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12. 29. 22:59ㆍ성인들 가르침/시다르메쉬와르 마하리지
만일 여러분이 절대적인 브라흐만을 상상하려고 하면 그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브라흐만은 비개념적이기 때문이다.
브라흐만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려고 하면 무(無) 밖에 얻지 못한다.
개념, 곧 상상은 어두운 것이다. 즉 그것은 무지(無知)이다.
영성학에서는 기쁨(지복)이 세 가지 유형이 있다고 한다.
그대들이 좋아하는 것을 얻을 때 그것은 일종의 기쁨을 받는다.
예를 들어 뱀을 춤추게 하는 사람은 뱀을 얻으면 즐거워 한다.
왜냐하면 그의 개념이 그와 같기 때문이다.
그런 기쁨은 특정 대상에 의해서 얻어지는 것이다.
기쁨의 또 한 가지 유형은 지혜의 기쁨, 즉 깨달음의 기쁨이다.
세 번째 유형은 감각적 쾌락의 충족에 몰두하는 사람들이 그 대상을 얻을 때의 기쁨이다.
이런 것은 일종의 악마들이다.
지혜를 즐기는 사람들만이 큰 기쁨인 브라흐만의 지복을 가질 수 있다.
그 기쁨은 '우리가 브라흐만이다'라는 우리 자신의 내적인 확신에 의해서 경험되지만,
그 기쁨은 하나의 태도나 상태이기도 하다.
그 태도는 '그것'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
사람은 결코 신과 동일할 수가 없다.
경전에서는 사람이 신과 동일해질 수 있다고 말하지만, 그렇지 않다.
동일해진다는 것은 하나의 태도이다.
우리는 동일해지지 않는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가 기쁨을 경험할까?
그 답은, 그것은 지혜의 기쁨이라는 것이다.
사드구루는 말씀으로 제자들에게 기쁨이 자각되도록 해준다.
이 지혜의 기쁨의 한계는 무상(無相)의 경지, 즉 어떤 개념이나 의심도 없는 상태까지 간다.
그러나 브라흐만은 그 상태조차도 넘어서 있다.
만일 어떤 사람이 경전에서 설명하는 내용을 기초로 절대진아(빠라마트만)에 대한 관념으로 상상하려고 한다면,
그가 이해하는 것은 하나의 상상적인 개념일 뿐이다.
우리는 그(파라마뜨만)가 우리의 상상에 따라서 '있다'고 판정했기 때문에 ,
그는 우리의 지성에 의해서 오염이 물들게 된다.
그가 있다고 우리가 고집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 개념에 따라 체험하게 될 것이고,
그것은 우리의 상상에 의해 창조되는 신일 될 뿐이다.
브라흐만은 모든 개념을 넘어서 있다.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고, 마음으로도 그것을 이해할 수 없다.
그렇다면 그것을 어떻게 깨달을 수 있을까?
빛은 눈에 보일 수 있고, 허공은 지각될 수 있지만, 브라흐만은 이런 것을 넘어서 있다.
보이지도 않고 지각되지도 않는 그것을 어떻게 인식할수가 있을까?
생각할 수 없고 명상을 넘어서 있는 그것을 어떻게 명상으로써 얻을 수 있을까?
아무 집착이 없는 그것에 우리가 어떻게 집착할 수 있을까?
말이 미치지 못하는 그것에 대해서 어떻게 묘사하고 뭐라고 말할 수 있을까?
만약 그것에 대해 명상을 해 보려고 한다면 즉시 이원성으로 되고,
수행자는 이원성이 겁나서 명상하려고하는 의지자체를 놓아 버리게 된다.
그러면 모두 것이 결국 허사가 되어 버린다.
이런 접근법으로는 아무 것도 얻지 못한다.
따라서 스승이 우리에게 가르쳐 준 대로 그대로 따라 할 필요가 있다.
아주 예리한 분별력을 활용하지 않으면 우리가 혼돈에 빠지게 된다.
분별지혜의 도움으로 세속 세계를 내버려야 한다.
'두번째'이거나 '타자'인 어떤 것, 상상적인 사람, 개아 등,
이 모든 것은 세속적인 것이며 환(幻)에 기초해 있는 것들 뿐이다.
이 세속 세상에 속한 그 상상적인 사람 자체가 죽어야 한다.
즉 '나'라는 에고가 완전히 해소되어야 한다.
'나는 별개의 한 개인이다'라는 개념이 소멸되어야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참된 영적 수행이다.
브라흐만이 무엇인지를 인식할 필요는 없다.
사이에 끼어 있는 이 '나'만 제거해야 한다.
이 '나'가 사라지는 것으로 충분하다.
이 '나' 자체가 상상적인 존재이다.
사실 '나'라는 것은 원래부터 전혀 없었지만, 그럼에도 그것이 생겨난다.
브라흐만은 이 개인 '나'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경전만 공부한 사람들은 그를 이해하려고 할 때 혼란에 빠진곤 한다.
어떤 상태나 개념을 통해 이해하는 사람들은 속임수에 당하게 된다.
여기서 예를 들어 보아야 아무 소용도 없다.
왜냐하면 그래 봤자, '보는 자, 봄, 보이는 대상'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보이는 대상, 봄, 혹은 그것을 기억하는 중개자 없이 존재하는 것이 브라흐만이다.
그것은 본래적인 것이다.
그것은 물러남의 상태라고 한다.
우리가 우리의 진아를 알아야 겠다는 욕망이 있는 한 그것을 놓치게 된다.
사띠아 -나라야나 예공을 올릴 때는 자신의 집(몸) 안에 있는 신을 숭배해야 한다.
그 신은 밖에서 데려올 수가 없다.,
그가 여러분 자신의 본래적인 신이다.
그것에 대해서만 숭배(예공)해야 한다.
사실은 일체가 브라흐만일 뿐이다.
그러면 무엇이 거짓이 될까?
상상이 거짓일 뿐이다.
상상은 참되지 않은 것과 관련해서만 지각 가능하다.
참된 것은 결코 동요되지 않는다.
왕은 자신이 왕이라고 이따금 선언할 필요가 없다.
브라흐만은 있다. 그것은 자신이 브라흐만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있는 것은 확실히 있는데, 그것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
그렇게 말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은 스스로 존재한다.
남편이 계속 '내가 남편이오'하면 사람들은 그를 의심하기 시작할 것이다.
실제 남편이라면 계속 그렇게 말할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그렇게 표현할 것도 없이 말이 없어도 당연히 남편인 것이다.
브라흐만이 곧, 신이고, 진아이다.
일단 그것을 알았으면 거기서 놓아 버려라.
그러면 브라흐만이 있다.
이원성을 통해 만날 것도 없이, 그것은 영원히 오직 '하나'이다.
만약 그것을 만나려고 하면 그 행위 자체가 분리를 만들어 낸다.
브라흐만은 그것으로 가는 길이 없다.
그것은 아무리 애를 써도 분활할 수가 없고, 분리할 수가 없다.
그것은 있으며, 본래부터 있는 그대로 존재하고 있다.
만약 그것이 사라진 적이 있다면 그것의 이름은 진리가 아닐 것이다.
체험이 없이는 이것의 깊이를 헤아릴 수 없다.
자신은 이해했다고 말하는 사람은 실은 그 도시에 한번도 가보지 못한 것이다.
어떤 태도, 상태 혹은 개념을 투사하거나 지니는 것이 사라지면
완전하게 물러남의 상태가 드러난다.
명상 속에서 생각할 수 없는 그것에 대해 어떻게 우리가 명상할 수가 있겠는가?
태도는 한계가 있다.
태도로는 그것을 파악할 수가 없다.
그것은 어떤 마음의 태도에 의해 붙잡히지 않는다.
헌신은, 항아리가 코끼리를 제 안에 담으려 갔다가 코끼리를 담기는 커녕 목숨을 잃고 마는 것과 같다.
그와 같이 헌신에서는 개아가 스스로를 해체한다.
동음이의어(同音異義語)로 장난을 치며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하면, 그것은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의 사망원인을 모른다고 해서 그 사람이 죽기전에 살아있지 않은 것이 되는가?
스승의 가르침을 받은 사람만이 진실로 안다.
만일 여러분이 이해하지 못한다면, 스승이 준 가르침을 완전한 확신을 가지고 붙잡고 있어야 한다.
마음은 상상을 투사하는 습이 있지만, 브라흐만은 하나의 상상물이 아니다.
마음은 에고에서 태어나는데, 에고가 놓아지지 않으면 브라흐만을 깨달을 수가 없다.
에고가 사라질 때 자동적으로 남는 것이 빠라마뜨만이다.
"나는 무엇인가?"하는 의심 자체가 에고, 즉 '나'라는 느낌이다.
이 에고 의식은 아무리 애를 써도 불에 타지 않고, 칼로 베어지지도 않는다.
이 '나'라는 느낌이 그 사람을 집어 삼킨다.
무욕(無欲)조차도 에고를 가진 사람의 무욕은 쓸데가 없다.
에고가 해소된 사람만이 진정한 만족을 얻는다.
핵심적인 문제는 에고를 어떻게 놓아 버릴 것이냐 하는 것이다.
한 가지 방법이 있다.
분별력, 즉 지혜(jnana)가 있는 분별을 통해 그것이 사라진다.
우리는 베단타의 가르침을 듣고 무엇을 이해했는가?
오대 원소와 하나의 진아가 있다는 것을 이해했다.
그리고 우리가 아무 존재도 아니라는 것을 이해했다.
우리는 이 몸 안에 있지 않다.
그러나 자신이 몸 안에 있다고 믿어 왔다.
그것을 착각 또는 상상이라고 말한다.
이 '나'가 사라질 때, 있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 있다.
그때 남아 있는 것이 그것이다.
그대들이 그것이 있다고 말하면 그것은 없고,
그것이 없다고 말하면 그것은 있다.
'아니다(Neti)'라는 말로 묘사되는 그것이, 바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이해하면 에고가 사라지고, 이 상상적인 '나'가 해소되면
수백만 가지 관념들도 모두 브라흐만의 일부가 될 뿐이다.
'니르(nir)'는 '아니다' 또는 '없다'는 뜻이다.
'니르위깔빠(無相,nirvikalpa)는 ' 개념이 없음' 또는 '상상이 없음'이라는 뜻이다.
상상적인 사람이 사라질 때 남는 것은 빠라마뜨만 있을 뿐이다.
그는 살이있고, 말하고, 걸어다니고, 활동하는 신이다.
'나'라는 느낌이 없이 숭배하는 사람은 위대하다.
신을 깨닫지 못한 사람은 그를 숭배해야 하지만,
신은 누구를 숭배해야 하나?
브라흐만이 직접 되고, 브라흐만을 직접 체험해라.
감각대상들에서 얻는 기쁨이 개아(個我)라면,
지혜 안에서의 기쁨은 시바(Siva)이고,
브라흐만 안에서의 기쁨은 빠라브라흐만이다.
- Master of Self-Realizati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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