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2. 4. 23:06ㆍ성인들 가르침/슈리 푼자
- 빠빠지와의 면담 : 쵸키아 나이마 림포체, 1993년 카트만두 -
림포체 : 제가 올 때가 되었기 때문에 이렇게 당신을 찾아 왔습니다.
우리는 모두 같은 방향을 목표로 같은 성취를 향해 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똑 같은 성취를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슈리 푼자 :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웃음)
림포체 : 왜 아닙니까? 왜 아닌가요?
슈리푼자 : 아무런 방향이 없기 때문입니다. 무(無) 방향입니다.
어떤 방향, 어떤 방향도 당신을 과거로 데려 갑니다.
림포체 : 그러나 비방향(非방향)이 바른 방향입니다.
슈리 푼자 : 비방향이란 - -
림포체 : 바른 방향이지요(많은 웃음)
슈리 푼자 : 저는 모든 방향들을 제거합니다. '방향'은 어떤 출발점이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면 목적지도 있습니다. 그러면 길도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의 방향, 즉 동서남북이 있습니다. 이것들은 개념입니다. 저는 개념들을 제거합니다. '개념'은 과거를 의미합니다. 과거는 마음을 의미합니다. 마음은 공간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마음에 어떤 방향도 주지 마십시오. 당시닝 마음에 방향을 주면, 그것은 당신을 3,500만년의 윤회 속으로 끌고 갈 것입니다.
림포체 : 3,600만년입니다.(웃음)
슈리 푼자 : 당신이 하는 어던 주장도 마음에서 나옵니다. 그것은 마음에서 일어납니다. '나는 마음에서 벗어났다'하는 주장조차도 마음입니다.
림포체 :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는 어떤 주장도 마음에서 나옵니다. 어떤 것을 주장하는 것은 마음입니다. 어떤 것을 주장하지 않는 것도 마음입니다.
슈리 푼자 : 그렇습니다. '나는 속박되어 있다'는 마음입니다. '나는 자유롭다' 역시 마음에서 나옵니다.
림포체 : 틀림없이 그렇습니다.
슈리 푼자 : '나는 속박되어 있다'와 '나는 자유롭다' 사이에는 아무 차이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속박과 자유는 서로 관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뿌리는 같습니다. 그리고 이 뿌리는 어딘가에서 일어나는데, 그 근원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니 그 뿌리를 봅시다. 그 근원을 봅시다. 마음의 개념이 일어나고, 자유의 개념과 속박의 개념이 일어나는 그 근원 말입니다. 그 뿌리를 보도록 합시다. 만약 우리가 그것이 어디서 일어나는지를 본다면, 만약 우리가 그 뿌리로 들어 간다면, 아무런 속박도, 아무런 자유도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저는 말합니다. '당신은 이미 자유롭습니다' 라고, 이미 자유롭지요.
림포체 : 티벳 말로 우리는 이것을 '뿌리도 없고 땅도 없는 것'이라 합니다.
슈리 푼자 : 어떤 언어도 하나의 '땅'입니다. 이것은 언어를 넘어서 있습니다. 제가 말하는 것은 언어를 넘어서 있습니다.
림포체 : 말을 사용하지 않으면 의미를 드러내기 어럽습니다. 그러나 동의하겠습니다. 말이란 단지 표지(標指)이고 단지 피상적일 뿐입니다.
슈리 푼자 : 우리가 말을 사용하면, 누구나 그 말에 집착하게 됩니다.
림포체 : 맞습니다.
슈리 푼자 : 누구나 말에 집착하기 때문에, 말을 사용 안하는 것이 좋습니다.
림포체 : 그래서 과거의 많은 스승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하나의 동작을 보이셨지요. 가령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습니다. 궁극적 진리를 기리켜 보이기 위해 말씀을 안하신 것이지요.
슈리 푼자 : 그렇습니다. 말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과 같습니다. 사람들은 손가락에 집착하고 달은 보지 않습니다.
림포체 : 그렇습니다. 맞는 말씀입니다. 손가락은 단지 사람들이 달을 쳐다보도록 도와 주기 위해서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또한 달 역시 달이 아닙니다.
슈리 푼자 : 둘 다를 내버리십시오. 왜냐하면 둘 다 말이기 때문입니다. 달은 하나의 말입니다. 손가락도 하나의 말입니다. 자, 이제 이런 말들은 어디서 나올까요? 어떤 말이든지? 모든 말이 어디서 나옵니까?
림포체 : 말은 생각에서 만들어집니다.
슈리 푼자 : 맞습니다. 생각과 마음,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림포체 : 생각은 마음의 한 작용입니다.
슈리 푼자 : 맞습니다. 그런데 생각은 '나'가 있을 때만 작용합니다. '나', 생각, 마음, 공간, 과거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나'가 일어나면 일체가 일어납니다. 세계가 일어나고, 윤회가 일어나고, 속박이 일어나고, 자유가 일어납니다. 이 모든 것의 주된 원인은 '나'입니다. '나는 속박되어 있다', '나는 자유로워지고 싶다', '나는 자유를 위해 스승을 찾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는 자유롭다'고 합니다. 어느 경우나 '나'가 아직 있습니다. '나'는 마음 그 자체입니다. 자, 이제 그 '나'는 어덯게 제거합니까?
림포체 : 무아(無我)를 보고, 에고 없음을 깨닫는 지(知)를 반야(prajna)라고 합니다. 무아르 ㄹ보는 이 지(知), 이 반야가 '나'에 대한, '나'라는 관념을 갖는 것에 대한 치유책입니다.
'나', 즉 에고가 윤회의 뿌리입니다. '나'라는 관념에 집착할 때, 나와 저것이 일어나고, 이원성(二元性)이 일어납니다. 이 '나' 때문에 번뇌와, 쾌락과, 업(業)과, 고(苦)가 있습니다. 그래서 무아를 깨닫는 지(知), 즉 반야가 모든 것에 대한 치유책입니다. 요컨대, 해탈과 깨달음은 무아(no-self)를 보는 지(知)를 통해서 도달됩니다. 그리고 당신이 방금 말씀하신 것은 정확하게 옳습니다. 이 앎은 생각을 넘어서 있고, 마음을 넘어서 있습니다.
주체와 명상의 대상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것은 성품입니다. 그리고 무아를 보는 이 앎에서는 '명상한다'라는 말을 쓸수가 없으니, 왜냐하면 무엇을 명상하는 행위가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왜냐? 그것은 본래적 진리, 다른 말로 여여(如如)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만약 이 이미 있는 성품을 우리의 체험 속으로 가져오면, 그 자체가 깨달음을 얻는 방법입니다. 그것은 그 자체, 만물의 성품인 것입니다.
깨달은 존재가 세상 속으로 들어오든 들어오지 않든, 그가 사람들을 가르치든 가르치지 않든,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모든 존재들의 성품은 똑같습니다. 당신이 말씀하셨듯이, ' 이 성품은 생각을 넘어서 있습니다.' 그러면 그것이 어떻게 생겼습니까? 만약 그것이 생각을 넘어서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실제로 묘사할 수 있는 말을 찾지 못합니다.
슈리 푼자 : 제가 일러드리겠습니다.(웃음), 성하(聖下)께서는 지(知)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무엇보다 먼자, 지(知)는 아는 자, 앎, 그리고 알려지는 것을 뜻합니다. 아는 자 , 알려지는 것 앎입니다. 자, 이제 아는 자가 누구입니까? 지(知)를 성취하려면 아는 자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존재하는 어떤 앎이든 과거로부터 온 것일 수 밖에 없습니다.
림포체 : 두 가지 유형의 앎이 있습니다. 보통의 앎은 아는 자, 알려지는 것, 아는 행위가 있습니다.
슈리 푼자 : 그렇습니다.
림포체 : 그러나 또한 '반야바라밀'이라고 하는 초월적인 앎도 있습니다. 이것은 이원성을 넘어서 있습니다.
슈리 푼자 : 당신께서는 '두 가지 유형의 앎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통역자 : 맞습니다.
슈리 푼자 : 그러면, (그의 앞에 놓인 두 개의 주스 잔을 갈라놓으며) 이 앎이 한 유형이고(잔 하나를 가리키며),
이 앎이( 다른 잔을 가리키며) 다른 유형입니다. 자, 이것은 하나이고 이것은 둘입니다. 어디든지 둘이 있는 곳에서는 허위가 있습니다. '하나'의 개념과 '둘'의 개념은 둘 다 과거에 속합니다. 자, 당신께서는 두 종류의 앎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를 치웁시다(잔 하나를 치운다), 다른 것도 치웁시다. (다른 잔을 치운다) 이제 아무 것도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하나는 '둘'과의 관계 속에서 '하나'입니다. 따라서 '하나'역시 하나의 개념입니다. 만약 둘 다를 치워버리면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하나와 둘의 개념 둘 다 사라졌습니다.
림포체 : 맞습니다. 모든 것이 그와 같습니다. 하나의 개념은 다른 개념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슈리 푼자 : 더 나아가 보겠습니다. 제가 말하는 것은 공(空)입니다. '이것'과 '저것'이 사라지면 공(空)이 있습니다. 이 자리에서는 '나'가 끝납니다. 어떤 앎이 오기 위해서도 '나'가 일어나야 하지만, 그 공(空) 안에는 아무런 '나'가 없습니다. 여러 가지 종류의 앎들에 대해 이름을 부여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이러한 앎들은 무지(無知)이기 때문입니다.
림포체 : 당신이 말슴하시는 것이 옳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단지, 아는 자와 알려지는 것이 없을 때, 반야(般若, 위없는 지(無上知))-라는 말을 쓸 뿐입니다.
슈리 푼자 : 맞습니다. 그것이 반야라는 것입니다. 반야는 너머(beyond), 마음의 너머를 의미합니다.
- 데이비드 가드먼 엮음, 대성 옮김< 빠빠지 면담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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