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1. 7. 23:05ㆍ성인들 가르침/시다르메쉬와르 마하리지
세계는 우리의 개념, 우리의 관념에 따라 존재한다.
사드구루인 스리 바우시헵 마하리지가 생전에 들려주신 한 농부와 과부의 이야기가 있다.
때는 들에 파종을 할 시기였고, 그래서 농부는 자기가 아는 범위에서 좋은 날짜를 잡아서 멍에와 황소, 종자 자루를 가지고 들로 나갔다. 그러나 집을 바로 나서자 마자 바로 집 앞에서 길을 지나가는 과부를 보았다.
그가 생각하기에 이것은 매우 재수없는 징조였고, 그래서 몹시 기분이 안좋아져서 혼잣말로 지껴려댔다..
"나 원 참, 이제 뭘 할 수가 있지?"
바로 그때 스리 바우사헵 마하리지가 아침 목욕을 마치고 그 길을 지나가다가 농부가 혼자 지꺼리는 말을 들었다.
그는 얼른 앞으로 나아가 그 농부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 있는가?"
농부가 말했다. "아, 선생님, 제가 밭에 씨를 뿌리러 나가는데, 글쎄 때마침 과부가 제앞으로 지나가지 않습니까요."
마하리지가 말했다. " 이보게, 자네는 정말 어리석네 ! 사실 그것은 아주 운좋은 징조네, 지금 바로 가서 씨앗을 뿌리게. 머리 만큼 큰 열매들을 얻을 테니 ! 왜 그것이 나쁜 징조라는 헛된 생각을 하나?"
농부는 바우사헵 마하리지를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성자가 하는 말에서 힘을 얻었다.
그 말이 성자의 말씀이라는 데에 믿음을 얻었기 때문에, 그는 밭에 가서 큰 희망을 가지고 씨앗을 뿌렸다.
몇 달이 지나서 농사철도 끝났다.
그 뒤 언젠가 성자 바우사헵 마하리지님이 그 농부의 집을 지나가다가 우연히 그를 만났다.
그래서 물었다. "농사는 잘 되었나?"
농부가 말했다."예, 잘 되었습니다. 어르신, 다만 그 과부의 머리가 옥수수만큼 작아졌습니다요.!"
마하리지님의 말씀에 따르면, 실은 그 밭에서는 아주 큰 옥수수가 산출되었고,
그래서 농부가 그렇게 말한 것이라고 하셨다.
바우사헵 마하리지는 빙그레 웃기만 하고 길을 가셨다.
이 이야기의 교훈이 무엇인가?
개아는 자신의 개념 때문에 걱정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헌신자는 걱정하기 보다, '모든 것이 길하고 모든 것이 좋다. 모든 도시는 신의 도시이고, 모든 것은 신의 성품과 다르마를 지녔다. 도처에서 활동하는 것은 신이고, 신 아닌 어떤 것도 없다. 모든 이익과 손해는 신에게만 있고, 신에게 속할 뿐이다.'하는 믿음을 가지고 삶을 살아나가야 한다.
그러면 무슨일이고 행복할 것이고, 만족을 느끼게 될 것이다.
따라서 누구도 불필요한 의심의 악마를 불러 일으켜 비참해지면 안될 것이다.
성자와 현자들이 우리에게 하는 말을 주의 깊게 듣고 그들의 조언을 숙고해야 한다.
그 핵심을 이해하여 우리의 삶을 행복하게 만들어야 한다.
우리는 헛된 자부심으로 행동해서는 안된다.
부디, 우리가 힘을 쓸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알라.
신이 모든 일을 하고, 모든 일이 이루어지게 한다.
우리의 뒤와 앞에 있는 분은 신이다.
삶의 전체성에서 그대들의 개별성을 따로 잘라내지 말라.
그 말도 안되는 것을 놓아 버려야 한다.
일어나는 모든 일은 정확하게 완벽하다.
그대들이 어떤 상상적인 사람(개별적인 자신)을 투사할 때는 모든 것이 불안정하게 보인다.
사실 높은 곳도 없고 낮은 것도 없다.
양쪽이 모두 평등하다.
일체가 완벽하게 정해지며, 동요가 없다.
만약 에고가 놓아지면 모든 존재가 완벽하게 고요하며, 불안정한 것이라고는 전혀 없다.
바닥에서나 저 위에서나, 우리는 전적으로 안정된 그리고 매우 견고한 어떤 것이 있다는 체험을 갖는다.
그것이 의식충만의 브라흐만이다.
그 의식 안에 불안정해 보이는 작고 사소한 물결이 하나 있지만,
그 불안정한 작은 것이 그 개아에게는 워낙 엄청한 변화를 몰고 오는 것처럼 보여서 개아가 완전히 겁에 질린다.
이것이 이 세계의 겉 모습이라는 이상한 현상이다.
누구도 이 변화의 밑바탕에 무엇이 있는지 알아낼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그러나 잠깐만이라도 그대들의 습관적 사고 과정을 쉬고 그냥 관찰만 해도 무엇을 경험하는가?
우리가 늘 모든 쾌락과 풍요를 마음대로 가지며 행복했으면 하는 것이 아주 좋은 소망인 것은 분명하지만,
모든 불행의 근저에 있는 것이 바로 이런 욕망인 것이다.
우리의 삶을 성취해야 한다는 것은 맞다.
그러나 우리는 무엇이며, 추구하는 것은 누구의 성취를 위해서인가?
우리는 이것을 결코 스스로에게 묻지 않는다.
만일 이 점에 대해 생각해 본다면, 우리가 실제로 무엇이고 어떻게 존재하는지,
그리고 삶과 성취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아주 명료하게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직면해 있는 문제, 즉 우리가 완전히 행복한 상태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 순간에 해결될 것이다.
우리에게 완전한 행복을 보장하는 사물들의 어떤 계획이 있지만, 우리는 그것을 쳐다보려고도 하지 않는다.
헛되게도, 우리는 자신의 무지하고 헛된 개념으로 그것을 파괴하는데 착수하게 된다.
진실로 진정한 행복을 가져오기 위해서 우리는 손가락 하나도 치켜들 필요가 없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의 슬픔을 소멸하려고 애쓰다가, 잘못된 관념을 통해 강한 뭉둥이를 만들어 내려고 한다.
이 얼마나 얼빠진 개념인가?
이런 미친 짓을 그만두고 신적 체험의 순간에 온전한 주의를 기울여 그 순간에 미세한 깨달음을 발견한다면,
온전한 행복과 기쁨을 즐기면서 모든 슬픔을 해소하게 될 것이다.
위대한 정신의 소유자인 여러분들, 그대들 자신들의 자각과 통찰로 이 진리를 분별해야 한다.
과거 어느 때인가 이후로 진실한 성자들의 이름과 명성이 완전히 재로 변해 버렸다.
지혜의 말씀을 들었거나 배운 바 있어 그것을 되풀이 할 수 있었던 일부 사람들은 대중의 찬양을 받았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진짜 성자들의 이름을 갖져다 썼다. 이것이 사회에 만연되고 있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이 선호하는 감각대상들을 즐길 목적으로, 자신이 좋아하는 주제를 신에 대한 헌신과 성자, 현자들의 명성에 덧씌워 이미 자신들을 타락시켰다.
이로 인해 사람들이 고대의 성자들이 말한 것과 현재의 진정한 성자들이 말하고 있는 가르침에 주목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상황이 초래되었다.
그래서 그 성자들이 우리를 위해 남겨준 참된 행복의 모든 보물 자체가 발견되지 않아 활용되지 않는 상태에 있다.
친애하는 여러분, 이 가르침들을 최대한 활용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신은 그가 창조한 이 무한한 전체 우주 안에서, 그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인간을 창조해 냈다.
이 인류의 형상은 그가 더 없이 아끼는 소유믈이며, 그가 더없이 소중히 여기는 보물이다.
그는 그가 가진 최대의 솜씨로 인간의 형상을 창조했고, 인간은 그 성품상 지혜로 충만한 존재이게끔 만들어 놓은 것이다. 그대들은 자신이 어떤 지(知)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경험을 하지는 않는다.
그대들은 자신이 지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매우 확신하고 있고, 그 확신은 정말 타당한 것이다.
신은 인간의 형상을 위하여 이것을 명햇다.
그대들은 이 세계 안의 참과 거짓, 선과 악, 옳음과 그름을 선택할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것을 사용하여 누가 참된 성자이고 누가 가짜인지 알아내야 한다.
올바른 사람을 찾아 내어 그들에게서 성자들이 말한 내용, 그리고 그들의 가장 깊고 자비로운 가르침을 배워야 한다. 모든 사람이 가짜다. 모두 돌팔이다 하면서 모든 가르침을 부정하지 말라.
그대들은 본래의 있는 그대로 쉬운 진아 체험의 상태 안에 있었야 한다.
그 상태에 머무르면서 이 신적인 이해의 감로를 마시고,
위대한 '최상승의 지혜에 대한 지복감'을 즐겨야 한다.
-Master of Self-Realiz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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