 짐작할 수가 없습니다.

 

브라흐만에게서 일어나는 최초의 영감(靈感)은 내면의 참나(아뜨만)입니다.

그 후 이 위대한 '우주의 제왕'으로부터 구나(속성)가 형성되었습니다.

 

세 개의 구나가 섞이면서 다섯개의 원소가 형성되어 인식할 수 있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5대 원소의 실체는 분별의 힘으로 인식될 수 있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원소는 공간(하늘,空大)이며, 유난히 특별합니다.

모든 만물은 그것의 밝은 빛 때문에 보여집니다.

 

가장 큰 원소는 비슈누 신으로 존재하는 것으로써 보여진다고 합니다.

이것은 실제 경험으로 보아야 합니다.

 

오대 원소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했습니다.

이들 원소들 중에는 다른 원소에서 생겨난 것들이 전체에 퍼져 있습니다.

그것은 미묘한 탐구를 통해서 보고 경험할 수 있습니다.

 

바람의 속도는 참나(아뜨만)의 속도와 비교할 수 없습니다.

참나(大我,내가 있다)의 속도를 직접 경험해야 이해가 됩니다.

 

참나(大我) 없이는 어떤 행동도 수행할 수가 없습니다.

참나(大我)는 객관적으로 보거나 발견될 수 없습니다.

오고 가는 많은 생각을 숨어서 보는 주시자입니다.

 

그것은 우주 뿐만 아니라 몸도 차지하고 지탱합니다.

그것은 수많은 몸의 형태 속에서 활동합니다.

그것은 분별의 힘을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세상에서 보여집니다

 

몸이 참나(大我)없이 기능할 수 있다는 것은 불가능하거나 상상할 수 없습니다.

8중 현시가 형태를 취하게 된 것은 오직 참나 때문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을 하는 것은 참나 뿐이며,

참나(大我)를 넘어서면 파라브라만(절대진아 또는 無我)인,

아무런 변상이 없는 절대적 실재(實在.절대진아))가 있습니다.

 

참나는 육체에 머물며, 감각기관의 활동을 자극합니다.

참나와 육체의 결합으로 인해 쾌락과 고통을 동시에 경험하게 됩니다.

 

우주에는 7개의 층이 있고, 그 안에 또 7개의 층이 있는 몸이 있습니다.

그 층들 중에서 가장 미묘한 것은 참나(大我)입니다.

이것은 분별을 통해 인식됩니다.

 

말을 듣고, 그 말을 이해하고 나서 응답하는 것도 오로지 참나(大我, 아뜨만)일 뿐입니다.

피부를 통해 부드러움과 딱딱함, 차갑고 뜨거운 감각을 아는 것은 참나(아뜨만)입니다.

 

많은 대상을 눈으로 보는 것은 참나(아뜨만)이며,

관찰과 분석을 통해 마음으로 무엇이 높고 낮음을 알 수 있습니다.

 

거친 외모, 냉철한 외모,교활한 외모, 자비로운 외모 등과 같은 다양한 외모의 중요성을 이해하는 것은 참나입니다.

 

혀를 통해 경험하는 다양한 맛을 선택하고 아는 것은 바로 참나(아뜨만)입니다.

알려지고 묘사된 것은 오직 참나에 의해서만 말해집니다.

 

가장 좋은 음식의 맛을 알고 코를 통해 많은 과일의 향기를 인식하는 것은 참나입니다.

 

혀로 말하고 맛보고, 손으로 주고 받으며, 다리로 오고 갑니다.

 

성기로 성적인 쾌락을 즐기고, 항문으로 노폐물을 버리고,

마음으로 모든 것을 생각하고 상상하며 봅니다.

 

삼계(三界)의 모든 행위를 항상 행하는 이는 오직 참나 뿐이며,

그 위대함에 비교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참나 외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과거든 미래든 간에 참나의 광대함과 그 작용의 위대함을 누가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참나가 없이 베다(지혜의 책), 샤스트라(영성과학의 책), 푸라나(신화의 책)를 이해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이 세상에서 올바른 행동을 인식하고, 이 세상 너머에 있는 것을 인식하기 위해 분별을 사용하고,

두 가지 모두에 대해 결정을 내리는 것은 참나입니다.

 

많은 의견, 많은 차이점, 많은 토론, 많은 논쟁과 해결,

많은 차이점과 유사점은 모두 참나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참나라는 기본 원리는 홀로 도처에 퍼져 여러 형태로 나타납니다.

이것을 인식하는 것이 삶의 완성입니다.

 

글을 쓰고, 읽고, 마음으로 배우고, 묻고, 뜻을 말하고, 설명을 하고, 노래하고,

악기를 연주하고, 춤을 추는 것은 오직 참나에 의해서만 행해집니다.

 

많은 쾌락을 경험하면 행복을 느끼고, 고통과 슬픔에 시달리는 것은 오직 참나입니다.

많은 몸에 거주하다 다양한 방식으로 떠나는 것은 바로 참나입니다.

 

참나만이 모든 육체를 차지하고 그들 사이의 관계를 갖습니다.

참나 없이는 배우도,드라마도,다양한 예술적 기량도 있을 수 없습니다.

 

수많은 형태를 취하고, 그 형태를 통해 근면하게 많은 일을 하는 것은 오직 참나입니다.

많은 변장을 한다고 여긴다면 참나는 용감하기도 하고 비겁하기도 합니다.

 

참나 만이 만물에 스며들고 모든 창조활동의 유일한 주시자입니다.

하나의 참나가 남성과 여성의 성적인 접촉없이 퍼지고 증식했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세상에서 여성은 남성을 원하고 남성은 여성을 원합니다.

이것이 이성에 대한 호감과 관심으로 양쪽 모두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입니다.

 

물질적 거친 육체의 기원은 미묘체(微妙體) 안에 있습니다.

세상의 특별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은 미묘체와 거친 육체 간의 이러한 연결 때문입니다.

 

제대로 연구해 보지도 않고, 많은 사람들이 남자의 영혼과 여자의 영혼이 다르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모든 것의 참나는 오직 하나 뿐입니다.

이 미묘한 비밀은 경험적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조잡한 육체 때문에 구별이 나타나지만, 미묘한 체험에서는 모든 것이 하나로써 이해됩니다.

이것을 이해하려면 확실히 경험해야 합니다.

 

한 여성이 다른 여성과 성관계를 즐김으로써 출산이 일어날 수 있는 일은 결코 없습니다.

여자는 내심 남자에 대한 갈망이 있습니다.

 

외견상으로 관계의 본질은 남자와 여자의 관계이지만,

미묘한 관계는 오직 참나 그 자체와의 관계입니다.

 

남자의 욕망은 그 자체가 여성의 원리입니다.

이와 같이 프라크리티는 푸루샤 안에 존재합니다.

그러나 남성의 원리(푸루샤)가 현시되는 것은 여성의 원리(프라크리티) 안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남성과 여성의 원리는 하나라는 것이 정확하게 말하는 것입니다.

 

자기 육체를 참조해서 우주를 봄으로써 우주의 체험적인 이해를 얻습니다.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반복적인 설명과 탐구를 통해서 이해를 얻으십시오.

 

이원성에 대한 근원적 욕망은 원초적 환상 그 자체입니다.

거기에서 전 세계가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원초적 환상과 세계가 어떻게 나타났는지 살펴보십시오,

 

여기에서 명확하게 밝혀야 할 위대한 작업이 완료되었습니다.

청자(聽者)들의 의구심이 해소되고,

남성 원리(푸루샤)와 여성 원리(프라크리티)의 본질이 설명되었습니다.

 

                                                                  <스승과 제자 간의 대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