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2. 26. 23:28ㆍ성인들 가르침/기타 베단타 스승들 가르침
알아차림의 본질
영화의 내용 때문에 스크린 자체가 요동치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지요.
마찬가지로 알아차림 그 자체가 경험의 내용 때문에 방해 받는 일도 절대로 없습니다.
생각이 뒤흔들리고, 감정이 고통스럽고, 몸이 아프고, 세상이 어지러워질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순수한 알아차림 그 자체는 이러한 경험 중에 일어나는 그 어떤 것에도 동요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알아차림의 본질은 평온함 그 자체입니다.
이 평온함은 마음이나 몸 또는 세상의 상대적인 평화로움에 달려 있기에 언제라도 꺼버릴 수 있는 그런 허술한 평온함이 아닙니다.
경험의 배경에서 항상 존재하는 본래적인 평온함이며, 마음의 활동 여부와는 상관이 없고,
오히려 그에 앞서는 평온함입니다.
즉, 인간의 '이해를 넘어서는'평온함입니다.
경험하는 중에 발생하는 어떤 것도 알아차림의 경험을 늘이거나 줄이지 못합니다.
영화 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스크린에는 어무 것도 추가하거나 없애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알아차리기는 지식을 습득하거나 특정경험을 한다고 해서 결코 강화되지도 않고 손상되지도 않습니다. 알아차리기는 경험에서 아무 것도 필요로 하지 않고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특정경험으로부터 아무 것도 얻지 않으며 아무 것도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알아차림은 그 자체로 온전하며 완전하고 충족되어 있습니다.
알아차림의 본질이란 행복 그 자체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행복은 마음, 몸, 세계의 상태에 좌우되지 않습니다.
모든 상태,환경,조건으로부터 자유로우며, 독립적이고 이유없는 기뿜입니다.
이러한 까닭에 크리스나무르티는 제자들에게 남기고 싶은 가징 중요한 하나의 가르침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 마음을 쓰지 않습니다. (I din't mind what happens)"
영화가 상영되는 스크린 그 자체는, 영화 속 등장인물이나 사물의 특성, 특징, 한계를 공유하지 않습니다. 비록 스크린만이 영화에서는 유일한 실체임에도 불구하고 말이지요.
마찬가지로 알아차림은 경험되는 대상의 특성, 특징, 한계를 공유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알아차림에는 어떠한 제한도 없으며 무한합니다.
영화가 상영되는 스크린 그 자체는 영화 속에서 일어나는 어던 것에도 영향 받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알아차림 그 자체는 경험 속에서 일어나는 어떤 것에 의해서도 조건지워지지 않습니다. 알아차림 그 자체는 마음의 본질적이고 환원불가한 핵심이며, 대상적 경험이라는 형태에 의해 조건지워지지 않습니다. 따라서 무조건적입니다.
영화에 몰입하는 상황에서, 맨 처음에는 영상 뒤에 스크린이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경험에 사로집힐 때 단순한 알아차리기의 경험 또는 알아차림 그 자체를 간과 하기 마련이지만, 그래도 맨 처음에는 경험의 배경에 알아차림이 있음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이와 같은 첫 번째 단계에서는 알아차림이 모든 대상적 경험을 주관적으로 목격하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스크린이 영상의 배경으로 단순히 깔려있다기 보다는 영상의 모든 곳에 배경으로 스며들어 있다는 점을 알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알아차림은 모든 경험에 스며들어 있습니다.
모든 경험은 알아차림 그 자체의 경험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생각, 느낌, 감각, 지각 등 어떠한 경험도 알아차림과 한데 섞이지 않는 거싱 없습니다.
이와 같은 두 번째 단계에서의 깨달음은 알아차림과 그 대상 사이의 구분을 최소한 어느 정도는 무너뜨립니다.
다음으로 세 번째 단계에서는 알아차림 그 자체가 모든 경험에 스며든다는 주장이 더는 타당하지 않음을 이해하게 됩니다. 마치 경험과 알아차림이 애초에는 별개였던 것처럼 말하고 있으니 말이지요.
하나의 이미지에 스크린이 전부이듯이, 모든 경험에는 순수한 알기, 즉 알아차림이 전부입니다.
생각이라는 경험에는 생각하기가 전부이며, 생각하기에는 알아차림이 전부입니다.
감정이라는 경험에는 느낌이 전부이며, 느낌에는 알아차림이 전부입니다.
감각이라는 경험에는 감각하기가 전부이며, 감각하기에는 알아차림이 전부입니다.
지각이라는 경험에는 지각하기가 전부이며, 지각하기에는 알아차림이 전부입니다.
따라서 경험에는 알아차림이 전부이며, 이 알아차림을 아는 것이 바로 진정한 앎입니다.
완전히 혼자이며, 그 자체 내에 제한되거나 쪼개지게 되는 것 없이 그 자체로만 존재하느 앎,
즉 순수한 알아차림은 온전하며, 완벽하고, 완전하며, 니뉠 수 없고 아무런 한계가 없습니다.
이원론, 분리, 다름으로부터 벗어날 때 우리는 사랑과 아름다움을 경험합니다.
이때 사물, 타인, 세상 등과 나의 구분이 무너지게 됩니다.
따라서 사랑과 아름다움은 알아차림의 본질입니다.
사랑이나 아름다움에 대한 친숙한 경험 속에서 알아차림은 자시느이 영원하고 무한한 현실을 맛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화가 폴 세잔은 예술이 우리에게 "자연의 영원함"을 맛보게 해 준다고 말했습니다.
영화 속 등장인물이 세상을 여행하더리도 스크린의 유일한 실체와 현실은 그대로 입니다.
마찬가지로 마음이 온갖 생각, 상상, 느낌, 감각, 지각의 형태로 끊임없이 움직이더라도
순수한 알아차림 그 자체의 실체와 현실은 그대로 입니다.
마음이라는 형식을 띤 알아차림은 움직이지 않으면서도 움직입니다.
영화로 인해 스크린에 색채가 입혀지지만 스크린이 그 색채로 오염되지는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알아차림은 경험에 의해 색채가 입혀지지만 경험 안에서 발생하는 무언가에 인해 변색되거나 훼손되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습니다.
순수한 알아차림 그 자체는 언제나 본연 그대로의 상태입니다.
어떤 경험도 자아를 알아차리는 본질적 존재에는 아무 흔적을 남기지 않습니다.
스크린은 영화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에 완전히 무방비상태입니다.
하지만 스크린 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스크린은 절대로 파괴되지 않지요.
마찬가지로 알아차림은 모든 경험에 대해 완전히 열려있고 무방비상태이지만,
결코 해를 입거나 무너지지 않습니다.
알아차리기의 경험은 2분 전이든 2일 전이든 2 개월 전이든 2년 전이든 20년 전이든 상관없이 지금과 완전히 똑같습니다.
다섯 살이었을 때의 경험을 아는 알아차림은 현재의 경험을 아는 알아차림과 완전히 동일합니다.
따라서 알아차림 그 자체에는 본질적으로 나이가 없습니다. 바로 그래서 우리는 나이를 먹어도 정말로 늙는 것은 아니라고 느끼게 되지요. 나이가 들수록 오히려 예전부터 지금까지 늘 동일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더욱 강하게 느기게 되는 것입니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도 동일하게 느끼는 나 지신의 동일성이야말로 곧 알아차림의 동일성입니다.
마찬가지로 가징 지적인 생각을 아는 알아차림은 가장 바보같은 생각을 아는 알아차림과 동일합니다. 고통, 긴장, 동요의 감각을 아는 알아차림은 기쁨, 느긋함, 따뜻함의 감각을 아는 알아차림과 동일합니다. 분노, 슬픔,비탄의 경험을 아는 알아차림은 고마움, 친절, 즐거움의 경험을 아는 알아차림과 동일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알아차림이 몸 안에 있고, 따라서 몸이 지닌 한계와 운명을 공유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라므로 마음은 몸이 태어날 때 알아차림이 태어난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몸이 늙고 병이 들 때 알아차림도 늙고 병이 든다고 생각합니다.
육체가 죽고 사라지면 알아차림도 죽고 사라진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영화 속 인물이 태어날 때 스크린이 태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영화 속 인물이 늙어도 스키린은 늙지 않습니다.
영화 속 인물이 죽어도 스크린은 죽거나 사라지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몸이 생기거나 태어날 때 알아차림이 태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몸이 늙어도 알아차림은 늙지 않습니다.
그리고 몸이 죽거나 사라져도 알아차림은 죽거나 사라지지 않습니다.
알아차림은 항상 영원히 똑같은 상태로 존재합니다.
알아차림은 스스로의 등장과 사라짐, 즉 시작과 끝, 탄생과 죽음을 결코 경험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경험이 있다고 주장하려면 알아차림은 스스로가 나타나거나, 시작하거나, 탄생하기 전부터 존재해야 하겠지요. 또한 스스로가 사라지거나, 끝나거나 죽은 후에도 존재해야만 하겠지요.
유한한 마음은 알아차림이 깊은 잠 속으로 사라진다고 상상합니다.
하지만 사실은 알아차림의 경험에서 유한한 마음이 깊은 잠 속으로 사라지는 것이고, 알아차림만이 홀로 남는 것입니다.
깊은 잠에 빠지는 것은 알아차림의 부재가 아니라, 부재에 대한 알아차림입니다.
알아차림은 스스로에 대해 알 수 있는 유일한 존재입니다.
스스로를 경험하는 알아차림은 태어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습니다.
그러기에 알아차림은 영원합니다.
영화 속 인물이 병에 걸려도 스크린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지요.
마찬가지로 몸이 병에 걸려도 알아차림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자신의 진정한 본질이 순수한 알아차림임을 깨닫는 것은 궁극적인 치유가 됩니다. 만약 자기 자신이 순수한 알아차림이라는 것을, 단순한 알아차림의 경험 그 자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면 그 사람은 늘 완벽한 건강을 누리게 됩니다.
아라치림에는 결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루퍼트 스파이라 지음, 김주환 옮김 <알아차림에 대한 알아차림>
-----------------------------------------------------------------------------------------------------------------
[閑談]
위의 글에서 <루퍼트 스파이라>라는 분이 모든 만물의 배경인 <알아차림>에 대한 내용의 글은
다름 아닌 <니사르가다타 마하리지>가 말씀하시는 <내가 있다>는 존재의식을 <앎의 차원>에서 <알아차림>이라고 표현한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있다>는 존재의식의 3 가지 특성은 <존재, 의식, 지복>인데, 여기의 루퍼트 스파이라는, 존재, 의식, 지복의 세 가지 특성 중에서 <의식>에 해당하는 앎, 즉 알아차림을 특별하게 앞에 내세워서 강조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니사르가다타 마하리지는 주로 <존재> 측면을 강조해서 내세우기도 했습니다.
여하튼 위에서 루퍼트 스파이라는 "내가 있다"는 존재의식을 <알아차림>이라는 <주시자 의식>을 강조하여 설명했습니다만, 다른 것은 몰라도,사실 "내가 있다" 존재의식은 절대 진아상태는 아닙니다. 이 존재의식은 다만 현상계의 배경으로써 현상계 자체가 이 "내가 있다"로 부터 나온 것이죠.
그런데 문제는 이 <알아차림>이 마치 영원한 진아처럼 묘사하고 있는데, 인도 베단타에서는 "내가 있다"존재의식은 투리아라고 해서 현상계의 근원이라고는 하지만, 불생불멸인 절대 진아는 아니라고 했습니다. "내가 있다"는 <아트만>이긴 하지만, 절대 진아인 <파라아트만>은 아닌 것이죠.
따라서 위에서 루퍼트 스파이라가 <알아차림>이 영원히 변하지 않는 불생불멸이라는 것은 잘못 이해했거나 다른 측면에서 말한 것 같습니다. 그 다른 측면이라는 것은 어떤 우파니샤드에는 <아트만이 브라만과 같다>라는 유명한 구절이 있는데, 이 구절을 보고 <브라만>과 <파라브라만>을 동일한 개념으로 알고, <내가 있다>는 알아차림이 절대 진아와 동일하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내가 있다>존재의식은 전체 순수의식이긴 하지만, 그것은 절대진아(파라마트만)으로부터 나온 마하마야의 빛인 것입니다. 즉 절대진아보다 한 단계 낮은 상태이며, 육체로 인해서 그 절대진아의 순수빛을 보게 된 것입니다. 만일 육체가 없으면 그 <내가 있다> 존재의식은 없습니다. 육체를 가지고 있는 측면에서는 <내가 있다>가 최고의 단계이긴 합니다. 그러나 <내가 있다> 넘어에 절대 진아인 불생불멸, 불구부정의 <파라아트만>이 따로 있습니다. <파라아트만>은 전혀 모르는 것입니다. 따라서 루퍼트 스스파이라가 말하는 <알아차림>이 영원불멸하다는 말씀은 인도 베단타철학의 관점에서 보자면 외람되지만 적절한 말씀이 아닌 것 같다는 의견을 조심스럽게 제시해 봅니다.
-무한진인-

'성인들 가르침 > 기타 베단타 스승들 가르침' 카테고리의 다른 글
현시되지 않은 세계로 들어가기(3) (0) | 2024.08.19 |
---|---|
보이지 않는 세계와의 연결 (0) | 2024.04.03 |
[바시슈타 요가] 창조에 관하여(7) (0) | 2023.11.29 |
몸을 통한 깨달음 (0) | 2023.11.14 |
[바시슈타 요가] 창조에 관하여(6) (0) | 2023.10.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