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의식이 말한다(3)

2020. 7. 10. 23:06성인들 가르침/기타 베단타 스승들 가르침

-- 참전체성의 비개인적 작용 -- 

 

질문자: 라메쉬 선생님, '참전체성은 스스로 작용한다.'라는 말이 마하라지의 기본 지침이었습니까? 

 

라메쉬: 그렇습니니다. 호흡 과정이나 소화 과정 그리고 가장 복잡한 신경조직도 마찬가지죠. 모두 스스로 작동하죠. 통제하는 "내"가 전혀 필요없어요. 

 

질문자: 쉬리 오로빈도(Sri Aurobindo)는 "들음이 듣고 봄이 보며 감각들은 원래 스스로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럼 감각들 뒤에 실질적인 주체가 없다는 말인가요? 모든 것이 인식인가요? 

 

라메쉬: 그렇습니다. 그래서 그 말은 어떤 감각을 통해서든지 개별적으로 인지하는 자가 없다는 제 말과 같은 말이예요. 모든 감각은 몸-마음 구조체를 통해서 인지하고 있어요. 이렇게 인지한 것에 반응하는 일이 당신이 하는 일이죠. 

 

질문자: 보는 것이든, 듣는 것이든, 만지는 것이든지 간에 감각이 주는 인상을 받아들이는데 필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군요. 개체도 없고 주체도 없군요. 받아들인 그 인상에 반응을 하면서 비로소 내가 "나"라는 느낌을 가지고 그 받은 인상이 좋거나 싫다고하면서 반응하는군요. 

 

라메쉬: 맞는 말이예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말하자면, 이런 반응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누구도 자신이 반응한 것에 죄책감을 느낄 필요가 없어요. 

 

질문자: 마음은 바로바로 비교하고 판단하는데, 마음이 따로 할 일이 없어서 그런가요? 

 

라메쉬: 그렇지요. 비교하고 판단하는 일이 마음의 본성이예요. 그래서 마음을 억누르려고 하면 잠시는 그럴 수 있겠지만 곧 크게 폭발하겠죠. 

 

질문자: 어떤 아이는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고 어떤 아이는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고 어떤 아이는 인생 전체를 고통 받으며 살고 어떤 사람은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나지만 거지가 되기도 하고 학대 받으며 자라기도 하고 죄를 지어 교도소에 가기도 하는데, 선생님께서는 이런 일들을 어떻게 설명하시나요? 이런 말도 안되는 일들이 그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일어나고 있나요? 그냥 일어나는 일일 뿐입니까?

 

라메쉬: 그렇습니다. 

 

질문자: 그럼, 이런 모든 일의 원인이 뭔가요? 

 

라메쉬: 원인은 아주 간단해요. 당신이 '있는 모두가 참의식이다'라는 말을 받아들이면, 누가 이런 일을 겪고 있나요? 참의식이 아니면 누가 있단 말입니까? 다양한 몸-마음 구조체를 통해서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경험을 겪고 있는 것은 바로 참의식이죠. 하지만 정체성이 있기 때문에 분열된 마음이 "내"가 괴로워한다거나 "내"가 즐기고 있다고 말하지요. 일어나는 일은 이뿐이예요. 

 

질문자: 선생님은 미래의 사건이나 과거의 사건이라는 견해 자체를 부정하시죠. 선생님은 현재만을 생각하라고 말씀하세요. 현재에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그것이 일어나는 일이라고 하시죠. 

 

라메쉬: 그럼요. 정말이예요. 다른 말로 하자면, 우리는 어떤 일이 수평적으로 시간의 흐름을 따라서 일어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수직적으로 매 순간 마다 어떤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당신이 하는 일뿐만이 아니라 매 순간 일어나는 세상 모든 일이 그렇습니다. 수십억 몸-마음 구조체를 통해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정확히 그 순간 참전체성이 일으키는 작용입니다. 이 작용은 모든 선한 행위와 모든 악한 행위를 포함하고 지진과 홍수, 전쟁, 싸움들을 비롯한 모든 일을 다 포함하죠. 

 

질문자: 그런 식으로 시간 개념 자체를 없애 버릴 수가 있군요. 

 

라메쉬: 과학도 이 사실에 접근해 가고 있습니다. 한번은 대담에 수학자가 참석했어요. 그 수학자가 말하길, 아인슈타인은 최종적으로 시간과 공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에 도달했다고 하더군요. 이 말을 믿을 필요는 없어요. 어쨌든 이 수학자는 아인슈타인이 연구했던 그 문제에 관해서 아주 깊이 연구했나 보더군요. 아인슈타인은 시공간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했는데, 시공간이란 단지 개념일 뿐이며 3차원의 세계가 일어나기 위해 필요한 개념적 장치라는 거죠. 3차원의 물체가 투영되려면 공간이 있어야하고 누군가에게 인식이 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는 말이죠. 시공간이 개념이고 필요한 개념적 장치이라면 나타난 세상을 구성하는 것들도 개념이 아니겠어요? 그래서 세상의 일부인 인간도 개념적으로 텅 비어있지요. 

 

질문자: 제가 잔디에 물을 주러 나간다면 산책하거나 커피를 마시겠다는 생각 대신에 잔디에 물을 줘야겠다는 생각이 어디서 제 머리 속으로 들어 온다고 말씀하셨죠? 그렇게 말하는 것보다 그냥 그일이 참전체성이 그 순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하면 안될까요? 선생님 말씀은 어디서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세상의 모든 일을 지시하고 있다는 건가요?

 

라메쉬: 아니죠. 하지만 생각이 들어 온다는 말은 맞아요. 제가 말하는 요점은 두뇌는 두뇌 자체의 물질만으로 생각을 만들어 내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생각은 밖에서 들어와야만 해요. 언제든지 두뇌는 생각에 반응을 하지만 생각 자체는 밖에서 들어오는 것이예요. 무슨 말인지 아시겠어요? 

 

질문자: 그 "밖에서"라는 개념이 이해가 안됩니다. 무엇의 '밖'이라는 말씀이신지요? 

 

라메쉬: 바로 그 점입니다. 실제로 안도 없고 바깥도 없지요. 있는 모두가 참의식이죠. 

 

질문자: 그렇다면, "바깥"이라고 부르기는 하지만 바깥은 사실 없군요. 

 

라메쉬: 맞아요. 위도 없고 아래도 없고 안도 없고 바깥도 없고 외부도 없고 내부도 없어요. 있는 모두가 참의식입니다. 현상세계는 참의식 안에서 나타난 세상이죠. 그리고 이렇게 나타난 세상조차도 같은 참의식의 객관적인 표현일 뿐입니다. 있는 모두가 참의식입니다. 

 

질문자: 그리고 우리가 숙명이나 의지가 없다는 등의 견해에 저항하는 것은 사실 "나"라고 하는 이 에고가 자신이 소멸될까봐 두려워서 비명을 지르는 것이군요. 

 

라메쉬: 정확한 말이예요. 그리고 좀 더 깊이 들여다 보면 비난 받을 "나"란 없죠. 이렇게 저항하는 상황을 비난할 "나"도 없어요. 

 

질문자: 안됐군요. (웃음) 

 

라메쉬: 누구도 비난 할 수 없어요. 있는 모두가 참의식이기 때문이죠. 이 모든 "나", 수십억에 이르는 "나"를, 수십억에 이르는 이 에고를 누가 창조했을까요? 참의식이 아니면 누가 있어 자신을 각 개별 몸-마음 구조체와 동일시하겠습니까! 그래서 이렇게 수십억의 "내"가 서로 싸우고 사랑하고 증오하는 일을 릴라(Lila. 힌두교에서는 세상을 릴라, 즉 신이 하는 놀이라고 부른다. 놀이는 그냥 즐거운 것이지 특정한 목적이 있지 않기 때문이다. - 옮긴이)라고 부르는 겁니다. 우리는 부모나 환경을 선택할 수 없어요. 우리는 그냥 특정한 장소에서 특정한 부모 아래에서 태어났을 뿐이죠. 행동도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예요. 우리의 몸-마음 구조체가 밖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밖에서 들어오는 생각에 반응하는 것일 뿐이예요. 각각의 몸-마음 유기체는 자신이 타고난 성격에 따라서만 반응합니다. 그래서 같은 사건에 각각의 유기체들이 다르게 반응하는 것이지요. 선택의 문제가 아닙니다. 각각의 유기체는 자신이 창조될 때 타고나는 성격에 따라서 반응할 뿐이예요. 각 개별 유기체는 특정한 성격을 가지고 잉태되서 태어나기 때문에 그 유기체에 특정한 행동이 일어나는 것이죠. 그래서 이렇게 일어나는 행동은 참전체성의 비개별적 작용의 일부지요. 이런 까닭에 당신에게 정말로 책임이란 있을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당신은 행동을 일으키는데 쓰이는 도구일 뿐이죠. 비개별적인 일이죠. 당신은 단지 참의식이 작용하는데 쓰이는 도구일 뿐입니다. 

 

질문자: 그러면 에고도 역시 참전체성의 작용으로 봐야겠군요. 그리고 제가 그런 관점을 가질 수만 있다면 제대로 잘 하는 거군요. 맞습니까? 

 

라메쉬: 맞습니다. 그러면 제대로 잘 하는 겁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고 당신이 에고와 맞서 싸운다면 제대로 못하는 거죠. 에고를 받아들이고 맞서 싸우지 않아야 진전이 있어요. 큰 진전이 있을 겁니다. 놀라운 우주의 법칙들 중 하나가 저항이 없으면 충돌도 없다는 점이예요. 당신이 싸우지 않으면 에고도 싸울 수 없죠. 저항이 없으면 에고는 꽤 실망할 겁니다. 

 

질문자: 한번은 제가 아랫 마을에 사는 라마(소목 낙타과에 속하는 포유류 동물 - 옮긴이)들에게 먹이를 주고 있었는데 선생님의 이 말씀이 문뜩 생각나더군요. "나는 배고플 때 먹고 피곤할 때 잔다." 그러고 보니 라마가 그렇게 하고 있더군요. 라마는 의심하지도 않아요. 

 

라메쉬: 라마에게는 지능이 없지요. 그래서 구속된다는 개념도 없어요. 그래서... 

 

질문자: 자신이 해방된 사실을 모르는군요. 

 

라메쉬: 아니죠. 그렇지는 않아요. 구속되어 있다는 개념이 없기 때문에 구속에서 해방되어야할 필요도 없죠. 라마에게는 구속되어 있다는 개념이 없기 때문에 해방된다거나 깨닫는다는 것과는 관계가 없어요. 라마에게 일어나는 일은 육체가 "태어"났고 때가 되면 "죽을"것이라는 것이 전부죠. 이게 다예요. 창조되고 파괴되는 수 없이 많은 육체 가운데 하나가 될 뿐예요. 

 

질문자: 깨달은 사람과 자신이 깨달은 지를 모르는 사람은 어떻게 다른가요? 

 

라메쉬: 전혀 다를 게 없어요. 이점이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겁니다. 깨달음은 개인과는 전혀 상관없이 비개별적으로 일어나는 일일뿐인데 우리는 깨달음이 마치 한 개인의 업적인냥 떠들어대고 있어요. 그래서 "깨달은 사람은 어떻나?"는 질문을 해댑니다. 깨달은 사람 따위는 없어요. 깨달음도 다른 사건들과 다를 바 없이 그냥 또 하나의 사건일뿐이예요. 홍수나 화재, 지진이 일어나듯이 깨달음도 전체과정 속의 한 사건으로 일어날 뿐입니다. 모두가 현상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일뿐입니다. 깨달음은 현상세계 안에서만 의미가 있어요. 그래서 깨달음도 개념일 뿐이죠. 그런데 현상세계 속에 있는 마음이 본연의 상태라고하는 '없음'의 상태가 무엇과 같은지 알고 싶어해요. 이것은 깊은 잠의 상태가 어떤지를 묻는 것과 똑 같아요. 아무도 깊은 잠 속의 상태에는 관심이 없죠. 왜냐하면 다들 깊은 잠을 경험하니까요. 깊은 잠이 "무엇과 같나?"라는 질문은 생전에 잠 한 번 못 자본 사람이나 하는 질문이죠. 이런 사람만 그런 질문을 할 수 있어요. 

 

질문자: 그런 사람에게는 깊은 잠을 설명할 길이 없겠군요. 

 

라메쉬: 당연하죠. 좀 더 실질적인 예를 들자면, 선천적으로 시각장애를 안고 태어난 사람에게 색깔을 어떻게 설명하겠냐는 겁니다. 이 사람은 눈으로 볼 수가 없으니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만져보거나 듣고 맛보거나 아니면 냄새 맡아보는게 다죠. 

 

질문자: 선생님은 참 흥미로운 분이신 것 같습니다. 사실, 이 방에 흥미로운 사람들이 많이 보이는군요. 제 질문은, 왜 저는 이렇게 특정한 인물들에 흥미를 더 느끼는 걸까요? 

 

라메쉬: 기본적으로 사람들은 다 실제로 특정한 형태로 진동하는 에너지일 뿐입니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에너지 진동 형태와 조화로운 진동 형태를 가진 사람을 보면 "저 사람이 좋아."라고 말하게 되죠. 이 말은 진동하는 에너지의 개별 형태가 반응한다는 뜻이예요. 제가 말할 때 발생되는 에너지에 어떤 개별 형태들은 흥미롭다고 반응할 겁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말하자면, 이런 까닭에 여기 있는 진동하는 에너지의 개별 형태들이 함께 모인 것이죠. 이 모두가 현상 세계에서 일어나는 작용의 일부입니다. '참없음'이라는 잠재적인 것으로 들어가면 구속이나 깨달음, 지식 따위는 모두 무의미해집니다. 다 개똥 같은 소리죠. 필요 없어요. '참비현시'에서 동시에 자연 발생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세계의 비개별적인 작용을 그냥 지켜보기만 하면 됩니다. 공(空)에서 모든 것이 나옵니다. 비록 현상적으로 이해하는 것이라고 해도 이것만 이해하면 따로 이해해야할 것이 없어요. 나머지 것들은 전혀 필요 없어요. 하지만 여기서 뭔가를 더 얻고자 한다는 것은 개인이 자신을 개별적인 존재라고 믿기 때문이고 이 때문에 더 많은 말들이 필요해지겠지요. 

 

질문자: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는 모든 것이 다 개념 아닌가요? 

 

라메쉬: 물론이죠! 개념이 아닌 유일한 진리는 '여기 그리고 지금'이라는 존재감이죠. 이 비개별적 존재감에는 "나는"만 있지, "나는 철수다 또는 나는 영희다"는 없죠. 지금 이 순간에 있는 이 비개별적 존재감만이 유일한 진리입니다. 

 

질문자: 마하리쉬의 가르침이나 마하라지의 가르침이나 선생님의 가르침이나 다 개념일뿐이군요. 

 

라메쉬: 아, 그럼요. 그 두 분 모두 '아무것도 창조되지 않았고 아무것도 파괴되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시면서 그 점을 아주 명확히 하셨어요. 이 모두가 꿈이고 참의식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기에 개별적인 것은 없습니다. 

 

질문자: 자각하게 되면 하루 24시간 온종일 지속적으로 인식할 수 있게 되나요? 

 

라메쉬: 그렇죠. 하지만 그때는 그렇게 인식하는 것을 의식하는 이가 전혀 없어요. 이것이 모든 것의 핵심입니다. 인식하는 것을 의식하는 개인도 없고 에고도 없습니다. 그냥 인식하는 일이 일어날 뿐이죠! 

 

질문자: 하지만 라메쉬 선생님, 그렇게 아무도 없으면 우리는 어떻게 항복합니까? 

 

라메쉬: 바로 그점입니다. 아무도 없습니다. 항복하는 "이"도 없고 이해하는 "이"도 없어요. 항복하는 일은 그냥 일어납니다. 이해하거나 항복하는 어떤 개별적인 "누구"도 없이 이해는 일어납니다. 이것이 "나", 어떤 "이", 그 "누구"가 사라지면서 생기는 변화지요. 

 

질문자: 그래서 항복하는데 두려움이 일지 않군요. 희생하는 것이 아니군요. 

 

라메쉬: 바로 그거죠! 희생하는 누군가가 있는 한, 그것은 희생이 아닙니다. 겸손을 예를 들어 봅시다. "나는 겸손하다. 나는 거만한 사람이 아니다."라고 말들하죠. 가장 거만한 사람들이 겸손한 척하죠. 진정으로 겸손하면 겸손하다거나 거만하다는 느낌이 없어요. 이것이 진정한 겸손이죠. 진정한 동정은 "내가 동정한다."라고 느끼는 "내"가 없을 때 있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내가 사랑한다."라고 말하는 "내"가 없을 때 있어요. 동정과 사랑, 겸손은 "내"가 없는 '여기 그리고 지금'의 상태를 나타내는 말들입니다. 

 

질문자: 만일에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과 모든 것이 사라지면 참의식은 어떻게 됩니까? 

 

라메쉬: 남게되는 모든 것은 다 참의식이죠. 현상 세계는 없겠죠. 나타나는 세상이 없을 거예요. 

 

질문자: 그럼 무엇이 있나요? 

 

라메쉬: 늘 있어왔던, 신성한 바탕, 참의식, 참전체성, 진정한 하나의 참주체, 잠재적인 공(空), 신, 이것을 뭐라고 부르든지 간에 다 같은 것을 가리키는데, 바로 이것이 있습니다. 

 

질문자: 무슨 말씀인지는 알겠습니다만, 그것이 무엇과 같은지요? 

 

라메쉬: 그것은 어떤 것과도 같지 않죠. 왜냐하면 그것은 어떤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질문자: 삶을 참전체성이 행하는 비개별적 작용으로 받아들이면 헌신하는 것으로 돌아가는 것이 되나요? 

 

라메쉬: 헌신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이 순수한 헌신이고 지식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이 비개별성으로 돌아가는 것이죠. 

 

질문자: 제가 기능하려면 언제나 어떤 욕구가 있거나, 아니면 동기를 부여할 수 있는 어떤 기대하는 것이 있어야만 하는 것처럼 보였어요. 안 그러면 이 기능이 멈출 것 같네요. 

 

라메쉬: 모든 몸-마음 유기체는 잉태될 때 특정한 성격을 타고 나는데, 이런 성격의 작용은 절대 멈추지 않습니다. 

 

질문자: 욕구가 없을 때조차도요? 

 

라메쉬: 예, 욕구가 없을 때조차도 그렇고 본질적으로 불안감을 동반하게 되는 이런 동기가 없을 때도 그렇습니다. 차라리 불안감을 동반하는 동기가 없으면 일이 더 수월하게 진행됩니다. 몸과 마음은 계속해서 기능할 겁니다. 존재하지도 않는 "내"가 " 이제는 나에게 동기가 없는데 일을 계속 해야하나?"라고 묻는다고 해서 기능이 멈출 수는 없지요. 당신은 자신이 그 일을 하지 못하게 막을 수 없어요. 몸-마음 유기체는 자신이 타고난 육체적, 기질적, 정신적 특징들에 따라서 사전에 입력된 임무들을 수행하기 위해서 계속해서 기능해 나갈 겁니다. 

 

질문자: 욕구도 미리 입력되어 있는 것 같군요. 

 

라메쉬: 그렇고 말고요! 그래서 당신이 내 말을 듣고 욕구가 줄어들거나 불현듯 "그렇지!"하고 이해가 번뜩일 수도 있겠고, 아니면 전혀 효과가 없을 수도 있겠죠. 내 말을 듣고서 어떤 효과가 있을지는 당신 손에 달려있지도 않고 의지력의 문제도 아닙니다. 당신은 기다리면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지켜볼 수 밖에 없어요. 

 

질문자: 선생님 말씀은 참의식이 우리 환경에 가하는 환경 파괴도 일어나기로 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라메쉬: 누구의 환경이라니요?! 우리가 환경과 다를 게 뭡니까? 참의식이 이 환경을 창조했고 우리는 그 속에서 작고 꼭 필요하지만 하찮은 부분일뿐이죠. 

 

질문자: 글쎄요. 추상적 개념으로는 무슨 말씀인지 알겠지만, 직접 물 위에 떠 있는 기름 위에 서서 발이 온통 기름범벅이 되는 것을 보면 훨씬 현실적으로 다가오기 때문에 제가 책임에 관해서 말하는 겁니다. 우리가 오염된 물과 공기를 마시고 있는데 한 개인으로서 제가 걱정하지 않아야겠습니까?

 

라메쉬: 예. 보시면, '당신'은 그 일을 걱정할 수도 있어요. 다른 사람들은 "괜찮아 그럴 수 밖에 없지."라고 하면서 걱정 안 할 수도 있지요. 지금 전 농담하는 것이 아니라 아주 심각하게 말하는 겁니다. 이보다 더 심각할 수는 없어요. 걱정하고 화내는 일이 그 유기체 기능의 일부라면 당신은 걱정할 겁니다. 걱정하지 않을 수도 없고 화내지 않을 수도 없어요. 하지만 똑 같은 그 유기체에 지적 수준에서라도 이해가 밝아오면 이해는 심장으로 스며들어가고 확신이 생기면서 걱정하던 그 유기체가 예전만큼 그렇게 많이 걱정하지 않고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타고난 성격에 따라서 기능하는 것뿐이라는 사실을 깨우치기 시작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엄청난 해방감이 일어납니다. 이런 해방감이 얼마나 환상적인지는 일어나기 전까지는 상상도 할 수가 없을 거예요. 이런 자유를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는 자유라고 이해하면 됩니다. 자신이 해오던 일을 똑 같이 계속하면서 살아가는 자유인데, 여기에는 한 일에 따른 결과는 자신이 통제할 수 없다는 확신이 있습니다. 그래서 특별한 변화가 있지 않는 한, 자신이 해오던 같은 종류의 일을 계속해나가지요. 결과를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은 결과에 대해 걱정하기를 멈추고 해야할 일에 집중하는 것을 뜻합니다. ### 

 

질문자: 한 개인의 몸-마음이 태어나면서 유전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특정한 개체성을 가집니다. 예를들어 저는 다른 사람들과 다른 저만의 지문을 가지고 있는데, 제 지문은 누구와도 같지가 않아요. 이렇게 다르다는 것은 제가 의식하든 안 하든 상관없이 평생 계속되나요? 제가 가진 유전 요소 때문에 저 만의 특별한 삶을 살게 되나요? 그리고 제가 다르게 태어났기 때문에 살아가면서 다른 사람들과 다른 행동을 하겠군요? 

 

라메쉬: 당신이 자기 자신이라고 여기는 그 몸-마음 구조체가 잉태될 때 육체적, 정신적, 윤리적, 기질적 등등의 특정한 성격들이 새겨지는데, 이렇게 새겨진 성격들 때문에 참의식, 즉 참전체성이 그 몸-마음 유기체가 살아있는 동안,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그 유기체를 통해서 특정한 행동을 생산해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질문자: 그럼 전 이런 결론을 내야하는데요. 참의식이 아돌프 히틀러라는 인물이 생기도록 원했다면 피할 방법은 없군요. 

 

라메쉬: 그렇고 말고요. 

 

질문자: 히틀러는 자신이 해야할 일을 하려고 태어나야만 했군요? 

 

라메쉬: 그렇고 말고요. 세계 2차 대전은 일어나야 했죠. 수백 만 명이 목숨을 잃어야했습니다. 이 때문에 히틀러라고 이름 붙여진 몸-마음 구조체가 그런 성격들을 가지고 창조되어야만 했습니다. 히틀러가 그 전쟁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 그 전쟁이 히틀러를 창조한 것이예요. 

 

질문자: 그러니까, 참의식이 그 둘 다를 창조했군요. 

 

라메쉬: 그럼요. 참의식이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이 모든 꿈을 창조해왔어요. 참의식이 이 꿈속의 모든 인물을 통해서 그 모든 역할을 연기하고 있어요. 참의식 스스로 이 드라마를 연기하고 또 시청하고 있는 것이죠. 

 

질문자: 엄청난 사기극이군요! 

 

라메쉬: 그럼요. 정말로 사기극이죠. 이 모든 것이 사기극이고 터무니 없다는 사실을 깨우치면 그것이 깨달음입니다. 이 사실을 깨우치는 것이 완전히 실현되면 그것이 깨달음이죠. 

 

질문자: '나'라는 환상은 오직 고통과 괴로움만을 만들어 내는 것 같군요. 이것은 어떻게 시작되었나요? 

 

라메쉬: 방금 시작됐죠! 하지만 당신에게는 죄가 없어요. 이 때문에 제일 중요한 말이 누구도 어떤 일에 죄가 없다는 말이죠. 자기 자신을 그 '나'와 동일시한 것이 바로 참의식이죠. 참의식이 이 몸마음 유기체를 통해서 "삶"을 살아가고 있어요. 참의식이 얼마나 오랫동안 이렇게 해왔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참의식이 무슨 목적으로 이러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왜 신경쓰냐는 겁니다. 왜 신경 써요? 그냥 일어나는 일을 지켜보세요. 당신을 통해 일어나는 행동을 자신의 행동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신경쓰는 겁니다. 그냥 참의식, 신, 참전체성, 또는 어떤 이름으로 부르든지, 이것의 행동이라고 여기세요. 그리고 이런 행동은 필연적으로 그 유기체가 타고난 성격에 국한됩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세상 모든 곳에 존재하는 비개별성을 보게됩니다. 그리고 이런 영적 과정의 비개별성을 보게되면 그 개별적인 "나", 즉 에고는 뒤로 물러나야 하지요. 당신이 에고를 뒤로 미는게 아니예요. 당신은 자신의 에고와 싸울 수 없어요. 다만 이렇게 일어나는 이해때문에 그 에고가 뒤로 밀려나는 것이지요. 

 

질문자: 제 생각에는 선생님께서 은총을 말씀하시는군요. 

 

라메쉬: 물론이죠. 자 보자구요! 지금 여기서 당신이 대담을 듣고 있어요. 밖에 있는 수 많은 사람은 이런 주제에 관심도 없어요. 그럼 당신을 여기로 이끈 것이 은총이 아니겠어요? 

 

질문자: 은총이예요.

 

라메쉬: 그럼 당신을 여기로 데려온 것이 은총이라면 당신을 여기로 데려온 그 은총이 어디로 가려하든지 그냥 원하는 곳으로 가게 내버려두는 것은 어떨까요? 

 

질문자: 그렇게 은총이 제 갈 길을 가도록 어떻게 하면 비켜줄 수 있는지 알아내려고 무지 애쓰고 있어요. 

 

라메쉬: 그럴 필요없어요. 당신이 막아서지 않는 한 비켜설 필요가 없습니다. 일어나는 일을 그냥 지켜만 보세요. 당신은 이미 비켜 서 있습니다. 그 모든 문제가 생기는 까닭은 바로 당신이 비켜서야만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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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자: 선생님께서는 자유의지도 없고 숙명도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둘 다 개념이죠. 왜 그냥 있으면 안 됩니까? 

 

라메쉬: 바로 그거죠! 아주 잘 말했어요! 숙명과 자유의지에 관한 의문이 언제 일어납니까? 누가 그런 의문들을 일으키죠? 바로 개인이 그런 의문을 일으키는데, 만일 당신이 모든 것에 깃든 비개별성을 보게 된다면 어떤 의문도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개인의 관점에서 보면 문제는 끊이지 않죠. 하지만 일어나는 모든 일이 비개별적으로 일어난다는 사실을 보는 순간 어떤 문제도 일어나지 않아요. 

 

                        -웨인 리쿼만 편집, 김영진(관음) 번역<라메쉬 발세카와의 대담, 참의식이 말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