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안선사의 금강경 강의(13)

2020. 4. 7. 22:39성인들 가르침/금강경

여법수지분(如法受持分) 제십삼(第十三)


[본문]

爾時(이시)에 須菩提(수보리)가 白佛言(백불언)하되 世尊(세존)이시여 當何名此經(당하명차경)이며

我等(아등)이 云何奉持(운하봉지)리이까 佛告須菩提(불고수보리)하시되 是經(시경)은 名爲金剛 般若波羅密이니

以是名字(이시명자)로 汝當奉持(여당봉지)니 所以者何(소이자하)오 須菩提(수보리)야 佛說般若波羅密(불설반야바라밀)은 即非般若波羅密(즉비반야바라밀)이요 是名般若波羅密(시명반야바라밀)일세니라

그때에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루어 말씀하되, 세존이시여,마땅히 이 경을 무엇이라 이름하오며, 우리들이 어떻게 받들어 가지오리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이르사대 이 경 이름이 금강반야바라밀(金綱般若波羅密)이니, 이 명자로써 네 마땅히 받들어 가질지니라. 어찌한 소이이냐. 수보리야, 내가 말한 반야바라밀은 곧 반야바라밀이 아니요, 이 이름이 반야바라밀이니라. 

[해설]

부처님께서 이 경 이름을 금강반야바라밀이라, 하신 소이는 반야바라밀이 반야바라밀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하시었다. 바꾸어 말하면 반야바라밀이 아닌 것이, 반야바라밀이라는 뜻이니, 다시 말하면, 마음은 마음이 아닌 것이, 마음이 된다는 말과 같다. 반야바라밀이라 해도, 반야바라밀이 아니요, 반야바라밀이 아니라 해도, 옛 부처 생기기 전부터 반야바라밀인 것을 어찌하랴. 그렇다고 해도 아니요, 아니라고 해도 그러하니, 그렇고, 그렇지 않은 것을 의논치 말라. 그렇다 해도 좋고, 아니라 해도 좋다. 


[본문]

須菩提(수보리)야 於意云何(어의운하)오 如來有所說法不(여래소설법부)아 須菩提(수보리)가 白佛言(백불언)하되

世尊(세존)이시여 如來無所說(여래무소설)이니이다

수보리야, 네뜻이 어떠하냐. 여래가 설한 바 법이 있느냐, 없느냐, 수보리, 부처님께 사루어 말씀 여쭈되,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설한바가 없습니다. 

[해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법을 성취하여, 저 언덕이 이른 자에게는 이따위 소리가 군소리인 것이다. 입 한번 안 벌려도, 법 설하시는 소리, 천지가 진동하고, 부처나기 전부터 지금까지 설법을 하여도, 한 소리도 들리지 않으니 무엇을 가르쳐 설법이라 하고, 무엇을 일러 설법이 아니라 할 것인가. 


[본문]

須菩提(수보리)야 於意云何(어의운하)오 三千大千世界(삼천대천세계)가 所有微塵(소유미진)이 是爲多不(시위다부)아 須菩提言(수보리언)하되 甚多(심다)니이다. 世尊(세존)이시어, 須菩提(수보리)야 諸微塵(제미진)은 如來說非微塵

여래설비미짐)일세, 是名微塵(시명미진)이니 如來說世界(여래설세계)도 非世界(비세계)일새 是名世界(시명세계)니라.

수보리야 네 뜻이 어떠하냐. 삼천대천세계에 있는 미진을 많다 하겠느냐, 아니겠느냐. 

수보리 말씀 여쭈되, 매우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수보리야, 모든 미진을 여래께서는, 미진이 아니라, 이 이름이 미진이라고 말씀하시고, 여래께서는, 세계가 세계가 아니라, 이 이름이 세계라 하였나니라. 

[해설] 

미진(먼지)이 합하여, 세계가 되고, 세계가 부서져 미진이 된 것이니, 미진을 버리고 세계가 따로 없고, 세계를 떠나서 미진이 따로 없으니, 미진이 미진이 아니요 세계가 세계가 아님을 알 것이다. 한 생각이 걸리면 팔만사천의 번뇌가 생기고, 한 생각이 비어, 통하면, 팔만사천의 불보리(佛菩提)를 성취하는 것이니, 번뇌를 버리고 보리를 찾을 수 없고, 보리를 떠나서 번뇌가 따로 없을새, 번뇌와 보리가 이름 뿐이요 번뇌와 보리가 둘이 아님을 알지니라. 


[본문]

須菩提(수보리)야 於意云何(어의운하)오 可以三十二相(가이삼십이상)으로 見如來不(견여래부)아 不也(불야)니이다.

世尊(세존)이시여 不可以三十二相(불가이삼십이상)으로 得見如來(득견여래)니 何以故(하이고)오 如萊說(여래설) 三十二相(삼십이상)은 即是非相(즉시비상)일새 是名(시명) 三十二相(삼십이상)이니이다.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냐. 가히 삼십이상으로써 여래를 보겠느냐. 마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가히 삼십이상으로써 여래를 얻어보지 못할지니, 어찌한 연고입니까, 여래께서 말씀하신 삼십이상은, 곧 이것이 상이 아니라, 이 이름이 삼십이상이기 때문 입니다. 

[해설]

삼십이상으로 여래를 본다 하여도, 옳지 않고, 삼십이상으로써 여래를 보지 못한다 하여도 옳지 않으니, 모두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아니요, 금강반야바라밀이 아닌 소이이다. 

독자여 ! 어떻게 보아야 여래를 참으로 본 것이 될른지, 한번 말해 보라. 


[본문]

須菩提(수보리)야 若有善男子(약유선남자) 善女人(선여인)이 以恒河沙等身命(이항하사등신명)으로 布施(보시)하고

若復有人(약부유인)이 於此經中(어차경중)에 乃至受持四句偈等(내지수지사구게등)하여 爲他人說하면 其福(기복)이

甚多(심다)니라.

수보리야, 만약 선남자 선여인이 있어, 항아 모래와 같은 많은 목숨을 바쳐 보시하였을지라도, 만약 어떤 사람이고 이 경 가운데에 내지 사구게 등만 수지하여, 남을 위하여, 일러주는 이가 있다면, 그 복이 훨씬 많느니라.

[해설]

무엇보다도 중히 여기고 애착하는 것이, 자기의 생명인 것인데, 어떤 사람이 자기의 목숨을 아끼지 않고 다생을 두고 보시하였드래도, 이 경의 사구게를 남에게 일러준 복덕만 못하다는 말씀이시다. 

사구게의 공덕이 어찌하여 많고 큰가. 사구게를 수지하여 남을 일러주는 자는, 아뇩보리를 성취한 자요, 반야바라밀이 된 자이기 때문이다. 

독자여 ! 물을 마시는 사람이라야, 차고 더운 것을 자기 스스로 알 것이요, 다른 사람의 알바가 아니니, 아무리 그 복이 많고 크다 한들, 어찌 믿어 알리요, 고인의 글에 <산에 산에 무엇이 있나, 봉우리 봉우리에 흰구름도 많네. 이리 좋은 경치를 나만 혼자 즐길 뿐, 가져다 임 앞에 바치지는 못 하네.> 하였다. 


                                           -해안 스님 강의 <금강반야바라밀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