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안선사의 금강경 강의(14-2)

2020. 5. 22. 21:35성인들 가르침/금강경

離相寂滅分(이상적멸분) 第十四(제십사) -②

 

[본문] 

須菩提(수보리)야 忍辱波羅蜜(인욕바라밀)도 如來說非忍辱波羅蜜(여래설비인욕바라밀)이요

是名忍辱波羅蜜(시명인욕바라밀)이니 何以故(하이고)오 須菩提(수보리)야 如我昔爲歌利왕(여아석위가리왕)에

割截身體(랄절신체)로되 我於爾時(아어이시)에 無我相(무아사)하며 無衆生相(무중생상)하며 無壽者相(무수자상)이니 何以故(하이고)오 我於往昔(아어왕석) 節節支解時(절절지해시)에 若有我相人相(약유아상인상) 衆生相壽者相(중생상수자상) 應生嗔恨(응생진한)이니라.

수보리야, 인욕바라밀도 인욕바라밀이 아니요, 이 이름이 일욕바라밀이라고, 여래가 말하였느니라. 

어찌한 연고이냐. 수보리야 내가 옛적 가리왕에게 신체를 베이고, 끊음을 당하였으되, 내가 그때에 아상이 없어냐, 내가 지나간 날 마다마디 사지를 찢길 때에, 만약,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 있었다면, 응당 성내고, 원망하는 마음을 내었을 것이니라. 

[해설]

가리는, 번역하여, 극악하다는 뜻이니, 옛날 인도에 가리왕이 있었고, 부처님은 그때에 인욕행을 닦는 선인(仙人)이 되시었다 한다. 하루는 가리왕이 산중에서 사냥을 하다가, 곤하여 잠을 자고 깨어본즉, 시녀들이 한 사람도 보이지 않으므로, 이리 저리 찾아본즉, 이 시녀들은, 어떤 선인이 편안히 앉아 있는 곳을 둘러싸고, 예배를 드리고 있거늘, 왕은 크게 노하여, <그대는 어찌하여 방자히 남의 여색을 탐내는가> 선인이 말하기를, 나는 <인욕계(忍辱戒)를 갖는다>고 대답하였드니, 왕이 칼로 선인의 몸을 오리고, 끊고 하였으나, 선인은 엄연히 안색을 불변하고, 가리왕을 원망하는 생각도 없었다는 이야기가 경에 있다. 

 

[본문]

須菩提(수보리)야 又念過去於五百世(우념과거어오백세)에 作忍辱仙人(작인욕선인)하여 於爾所世(어이소세)에

無我相(무아상)하며 無衆生相(무중생상)이니

수보리야, 또 생각하니 과거 오백세에 인욕선인이 되었던 그 세상에서도 아상,인상,중생상도 없었고 수자상도 없었더니라. 

[해설]

모기만 물어도 가려움을 느껴, 견디기가 어려웁거늘, 어찌 칼로써 찌르고, 끊고, 도리고 함을 참아서, 견딜 수가 있을 것인가. 참는다는 것은 도무지 거짓말이다. 선인은 할절신체(割截身體)를 당할 때에도 가리왕을 보지 못하였던 것이다. 선인이라는 내가 없거니, 선인을 해칠 가리왕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부처의 몸을 칼로써 베인다는 것은 번개빛 그림자 속에 봄바람을 베이는 것과 같은 것이다. 

 

[본문]

是故(시고)로 須菩提(수보리)야 菩薩(보살) 應離一切相(응리일체상)하고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하되 不應住色(불응주색)하고 生心(생심)하며 不應住聲香味觸法(불응주성향미촉법)하고 生心(생심)하여

應生無住心(응생무주심)이니라 若心有住(약심유주)하면 即爲非住(즉위비주)니

이러고로 수보리야, 보살이 응당 일체 상을 여의고 야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할 것이니, 응당 색에 머물러 마음을 내지 말며, 응당 소리나, 향기나, 맛이나 부딧침이나, 법에, 머물러 마음을 내지말지니, 만약 마음에 주가 있으면 곧 주 아님이 되나이다. 

[해설]

우리들이 편안히 살려면 마음이 고요하여야 하나니, 

마음이 고요하려면 싸우지 않아야 하고 

싸우지 않으려면 시비가 없어야 하고, 

시비가 없으려 하면 분별이 없어야 하고 

분별이 없으려면 마음이 공해야 하고, 

마음을 비고자 하면 일체 상이 없어야 하고, 

일체 상을 없이 하려면 이 마음을 붙잡아 놓아야 하고, 

이 마음을 붙잡아 놓으려면 이 마음을 붙잡아 매일 주처, 즉 머물러 있을 곳을 정하여 놓아야 한다. 

이 마음의 주처를 정하여 잡아매지 않고는 시끄러워 살수가 없는 것이다. 

시끄러우면 편안치 못하고 편안치 못하면 괴로웁고, 괴로우면 잘사는 것이 못된다.  

그러므로 이 경의 법문이 맨 첫머리에서 수보리가, 부처님께 어떻게 그 마음을 머무르며, 어떻게 그 마음을 항복 받으오리까 하는 물음으로 부터 시작하여, 이 경 전부가 이 뜻을 묻고 이 뜻을 대답한 것으로 마치는 것이니, 부처님이 일체 중생을 하나도 남김없이 잘 살도록 건지려는 대자대비심이, 이토록 간절하심을 잘 알수 있다. 

그러면 우리들은 어떻게 이 마음을 어데다 붓잡아매어 그 주처를 정하여 줄것인가. 이것이 우리들이 잘 살아보려는데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된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수보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시었다. 

<당연히 일체 상을 떠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하여야 한다>고.

다시 한번 말하면 육진 경계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지 말고 주한 바 없는 마음을 내라는 말씀이시다. 

또 다시 자세히 말하면, 크고,작고,밝고,어둡고,밉고,곱고,깨끗하고, 더러웁고, 친하고, 서먹하고, 착하고, 악하고, 괴로웁고 즐겁고, 지혜있고 미련하고, 성현이고 범부이고, 참이고, 거짓이고, 상이고, 상아니고, 쓰고,못쓰고, 고르고, 옳고, 낳고, 죽고 이러한 등, 모든 일체 상을 여이고, 그 마음을 쓰라는 말씀이시다. 

이 소리는 무엇인가 하면, 이 법이 본래 정해진 법이 없고, 이 마음이 본래 정해진 마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마음이 어데 한 군데나, 한 물건에나 주(住)하고 있다 하면, 이것은 마음의 참주체가 못되는 것이니, 

마음의 주처는, 무주처가 주처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무주(無住)라고 하는 말은, 무주(無住)에도 주(住)함이 없는, 무주에 주하는 것이, 마음의 주처라는 말이니, 

주(住)가 없으므로 일체 상(相)을 여이고, 주(住)가 없으므로 일체 상(相)을 놓아 두게 될새, 

우리들의 마음을 이 무주(無住)에다 붙잡어 매어, 놓으며, 이것이 주(住)가 된다. 

주(住)가 된다는 말은, 마음이 제자리에 있게 된다는 뜻이니, 

마음이 제 자리에 있게 되면, 종일 먹어도 먹는 것이 아니요, 종일 입아도 입는 것이 아니요, 종일 가도 가는 것이 아니요, 종일 울어도 우는 것이 아니요, 종일 웃어도 웃는 것이 아니요, 종일 보아도 보는 것이 아니요, 종일 들어도 듣는 것이 아니므로, 언제나 마음은 제자리, 즉 무주(無住)에 주(住)하게 되는 것이다. 

 

[본문]

是故(시고)로 佛說(불설) 菩撒心(보살심)은 不應住色布施(불응주색보시)라 하니라.

이러므로 불이 말씀하시되, 보살은 마음을 응당 색에 주 하지 않고, 보시한다 하니라. 

 

[본문]

須菩提(수보리)야 菩薩(보살)이 爲利益一切衆生(위이익일체중생)하여 應如是包施(응여시보시)니

수보리야 보살이 일체중생을 이익되게하기 위햐여 응당 이와 같이 보시 하나니

[해설]

색에 주하는 것만 상이 아니라, 색에 주하지 않는 것도 상이니, 

보시한다는 것도 상이며, 일체 중생을 이익되게 한다는 것도 상이니, 

어떻게 하는 것이 상이 주하지 않는 보시일까. 

상(相)이 상(相) 아닌 줄 알면, 이것이 곧 상(相)에 주(住)한 것이 아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상이 상 아닌 것이 되는가. 

이 세계는 상 밖에 한 물건도 없기 때문이니, 

상이다, 상 아니다, 하는 이것이 무엇일가. 

그리고 또 이 상이 어디서 나왔을가 모두가 이것이다, 

이것도 이것이요, 저것도 이것이다. 

산과 산, 물과 물이, 다 진여(眞如)아님이 없고, 

꽃과 꽃, 풀과 풀이 무엇 하나 반야가 아니랴 !

마음만 제 자리에다 주(住)하여 보라. 

무엇 하나 딴 물건이 있을 것인가. 

주한다 하여도 이것이요, 주하지 않는다 하여도 이것이요,

상이라 하여도 이것이요, 상이 아니라 하여도 이것이요, 

상에 착한다 하여도 이것이요, 상을 여이었다 하여도 이것이요, 

번뇌라 하여도 이것이요, 보리라 하여도 이것이요, 

거짓이라 하여도 이것이요, 참이라 하여도 이것이요,

열반이라 하여도 이것이요, 생사라 하여도 이것이요,

지옥이라 하여도 이것이요, 천당이라 하여도 이것이요, 

불이라 하여도 이것이요, 중생이라 하여도 이것이요,

있다 하여도 이것이요, 없다 하여도 이것이요,

마음이라 하여도 이것이요, 마음 아니라 하여도 이것이니,

이것 밖에는 한 물건도 없는 줄을 믿어서 알면, 

이것이 곧 상이 상이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보살은 일체 상으로써 보시할지라도, 

이것은 부주상 보시임을 알아야 한다. 

이렇게 보살들은 일체 중생들을 위하여 허공과 같이 보시를 하나니라.

 

                            -혜안 선사 강의 <금강반야바라밀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