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1. 20. 22:23ㆍ성인들 가르침/시다르메쉬와르 마하리지
자유에 이르는 데는 성자들과의 친교만큼 효율적인 길은 없다.
우리가 어떤 모양, 어떤 대상을 보면 그 대상에 대한 어떤 형태의 감정이 일어난다.
이와 마찬가지로, 여러분이 자신의 모친과 부친을 보면 그들과 관계된 어떤 특별한 감정을 갖는다.
그러나 스승을 친견하면 심장이 존경의 감정으로 넘치게 된다.
이와 같이 성자들과의 친교가 가장 높다.
성자들과의 친교로 보자면 사드구루와 가까이 있는 것이 마음을 가장 순수하게 만들어준다.
그의 근처에는 환(幻)이 설 자리가 없다.
환은 사드구루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헛되게 삶을 살면서 쓸데없는 세속적인 이익을 중요시하다가,
결국 비참해지고 근심만 늘어나게 된다.
개아는 어리석게도 전혀 중요하지 않은 대상적인 것들만 쫒다가, 환(幻)의 덧에 걸려 버린다.
그러나 우리가 사드구루에 가까이 있으면, 마음을 혹하게 하는 그런 쓸데없는 것들이 저절로 사라진다.
웃다바가 주 크리슈나에게 말했다.
"당신께서는 가엾고 무지한 사람들의 무지의 어둠을 몰아내기 위해 조언을 주셨습니다.
참된 지혜라는 등불의 심지가 분별과 무욕이라는 기이(ghee)에 의하여 불이 붙혀졌는데, 관능적 욕망 충족에 대한 집요한 희망이 나방처럼 불길에 뛰어들어(욕망을 충족하려고 하면서) 그 불을 꺼뜨리려고 합니다.
헌신자가 당신의 신적인 친존에 집중하면 욕망이 소멸됩니다.
헌신자의 심장 속에 이해로서 머무르고 있는 참스승만이 당신의 진정한 존재와의 합일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이제 저는 당신께서 저에게 당신과의 전적인 동일성을 하사하셨다는 것을 확신합니다.
당신께서는 모두의 가장 깊은 내면에 거주하시는 분이므로, 당신의 형상은 이미 아주 자연스럽게 저희들의 안에 늘 거주하지만, 그 형상이 베일에 가려져 있었습니다. 제가 해온 헌신의 요가로 인해, 당신께서는 저를 충분히 기특하게 여기십니다. 그래서 저에게, 당신을 당신의 참된 형상으로 이해할 내적 지혜를 주셨습니다.
이제 그것이 저 자신의 본래적 존재입니다. 당신께서 이 사실을 제에게 납득시키셨습니다.
성자들과 진인들은이 기적을 '돌아가기' 혹은 '올바른 귀환'이라고 부릅니다.
당신께서는 그러면서 당신에 대한 제 헌신의 강도를 높혀주셨습니다.
그리고 이미 저 자신의 진아지였던 그 지(知)를 주셨습니다.
이제 환(幻)과 의심들은 결코 다시는 저를 덮어 가리지 못할 것입니다.
당신께서는 너무나 자비롭고, 특히 당신을 찬양하는 헌가를 부르는데 몰두하고 있는,
이제는 지혜로워진 당신의 하인(헌신자)들에게 친절하십니다."
헌가를 부른다는 것은 단순히 심벌즈를 두드리거나 악기를 연주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반복해서 심벌을 두드리고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들이 헌신적이라고 말하지만,
이 '헌가'는 그런 유형이 아니다. 그것은 매우 심오하다.
세속사람들이 무엇을 열심히 명상하든, 그것이 곧 그들의 헌신이고 그들의 숭배방식이다.
그 마음 속에 무엇이 거주하고 있든, 그것이 곧 사람의 숭배대상이다.
어떤 사람들이 세속적인 대상을 생각할 때는 거기서 얻는 기쁨을 경험하는 것이 목적이며, 그것은 (그 대상에대한) 일종의 숭배일 수가 있다. 그 대상에 대한 집중이 그들의 명상이다.
만일 어떤 감각대상에 대한 과도한 집착이 있다면 그 잡착은 하나의 부단한 내관(內觀)이다.
(대상에 대한) 청문, 내관, 명상, 집착 그리고 대상을 얻는 데서 느끼는 위안은 진아의 만족, 곧 진정한 '내적인 만족'이 아니다. 반대로 더욱 관능적인 쾌락에 대한 욕망이 늘어나기만 하고, 탐욕에 대한 허기가 채워지지 않는다.
욕망은 욕망을 낳으며, 그렇게 한다면 자아는 자기 만족이나 충족을 얻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참된 숭배'는 (진아에 대한) 명상과 내관, 혹은 바꾸어 말해서 진아만족에 대한 부단한 몰두이며,
이것을 내면을 향한 열망이라고 한다.
헌신자가 자신에게 이 진아만족이 없다고 느낄 때, 내면에서 들끓는 것은 번민 혹은 공허의 느낌 뿐이다.
그 열망의 상태에서 다시 돌아 올 길은 없다.
그것을 내면 실재의 체험을 열망하는 사람이라고 한다.
이 충동이 있으면 그 자신에 대한 진아의 만족이 있을 것이 확실하다.
그 만족을 내적 평안이라고 한다.
우리가 이 내적 평안의 상태를 성취하면 더 이상 대상적인 것들에 대한 갈망으로 고통받지 않을 것이다.
그런 갈망들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을 때는 욕망들이 완전히 고요해진다.
이것이 내적 숭배의 진정한 성품이고, 이것이 그 길이다.
이 본질적 숭배에서 벗어난 대상적인 것들에서 만족을 얻는데 몰두하는 사람들은 인간으로 태어난 삶을 그냥 낭비하는 것이다.
웃다바가 말했다.
"오,주님이여, 당신을 숭배하지 않고 쓸데없는 것들에 대해 지껄이는 사람들은 사람 형상의 두발짐승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들은 평범한 짐승일 뿐 아니라 일급 나귀들입니다. 주 하리(비슈누)에 대한 숭배에 쓰는 시간만이 제대로 쓰인 시간입니다. 다른 모든 시간은 환(幻)에 의해 삼켜지며, 환은 다시 그것을 이용하여 사람에게 또 한 한번 탄생을 안겨 줍니다. 진아 깨달음의 큰 뜻에 쓰는 시간만이 참으로 가치 있는 시간입니다. 다른 모든 시간은 사라지고 허비됩니다. 몸을 보호하기 위해 해온 모든 노력조차도 헛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리에 대한 헌신으로 한 일은 참된 공덕입니다. 인간으로서의 삶은 매우 귀중한 것입니다. 그것을 선행과 헌신에 사용한다면 그것은 가치가 있습니다.
자신의 마음,말, 그리고 자신의 육신에서 신의 축복의 징표를 아는 사람들은 참으로 복됩니다.
이렇게 하여 속세적 삶의 속박이 저에게서 끊어져 나갔습니다."
- Master of Self-Realiz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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