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8. 28. 22:22ㆍ성인들 가르침/기타 베단타 스승들 가르침
-- 깊은 잠 --
질문자: 전 잠이 들면 의식이 없습니다. 꿈 꿀 때는 어느정도 의식이 있는지 모르지만 깊은 잠을 잘 때는 의식이 전혀없죠. 제가 마하라지께 이점에 관해서 여쭈었더니 그분은 깊은 잠을 잘 때도 의식 수준을 유지하신다는 것처럼 말씀했습니다. 라마나 마하리쉬의 위대한 깨달음의 체험은 죽음의 과정을 겪어가는 부분을 설명하면서 시작되지요. 제가 마하라지의 대담에 참석했을 때 그분도 수행하시면서 비슷한 경험을 한 것 같다고 말씀하신것 같군요. 대화는 주고 받아야하니까 하나 여쭙겠습니다. 이점에 관해서 선생님 의견은 어떠신지요.
라메쉬: 두 분께서 하신 말씀은, 특히 라마나 마하리쉬께서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몰두하신 일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마하리쉬께서는 육체가 죽을 때 이 육체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아내고 싶으셔서 죽음을 경험하셨고 이 경험을 바탕으로 죽는 것은 오직 육체뿐이라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그 이후로 개인적인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깊은 잠에서 부재하는 것은 "나"라는 의식입니다. 이때 동일시된 의식은 부재하지만 비개별적 참의식은 현존해야만 합니다. 이 때문에 라마나 마하리쉬께서 반복해서 "자고 일어나서 잘 잤다고 말하는 이는 누구인가?"라고 물으셨습니다. 깊은 잠을 자는 동안 인식하는 것은 바로 참의식이고 이 참의식은 비개별적 의식입니다. 이때 개인의 정체성은 부재합니다.
질문자: 방금 하신 말씀이 제 질문의 핵심입니다. 우리는 잠에서 깨면서 "잘 잤다."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잠에서 깨기 전까지는 잠을 자는지 인식하지 않습니다. 제가 다른 현자들의 말씀에서 이해한 것은 현자는 깊은 잠을 잘 때 조차도 인식하는 채로 남아있다는 것입니다.
라메쉬: 보시면, 현자의 개인적 인식은 비개별적 참인식과 합쳐졌기 때문에 깨어 있을 때 조차도 개인적인 인식이 없습니다. 현자에게는 주체 행동 의식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개인의 동일시된 의식이 완전히 사라질 때, 좀 더 정확히 말해서 합쳐질 때, 언제나 있는 모든 것은 비개별적 참의식뿐입니다.
-- 사랑, 자비(慈悲) --
질문자: 선생님께서는 사랑을 어떻게 정의하시는지, 그리고 사랑이 참의식과 어떻게 연관이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라메쉬: 무슨 뜻으로 말했습니까? 여러분이 사랑을 말할 때는 어떤 것이나 어떤 사람을 사랑하는 감정을 말하죠. 안 그래요?
질문자: 저는 사랑의 감정 따위를 말하는 것이 전혀 아닙니다. 이 때문에 선생님의 정의를 알고 싶은데, 저는 신성한 사랑 같은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라메쉬: 알겠습니다. 제가 보는 사랑은 자비예요. 그리고 사랑은 당신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닙니다. 제가 아는 사랑 또는 자비는 이해와 함께 일어나는 어떤 것이예요. 주체 행동 의식이 사라질 때 사랑과 자비는 자동으로 일어나요. 자기 자신의 몸-마음 유기체를 통해서 일어나는 행동이 자신의 행동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몸-마음 유기체를 통해서 일어나는 일도 그들의 행동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하게 되고, 이런 이해가 어떤 식으로 영향을 미치든지 간에 이때 모든 유기체 속에 존재하면서 모든 행동을 일으키는 것은 다 같은 참의식이라는 사실을 깊이 이해합니다. 자비는 판단하지 않고 비난하지 않을 때 드러납니다. 이해가 자비를 낳아요. 이런 자비를 사랑, 박애 또는 어떤 이름으로 불러도 상관없어요. 자기 안에 사랑이 생겨나도록 요청할 수 없어요. 자아로부터 등을 돌리는 일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신을 향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자아로부터 등을 돌리는 일이 먼저 일어나고 나서, 신 또는 참현실 등으로 향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늘 이것은 은총의 문제라고 말하는 까닭이 여기 있어요. 그러니 사랑 또는 자비가 언제 일어날 지는 은총의 문제라고 할 수 있어요.
-- 몸-마음은 객체일 뿐이다 --
질문자: 선생님은 객체-관찰자와 참의식에 관해서 말씀하셨어요. 제게는 이 둘이 다르게 보여요. 제 경험을 비추어 보면 고요함은 여기에 있고 모든 것을 감싸고 있지만 저는 고요함을 관찰하는 "나"로부터 여전히 벗어날 수가 없네요. 이것이 선생님께서 참의식을 관찰하면 객체-관찰자가 된다고 말하실 때 뜻하신 바인가요?
라메쉬: 보시면, "나"라는 관찰자는 자신이 주체 관찰자인 "참나"라고 생각해요. "내"가 "참나"라는 주관을 쫓아내고 그 자리를 찾이하고 있어요. 그런데 이것이 속박이예요. "나"는 주체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나"는 늘 그러했듯이 오직 객체만 될 수 있고, 몸-마음 구조체라는 객체 말고는 결코 어떤 것도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그리고 유일한 주체는 "참나", 즉 참의식이라는 사실을 깨우치면, 이것이 바로 깨달음이고 각성이예요. 그리고 이 깨우침과 이해에는 이해하는 자가 없어요. 이것이 가장 중요한 핵심이죠.
질문자: 모든 욕구가 사라지면 제가 어디에 있든지 무엇을 하든지 문제가 안되나요?
라메쉬: 그럼요. 문제가 안되요. 그것이 요점입니다.
-- 도(道)의 자연스러운 흐름 --
질문자: 에고가 문제라는 것은 알지만, 에고를 물리칠 수가 없네요.
라메쉬: 에고와 싸울 수는 없어요. 에고를 받아들이고 내버려 두세요. 이 이해가 에고를 서서히 뒤로 밀어낼 겁니다. 도교(道敎) 사상가, 양주(楊朱)의 글을 읽어 드리죠.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중격적입니다. 제 말과 같은 말을 해요. 마음이 생각하고 싶어하는 것을 생각하도록 그냥 놔두라는 거죠. 마음이 걱정해야 한다면 걱정하게 놔두세요. 마음이 걱정하는 것을 멈추려고 노력할수록 마음은 더 얽매이게 됩니다. 양주는 이렇게 말합니다. "귀가 듣고 싶어하는 것을 듣도록 놔두고, 눈이 보기를 바라는 것을 보도록 놔두고, 코가 냄새 맡고 싶어하는 것을 냄새 맡도록 놔두고, 입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말하도록 놔두라. 몸이 그토록 바라는 편안함을 마음껏 누리도록 놔두라. 마음이 하는대로 놔두라. 자, 귀가 듣고 싶어하는 것은 음악인데 귀에게서 음악을 빼앗아 버리면 듣는 감각을 구속하게 된다. 눈이 보고 싶어하는 것은 세속적인 아름다움인데 이것을 눈에게서 빼앗으면 보는 감각을 구속하게 된다. 코가 열망하는 것은 층층나무와 난초의 향기인데 이 향기를 맡을 수 없으면 냄새 맡는 감각은 구속된다. 입이 갈망하는 것은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말하는 것인데 이것을 말하지 못하면 지식이 구속된다. 몸이 자신의 편안을 위해서 바라는 것은 따뜻함과 좋은 음식이다. 이것을 얻으려 할 때 방해받으면 사람에게 자연스럽고 꼭 필요한 것을 구속하는 것이다. 마음이 원하는 것은 갈길을 벗어나서 게을러지고 싶은데 이렇게 할 자유가 없으면 사람의 근본 본성이 구속받고 방해받는다." 라마나 마하리쉬께서는 "마음을 죽여라!"라고 말씀하시곤 하셨는데, 이렇게 말하지 않으면 방문객들이 알아듣기 못하기 때문이었어요. "마음을 죽여라." 하지만 나중에 마하리쉬는 '당신'은 마음을 죽일 수 없고 마음을 죽일 수 있는 것은 오직 이해뿐이라고 설명하셨지요. 에고 또는 마음은 자신을 죽일 수 없어요. 에고는 자살하지 않을 겁니다. 실제로 에고는 죽이지 못하게 온갖 방해를 다 할 겁니다. 에고는 이렇게 말하죠. "스승께서 이렇게 말했지만 증거가 어디있어?" "깨달은 궁극적 상태를 내가 좋아하게 될지 어떻게 알아? 별로 좋지 않을 수도 있어!" 에고는 온갖 방해를 다 할 겁니다. 마음을 약하게해서 무력화시켜서 마음이 해악을 끼치지 못하게 만드는 힘은 오직 외부에서 옵니다. 이런 이해는 마음이 알아듣는 지식이 아니예요. 마음이 축척하는 지식은 현상세계에 기반을 둡니다. 진정한 이해는 외부에서 들어와요. 시공간 차원의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이해를 은총이라고 부를 수 밖에 없어요.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이런 다른 차원의 것을 받아 들일 수 있느냐는 은총의 문제입니다. 아득히 먼 옛날부터 내려오는 종교의 교리를 포기하려면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지요. 그런데 대부분의 교리는 오역입니다. 그래서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것이죠. 다시한번 말하지만, 은총이나 용가 따위는 다 그냥 말뿐이지만, 때가 되면 있는 모두를 다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가 생깁니다. 좀 전에 읽어 드린 양주의 말을 지금 말해드릴 이 말과 함께 생각하지 않으면 오해하기 쉬워요. "들음이 귀에 머무르게 하고 마음이 생각에 머무르게 하라. 그러면 무(無)의 혼이 모든 것을 감싸고 오직 도(道)만이 무를 포함한다. 이 말들이 뜻하는 바는 몸과 정신을 다스리는 일은 자기중심적일 수 없다는 말입니다. 감각과 느낌과 생각이 스스로 조화롭게 작용할 것이라고 믿고 이들이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나게 놔두어야해요. 마음을 강제로 통제하려는 하는 것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하는 것 밖에는 안됩니다. 그냥 방해만 더 될 뿐입니다. 자신을 통합해 통제하려는 것은 자기 유기체를 독재에 시달리게 하는 꼴 밖에는 안되지요. 바가바드기타에 이런 말이 있어요. "신과 하나되어 진리를 아는 자는 보고 듣고 만지고 냄새 맡고 맛 보고 걷고 잠자고 숨 쉬고 말하고 눈을 감았다 뜨는 것에 자신이 하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한다. 감각은 그 감각의 대상이 차지한다고 확신할 뿐이다." 성자 즈네쉬와르(Sant Jnaneshwar)는 이렇게 말해요. "감각이 그 자체의 본성에 따라 감각을 만족시켜줄 대상을 쫓을지라도 자아를 깨우친 사람에게는 그와 동시에 감각의 경험 그 자체가 자기 자신과 다르지 않다는 깨달음이 있다. 이것은 마치 거울을 들여다 볼 때 그 즉시 거울 속에 비친 모습이 자신과 다르지 않음을 아는 것과 같다."
-- 모든 것은 변하고 영원한 것은 없다. --
질문자: 제가 이 삶을 통해서 성장하기를 바란다는 자애로우신 어머니로서의 참의식이라는 개념이 참 좋아요. 그런데 선생님의 말씀에서는 이점을 찾아 볼 수가 없어서 애를 먹네요.
라메쉬: 사랑과 증오는 현상세계 안에서 서로 연결된 상반된 것이예요. 현상세계안에는 한 쌍의 짝으로 되어 있지 않으면 이 세상에 존재할 수가 없어요. 홀로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불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아무것도! 모든 것은 늘 변하고 있어요. 변화와 한 쌍의 짝으로 된 상반된 것은 현상세계가 존재하는데 가장 핵심이 되는 것입니다. 주체와 객체로 분리된 마음이 사랑과 증오가 한 쌍의 상반된 것이고 선과 악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어려움을 겪어요. 하나는 다른 한 짝이 없이는 존재할 수가 없어요. 아름다움은 홀로 존재할 수 없어요. 아름다움을 말하는 순간 추함은 이미 거기 있어요. 선함을 말하는 순간 악함은 이미 거기 있어요. 추함 없이 어떻게 아름다움을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인간은 둘 중에 좋아하는 것 하나만 경험하고 싶어하지만 불가능한 일이지요. 삶에서 변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변화는 삶에 가장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행복이 있으면 불행은 자동으로 따라오는데, 변화에는 예외가 없기 때문이죠. 분리된 마음이 비교하고 판단하면서 불행없이 행복만을 원하기 때문에 인간은 비참해집니다. 분리된 마음은 변화가 반드시 온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아요. 행복이든 불행이든지 "이 또한 지나가리라."라는 이해가 일어나면 엄청난 시각의 변화가 일어날 겁니다. 그래서 어느정도 이해가 있으면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이해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지 않고 자신이 "알라신의 총애를 입은 사람"이라고 여기지도 않아요. 왜냐하면 이렇게 이해하는 인식의 상태가 지나가고 다른 인식의 상태가 올 것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그 다른 인식의 상태가 오더라도 이미 예상한 것이기에 비참하지는 않습니다. 예전만큼 심하게 비참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변화는 삶의 가장 기초가 되고 기본적으로 모든 것이 환상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기초가 됩니다.
질문자: 왜 참의식은 몸-마음에 정체성을 일으키고서 나서 선생님과 같은 개체를 일으켜서 저희들을 가르치도록 하는 건가요? 마치 역설 같은데, 아닌가요?
라메쉬: 역설이 없어야 하는 이유는 있습니까? 누가 역설이라고 규정합니까? 인간의 마음이죠. 인간의 마음은 자시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역설로 치부하지요. 어떤 때는 기적이라고도 부르고요. 자신을 개체로 여기며 퍼즐을 못 맞춰서 난감해하는 인간을 위해서 참의식은 새로운 퍼즐을 제공해야겠죠. 이렇게 참의식은 스스로 즐기는 거예요. 참의식이 있는 모든 것이라는 사실을 명심하면 모든 문제는 저절로 사라집니다. 일어나는 모든 일은 참의식이 스스로 즐기는 일일 뿐이예요.
질문자: 참의식이 즐기는 동안 저희 중 누군가는 고통받고 있어요.
라메쉬: 누가 고통받는다는 말입니까?
질문자: 무슨 말씀하시는지는 알겠어요. 선생님 말씀을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참의식이 있는 모든 것이고, 이 모두가 참의식이 스스로 즐기는 일일 뿐이다. 하지만 제게 아이들이 있는데 이 아이들 몸이 마비가 된다면 선생님 말씀처럼 비개별적인 방법으로 상황을 지켜보면서 평화롭기는 어렵죠. 정말로 문제가 되는 것은 이런 개인적인 일들이죠.
라메쉬: 그렇죠. 하지만 그런 일은 오직 개인에게만 문제가 될 뿐이예요. "나"에게 인생이란 일어나는 일들에 반응하는 것이 전부예요. 이 때문에 인간은 안전의 보장을 바라죠. 하지만 안전의 보장은 불가능한 일이기에 인간은 불행합니다. 뉴톤주의 물리학자들이 지배하던 지난 300년 동안 사람들은 세상의 일부분을 떼어내서 연구하면 그 일부분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양자역학 이론이 나온 지금 과학자는 소립자가 움직일 때 소립자의 속도나 위치 가운데 오직 하나만 알 수 있다고 말해요. 속도를 알면 소립자가 어디 있는지 위치를 모르죠. 둘 다 알 수 없어요. 세상 전체가 양극성, 즉 남자와 여자, 주체와 객체, 위와 아래, 선과 악, 건전한 것과 유해한것, 행복과 불행과 같이 서로 연결된 상반것에 기초해서 작용합니다. 세상 어느 것도 불변하는 것은 없어요. 어떤 행성도 어떤 은하계도 불변하는 것은 없어요. 모든 것이 움직이고 있고 움직임은 곧 변화를 뜻해요. 인간의 마음은 직선 형태로 생각하지만 세상 거의 모든 것이 원형입니다. 변하는 모든 것은 다시 돌아가요. 오늘 날, 과학자는 모든 것이 정확하고 변하지 않고 측정 가능한 세상은 실현 불가능한 세상이라고 말해요. 그런 세상에서는 모든 원자 속의 작은 전자들은 매 순간 끊임없이 움직여야만 하기 때문에 저절로 다 타버릴 겁니다. 모든 에너지가 소진되고 모든 것이 핵으로 되돌아 갈 거예요. 삶은 불확실한 것이예요. 이 사실을 신비주의자는 오랜 세월 말해왔고 이제는 과학자들이 동의하지요. 우리는 불안전한 세상에서 살아야합니다. 변하는 세상에서 살아가야해요. 안전의 보장이란 꾸며낸 이야기입니다. 안전의 보장을 받으면서 살 수가 없는데도 안전의 보장을 찾는 것은 좌절을 뜻합니다. 좋든 싫든 변하는 세상에서 살아가야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일은 큰 진전입니다. (6lower)
-리쿼만 편집, 김영진 번역<라메쉬 발세카와의 대담, 참의식이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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