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12. 7. 22:27ㆍ성인들 가르침/라마나 마하리쉬
방문자 : 아트마 비차라(자아탐구) 속으로 저를 안내해 주시겠습니까?
슈리푼자 : 아트마 비차라라는 말은 "어떤 다른 것이 아니라 그대의 아트만에 대해서만 전적으로 생각하라"는 의미이다. 아트마 비차라를 할 때 그대는 무엇을 느끼는가? 오로지 아트만만을 생각하라. 아트만은 그대 내면에서 이 비차라를 행하고 있다. 비차라에 대해서 생각하지 말라. 비차라가 일어나는 곳인 아트만에 대하여 생각하라.
어디에서 비차리가 일어나며 거기에는 무엇이 있는가? 그리고 누가 이 질문을 하고 있는가?
방문자: 자아가 질문하고 있습니다.
슈리푼자 : 그렇다. 이 비차라는 오직 자아에서 일어난다. 자아만이 해야 할 것, 가져야 할 것을 말한다. 그러나 자아가 어디로부터 일어나는가?
방문자 : 참나로부터 입니다.
슈리푼자 : 그럼 그대는 자아인가 아니면 참나인가?
방문자 : 참나입니다.
슈리푼자 : 그러니 바다가 하듯이, 참나로부터 파도들이 일어나 여행하고 쓰러지게 두어리. 파도들은 다름아닌 참나이며, 바다이다. 만약 그대가 참나라면, 참나에서 무엇이 일어나든 그대로 두어라. 그것에 대해 걱정하지 말라.
나는 참나이다. 아함 아트만(Aham Atman)이다. 그것이 전부다! 참나는 어떤 모습도 없다. 그것은 주체도 대상도 아니다. 참나는 모든 것 너머에 있다. 그대가 참나가 되면 그대는 이미 존재이며,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대는 참나이기 때문에, 어떤 비차라도, 방법도, 찬가도 필요치 않다.
'나는 자아다'라는 모든 이들의 믿음처럼 '나는 참나다'라는 이 믿음을 가져야만 한다.
사람들은 모두 자아를 믿으며 참나는 믿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의 그대로 존재하는 것이 어떤 다른 것이 되는 것보다 쉬운 일이다. 다른 것이 되는 바로 그 순간 그대는 고통 속으로 그냥 들어가게 된다.
'나는 진정한 존재다'라고 그대는 완전히 믿어야 한다. 나는 참나다 바가바드 기타에서도 '아함 아트마 고락사르, 즉 나는 모든 존재들의 가슴 속에 거주하는 아트만이다. "라고 말한다.
방문자 : 참나는 믿기는 어렵습니다.
슈리푼자 : 그러나 그대는 자아를 쉽게 믿는다. 이 믿음이 얼마나 가겠는가? 자아는 "나는 몸이다."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지 않은가? 이 믿음이 얼마나 지속되겠는가? 80년 내지 90년 지속될 수 있는가? 90년간 자아를 믿는다면 그 시간의 반은 잠으로 보내며 나머지는 학교가는데, 아내와 지내는데, 아이를 낳는데 쓴다. 이것이 그대의 믿음이다. 믿음의 결과는 어떠한가? 믿음을 가지려면 그대에게 유익한 믿음을 가져야 한다. 참나는 항상 존재한다. 참나를 믿어라 ! "나는 몸도, 마음도 아니다. 나는 대상도, 감각들도 아니다. 나는 자아조차 아니다" 이것이 삿상에 참석한 사람들이 꼭 지녀야 하는 믿음이다. 여기에서 삿상이 시작된다. 무엇보다도,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 것들을 그대는 버려야 한다.
방문자 : 휴식을 취하지 못함은 무엇입니까?
슈리푼자 : 휴식이 없는 바탕에 내가 말했던 휴식이 있다. 휴식이 없다고 느낄 때도 어떤 다른 곳에는 휴식이 있다. 매초마다 그 휴식이 보여진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그 휴식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호텔을 나오고 어떤 사람은 호텔에 들어간다. 그 나오고 들어가는 사이의 공간은 무엇인가?
방문자 : 텅빈 상태입니다.
슈리푼자 : 이것이 휴식이다. 모든 것 사이에 휴식이 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이 휴식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숨을 내쉬고 들이쉬는 그 사이에 무엇이 있는가?
방문자 : 휴식입니다.
슈리푼자 : 그렇다. 그대는 휴식을 묘사할 수 없다. 아무도 이것을 모른다. 그러나 그대가 이것을 자각할 때, 이것이 바로 아트마 비차라이다. 참나만이 있는 것이다. "나는 두 생각 사이에 존재한다. 나는 들어오고 나가는 두 호흡 사이에 존재한다."라는 것을 기억하는데는 노력이 들지 않는다. 비용도 들지 않는다. "나는 둘 사이에 있는 그 간격이다."라고 주의를 기울이기만 하라. 그 사이에는 죽음도 불만족도 불행도 끼어들 수 없다. 이것이 내가 주는 간단한 안내이다. 누구나 고요할 수 있다. 침묵하면 거기엔 어떤 차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침묵을 진정으로 경험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방문자 : '나'없는 침묵입니까?
슈리푼자 : '나'를 왜 말하는가? 그것은 노력으로 얻는 것이 아니다. 그냥 고요하라! 마음이 예전의 집착들로 돌아가지 않게 하려면 노력이 든다. 그러나 내가 여기서 말하려는 것은 아무런 노력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침묵을 위해서도 노력하지 말라. 무슨 노력이든 하지 말라. 애쓰지 말라. 그때서야 그대는 이 경험을 가질 것이다. 나는 이것을 침묵이라 하지 않는다.
크리슈나가 아르주나에게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을 가르쳤다. 그 후 즉시 아르주나는 전쟁에서 싸웠다! 그는 그 침묵의 상태 속에서 아홉 사단의 군사들을 무찔렀지만 그의 침묵은 흩으러지지 않았다. 크리슈나는 그에게 고요하라고 말하지 않았다. 대신 " 개념에 불과한 그대의 혈족을 죽여라" 라고 했다. 그러므로 어떤 생각도 일으키지 말고 노력도 하지 말라. 그러면 그대는 전쟁에서 이긴다. 단 한 순간도 노력하지 말라. 그리고 말하라. 아직도 그대는 고요하지 않은가? 노력으로는 그대는 행복할 수 없다. 그러나 노력하지 말라. 노력에서 오는 모든 혼란은 그대의 오랜 집착에서 온다.
방문자 : 리쉬케쉬의 큰 아쉬람에 머무는 동안 이 평화를 느낀 적이 있습니다.
슈리푼자 : 그대가 진지했으므로 평회를 느낀 것이지 아쉬람 때문이 이니었다. 어디에서도 그대는 평화를 느낄 수 있다. 요가와 그외 다른 것들에 대해 말하는 이 아쉬람들은 그대에게 혼란을 가져 올 것이다. 1942년에 나도 그 아쉬람에 갔었다. 그곳 사람들은 요가와 찬가에 대해서 말했다. 그러나 아트마 바차라는 말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모든 아쉬람에서 그대는 그대의 삶과 시간을 낭비할 뿐이다. 오랜 기간 머물지 않아도 이것을 확실하게 해 주는 삿상에 참석하는 것이 더 낫다. 나는 어느 아쉬람에서도 효과를 경험하지 못했다. 그곳에서는 명상하고 책만 읽을 뿐 침묵하지 않는다. 그들은 밤낮으로 활동하며, 이런 활동은 그대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고요하라! 어떻게? 내가 그대에게 말하리라! 어떤 노력도 하지 말라! 거기에 무슨 해로움이 있는가? 노력의 결과는 모두가 안다. 오로지 고요하라. 그리고 바로 이 순간에 고요의 결과를 보라. 그때 이 순간이 그대와 사랑에 빠질 것이다. 그대가 평화와 사랑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평화가 그대와의 사랑에 빠질 것이다. 그대가 평화를 느끼지 못한다면, 지고의 평화가 그대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대에겐 기회가 없다. 인간이 되든 당나귀가 되든 간에, 그대는 다음 번 화신을 기다려야 할 것이다. 너무나 사용하기 쉬운 지금의 이 화신을 최대한 활용하라!
방문자 : 저는 노력하고 있습니다. 아바두타 기타를 읽는 것과 같은 지속적인 깨달음의 자극제를 주면 고요와 아함브라마스미(Aham Bramasmi)의 효과가 보이지만, 일단 이 자극을 주지 않으면 평범한 상태로 떨어집니다.
슈리푼자 : 아함 부라마스미는 '나는 브라만이다'라는 의미이다. 그대의 모든 호흡이 이것을 그대에게 가르치고 있다. 아함 브라마스미는 바로 아트만이 그대를 가르치고 있다는 부름이다.
'나'가 어디로부터 일어났으며 그리고 '나'가 어디로 돌아갈 것인가 하는 질문이 일어나기 때문에 코함(Ko ham)이라는 질문이 일어난다 ! 코함이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이다.
태초부터 인간은 자신의 영혼의 근본적인 실체를 알고 싶어하여 '나는 어디서 왔는가?', '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 '내 주위의 모든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해답을 얻으려 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듣지 않지만, 이것이 듣는 사람의 징표이다. 그러므로 앉아서 고요하라. 그러면 코함에 대한 대답이 생긴다. 그대는 그것이다. 땃 뜨암 아시(Tat Vam Asi), 그대가 그것이다. 그러나 먼저 그대에게 코함이라는 물음이 일어나야 한다. 그때 아트만이 "그대는 그것이다'라고 말한다. 그것의 말을 듣고, 그것에 매달림으로, 자유가 필요한 헌신자는 자신이 브라만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이것이 자유가 일어나는 과정이다.
그대의 말대로 "평범한 상태로 돌아왔다"는 것은 정말 행운이다. 그대는 계단을 올라 어딘가로 오르려 했다. 그러나 어디에도 오르지 못했다. 올라갈 사다리가 있다는 개념을 버려라. 그러면 그대는 항상 있었던 곳에 서 있게 될 것이다. 즉 어머니인 땅 표면에 서게 될 것이다. 그것이 아함 브라미스미이다!
방문자 : 저 자신을 마음과 동일시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이 모든 개념들과 혼란들 속으로 들어가지 않도록 도와주시겠습니까?
슈리푼자 : 그대가 마음과 동일시하고 싶지 않다면 그대는 마음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마음을 바라보라. 그대는 자신과 마음을 동일시했다. 그대는 마음이 원하는 것을 해주고 있다. 그러므로 먼저 마음의 정체를 밝혀라. 그때 그대는 마음과 그대를 동일시할 수 있는지, 없는지 알게 될 것이다. 그대는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러나 생각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므로 바로 지금, 생각이 어디에서 일어나는지 찾아보라. 그리고 무엇이 일어나는지 나에게 말하라.
방문자 : 생각은 어떤 곳에서도 오지 않습니다 !
슈리푼자 : 어떤 것이 어떤 곳에서도 오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것이 어떤 것이 될 수 있는가?
어떤 곳으로도 오지 않는데, 어떻게 그것이 어떤 것이 될 수 있겠는가?
어떤 것은 어딘가로부터 와야만 한다.
그것이 어떤 곳으로부터 오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무리 보아도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생각이 아무 곳으로부터 오지 않으면
생각은 완전한 무(無)임에 틀림없다.
오직 무만이, 아무것으로부터 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쉽다.
방문자 : 저는 지금 스승님 곁에서 너무나 깊은 평화를 느낍니다. 스승님께 무엇을 더 물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제게 말씀해주시는 스승님의 말씀을 듣거나 스승님과 더불어 그냥 고요히 앉아 있어서 저는 행복합니다.
슈리푼자 : 그대가 여기 있을 때 그냥 고요히 앉기만 하라. 어떤 질문도 하지 않아야 한다. 질문이 일어나면 바로 이 질문이 어디에서 일어나는지 바로 찾아내라. 그때 그대는 고요히 앉아 있을 수 있다. 질문이 일어나는 근원은 고요, 조용, 그리고 평화가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질문에 속아 길을 벗어나지 않도록 하라.
모든 질문은 과거에 속하며
그대에게 고통을 안겨 주기 때문이다.
평화에 머물기를 원한다면
질문이 일어나고 있는 곳을 찾아내라.
질문이 일어나기 전의
그 장소를 보라.
바로 지금 이것을 경험함으로써
그대는 고요 속에 앉는 법을 알 것이다.
- 슈리 푼자 법문집 <그대가 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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