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두 법륭선사의 심명(心銘) 공부(13)

2021. 11. 21. 23:08성인들 가르침/과거선사들 가르침

[본문] 

無生順物 隨處幽接

覺由不覺 即覺無覺

得失兩邊 誰論好惡

一切有爲 本無造作

 

(일체가) 무생(無生)이니 사물에 수순하고

어느 곳에서나 고요히 흔들림 없다.

각(覺)은 불각(不覺)으로 인하여 있고,

각에 즉하여 무각(無覺)이다.

득실(得失)의 양변(兩邊)에 떨어져서

누가 호오(好惡)를 논하는가

일체의 유위(有爲)를 

본래 조작(造作)함이 없는 것이네!

 

[해설]

사물 등 일체 현상이 본래 무생(無生)인지라 거슬리거나 벗어날 필요가 없다. 

그렇다고 해서 무생이라는 상(相)을 세우게 되면 무생이라는 법이 생긴 것이 되어 무생의 의(義)에 어긋나게 된다.

또한 일체가 생한 바 없이 생한 사물이 없는 것도 아니어서 허무는 아니다. 

그리고 그 생한 바 없이 생하였다는 여실(如實)한 리(理)를 요지(了知)한 까닭에 생한 바 없이 생한 사물에 수순한다. 이때의 수순은 범부가 염착되면서 상에 따라가는 것과는 다르다. 

이미 그 사물이 생과 멸을 떠났고, 분별을 떠나 있음을 요지한 자리인 까닭에 염착됨이 없이 따라감(수순)이다. 

그 자리에서는 어디에서나 고요하여 흔들림이 없다. 

각(覺)은 불각(不覺)을 전제로 하여 있는 것이다. 

그래서 불각을 떠나 따로 각을 얻을 수 없다. 

불각에서 바로 각(覺)을 증(證)한다. 

또한 각에서 불각을 요지한다. 

무각(無覺)이 각(覺)에 즉(即)하여 있는 까닭이다. 

일체법은 부증불감(不增不減)이고 얻거나 잃을 바도 없다. 

각(覺)하였다고 해서 무엇을 새로 얻은 것이 아니다. 

불각(不覺)에 있다 하더라도 각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다. 

그러하건대 득실(得失)의 양변에 떨어져 각은 좋고, 불각은 싫다는 생각을 낼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일심(一心,心性)은 본래 유위(有爲)를 조작함이 없음을 알아야 한다. 

이미 능소(能所)를 떠났기에 아상(我相)이 없다. 

유위는 그 인식 또는 행위의 주체인 아(我)가 있다는 생각이 전제되어 하는 것이나 

아상을 떠난 자리에서는 당연히 유위를 짓는 바가 없다. 일심이 본래 그러하다. 

그래서 지금 내가 유위의 자리에 있다 하더라도 그 유위를 지우려고 할 것이 아니라 

자성(自性)의 성품(心性)은 본래 유위를 짓는 바가 없음을 요지하면 된다. 

이렇게 되면 그 유위는 이미 일심의 공용(功用)이고, 공덕(功德)이 되는 것이며, 

이미 유위(有爲)가 아니라 무위(無爲)가 되어 있다. 

 

                                                       -박건주 역주 <心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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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겨 남이 없으나 만물에 응하고                              

곳곳마다 보이지 않게 스며 있네.                          

無生順物 隨處幽棲

 

깨달음이란 깨닫지 못함 때문이니                         

깨달으면 곧 깨달음이 없느니라.                            

覺由不覺 卽覺無覺

 

얻음과 잃음의 이원화 속에서                     

어떻게 좋고 나쁨을 논할 수가 있겠는가.

得失兩邊 誰論好惡

 

일체의 모든 작용이 있다는 것은

원래부터 조작됨이 없다는 것이네.

一切有爲 本無造作

 

 

                                   - 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