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상적인 앎이 끝나면 보는 자와 에고 '나'는 사라진다 -6講

2021. 9. 14. 23:52성인들 가르침/시다르메쉬와르 마하리지

-싯따르메쉬와르 마하리지의 

             <스승과 제자 간의 대화> 제 6講-

 

강의 주제 : 대상적인 앎이 끝날 때, 보는 자는 보는 자로서 살아 남지 못한다. 

            그때 '나'의 자만심(에고)은 바로 소멸한다. [다스보드 6장 10절 16문단]

 

그대의 마음은 환상(마야)에 의해 창조된 대상에 몰두합니다. 

여기에는 신체도 포함됩니다. 

그대의 마음이 마야에 관여하는 한 그대는 '나와 너'라는 이원화 개념을 가지게 됩니다. 

이 모든 투쟁은 몸이 좋아하는 모든 것을 그대가 얻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대가 이 투쟁에 마음을 바쳤기 때문에 세상이 존재합니다. 

 

학생이 있기에 선생님이 있습니다. 

학생들이 떠나면 선생님은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대상적인 앎이 있기에 그대가 존재합니다. 

하나님은 그대(에고)가 거주하는 몸에 어떻게 스며들겠습니까? 

어떻게 칼집 하나에 두 개의 칼이 들어가겠습니까? 

나(에고)가 있는 자리를 하나님이 어떻게 차지 할 수 있겠습니까? 

브라흐만에 도달하고자 열망하는 사람들에게 이 무가치한 물건(에고)이 유용할 수 있습니까?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 모든 것이 실재하지 않는다고 느껴야 합니다. 

브라만 깨달음을 원하는 사람은 신(神) 비탈을 복용해야 합니다.(즉 진아에 대하여 숙고 해야합니다). 

한편에는 진아가 있고, 다른 한편에는 이 군대, 이 세상, 싯디(초자연적인 힘)에 대한 지식을 포함해서 14개의 왕국의 섭정이 있습니다.  

두료다나(Duryodhana)는 군대를 선택했습니다. 

환상과 브라만이라는 두 가지 교대되는 '현실'이 있습니다. 

그대는 마야를 좋거나 나쁘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이것을 소위 초탈(超脫)이라고 합니다. 

 

원자에서 브라마데바에 이르기 까지 이 모든 부(富)와 번영이 거짓일 때, 

그것이 어떻게 쓸모가 있겠습니까? 

마음의 성향이 세속적인 욕망에서 멀어지면 자연히 진아를 향하게 됩니다. 

하지만 항상 대상에 대해서 생각하는 사람이 어떻게 브라흐만의 지혜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 대상적인 앎이 끝나면, 보는 자는 보는 자로서 살아 남지 못한다." 

밤이 되면 대상적인 앎이 사라지며, 에고가 사라지고 고요한 진아만 남습니다. 

왕이든 거지든 잠자는 동안 모두 똑같이 행복합니다 

"나"로 살아 남은 자는 다양한 신, 고행, 돈, 천국 또는 지옥에 대하여 (생각의) 갈등을 겪습니다. 

이것은 이 모든 불행이 마음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음이 지워지면 궁극의 실재(實在)만 남습니다. 

 

세상의 사물에 대하여 이야기하지 마십시오. 

원자나 브라흐만에 대해서도 말하지 마십시오. 

마음은 수백 년 동안 세속적인 쾌락을 누린다 해도 결코 만족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이 무언가를 말함으로써 '창조된 경우(즉, 개념이 일어날 때) 

말을 멈추면 마음이 사라집니다. 

에고는 오직, 마음,지성, '나'와 '너'라는 감각으로 구성됩니다. 

자기의 진아에 대한 이야기를 제외한 다른 모든 이야기는 거짓입니다.   

 

베다의 비밀는 "대상적인 앎이 끝날 때, 보는 자는 보는 자로써 살아남지 못한다"라는 이 교리에 있습니다. 

모태에서 나온 그대로 무덤에 들어가 인생을 헛되이 허비한 무지한 자들의 위대한 업적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여기에 오는 많은 지망생들은 오로지 이 세상 외에는 다른 말은 하지 않습니다. 

실질적으로 이 '나'는 파괴되어야 합니다. 

 

지바(개아)는 생명나무 열매를 세속적인 형태로 즐겨 먹는데, 

꼭대기에 앉아 있는 새 시바(신)는 그 열매 자체에 앉자 있을지라도 관심이 전혀 없습니다. 

열매를 버리게 되면 그는 실재인 나라야나가 됩니다. 

그가 대상을 바라볼 때는 한 사람이 됩니다. 

평범한 사람을 깨달은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 육체적으로 세상을 버릴 필요는 없습니다. 

오직 마음 가짐의 변화만 있으면 됩니다.  

 

사람은 '사물이 오든 가든 내버려 두어라. 나에게는 모두가 다 똑 같다'라는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밤낮으로 '나는 브라흐만이다'라는 확신이 유지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는 더 이상 몸에 관심이 없습니다. 

스스로를 책망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책망하지 아니하며, 

부자라고 교만을 떨지 않는 사람은 가난으로 비참해지지 않습니다. 

만약 사람이 이러한 조건을 갖춘다면 그는 신이 됩니다. 

 

마야는 불가촉 여인과 같습니다. 

당신이 그녀를 포기하지 않는 한 당신이 하는 모든 것은 아무 가치도 없습니다. 

물질적 만족을 구하는 모든 사람들은 망(Mang) 카스트, 즉 거지입니다. 

성인은 오직 이 선물만을 요구했습니다.

" 한 가지만 주게나, 내가 그대를 절대로 잊지 못할 거야"

 

마야를 비난하고 브라흐만을 찬양해야 합니다. 

절대 진리를 얻는 것은 매우 쉽습니다. 

관심있는 사람은 '여기'(세상)을 보는 대신에, '거기'(진아,내면)로 시선을 돌려야 합니다. 

여러분은 가나파티를 숭배하며, 그에게 사탕을 주지만, 

여러분은 그의 한 손으로 보여지는 것, 즉 모든 것이 하나라는 축복을 놓치게 됩니다.  

 

대서사시 마하바라타(Mahabharata)에 악마 자라산다가 자신의 몸을 둘로 잘라도 반쪽이 다시 합쳐져 살아난다는 은총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는 카우라바 족에게 충성을 맹세했고 판다바 족은 그를 죽일 수 없었습니다. 

판다바족 중 한 명인 비마가 철퇴 결투에서 그를 두 동강 내자, 

슈리 크리슈나는 비마에게 왼쪽 몸을 오른 쪽으로 던지라는 제스처를 취했습니다. 

그렇게 던져진 그는 다시 살 수 없었습니다. 

 

절대 진리를 얻으려면 이와 같이 생각의 흐름을 환상에서 실재(實在)로 바꾸어야 합니다. 

당신은 절대 진리인 파라마트마를 잊었습니다. 

당신은 그쪽으로 마음을 돌려야 합니다. 

마야는 잊으십시오. 

세상이 거짓이라는 것만 이해하면 됩니다. 

그것은 꿈 속 세계의 왕국으로 보여져야 합니다. 

하늘과 번영의 영주인 인드라의 지위를 얻는다 해도 그것은 거짓입니다.  

 

이 빵(음식)은 모두 마야 안에서 구워집니다. 

그것들은 준비되고, 구워지고, 먹고, 배설되어야 합니다. 

배설물은 빵을 만드는 작물을 재배하기 위한 비료로 다시 사용됩니다. 

이 세상은 거짓이며 브라만이 진리라는 사실을 마음에 지울 수 없는 인상을 새겨놓아야 합니다. 

대상에 대한 앎이 마음에서 사라지면, 

당신은 자연스럽게 브라만임이 명백해집니다. 

 

그러면 평화, 휴식, 해방이 두 손을 모으고 당신 앞에 서 있습니다. 

발리가 모든 것을 자선단체에 기부했을 때, 하나님은 문지기가 되었습니다. 

락스미는 나라야나를 자기 것으로 만드는 그에게 다가 갑니다. 

락스미를 노리는 자들은 락스미도, 나라야나 경도 얻지 못합니다. 

대상에 주의를 집중하는 것을 소위 말하는 마음의 불순함이라고 합니다. 

대상에 대해 주의를 주지 않는 것이 마음의 순수함입니다. 

그런 다음 마음은 자신의 진아로 향하게 되고, 

최종적인 실재(實在)를 얻게 됩니다. 

 

                                      - Amrut Laya (The Stateless Stat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