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탐구의 실제수행방법정리(3)

2020. 3. 4. 09:57성인들 가르침/라마나 마하리쉬

 : 초심자는 자아탐구를 어떻게 시작해야 합니까?

 : 마음은 오로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탐구함으로써만 다스릴 수 있다. 불을 지피고 이리저리 뒤집다가 마지막에는 자신도 불길에 던져지는 화장터의 막대기처럼, '나는 누구인가?'라는 생각은 다른 모든 생각들을 소멸시킨 뒤에, 마지막에는 그 자체도 소멸된다. 

만약 딴 생각이 일어나거든, 그 생각의 뿌리를 파고 들어서 캐내려고 하지 말고 '이 생각이 누구에게 일어나는가?'하고 자문해 보라, 아무리 많은 생각이 일어난다고 해도 쾌념치 마라. 어떤 생각이 일어날 때마다 그 순간을 놓치지 말고 '이 생각이 누구에게 일어나는가? '라고 묻는다면 '나에게서' 일어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런 다음 다시 '나는 누구인가?'라고 물으면, 마음은 그 근원(참나)으로 돌아가고, 일어났던 생각들도 사라질 것이다. 또한 이런 수행을 거듭하면 마음이 그 근원에 머무는 힘이 커질 것이다. 

때로는 오랜 세월에 걸쳐 반복된 '감각대상을 좇는 습성이 바다의 파도처럼 무수히 일어날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본성에 대한 탐구가 깊고 강렬해지면 이것들은 모두 소멸된다. 끈질기게 '자기주시'로 되돌아가라. '이 온갖 습을 모두 소멸하고 <나>에만 머무는 것이 가능할까? 라는 의심이 일어날 여지를 주지 말라.

'감각 대상을 좇는 마음의 습성'이 남아 있는 한, '나는 누구인가?'라는 탐구는 계속 되어야만 한다. 

한 생각이 일어나면, 생각이 일어난 바로 그 자리를 파고들어 그 뿌리를 탐구함으로싸 그것을 깡그리 소멸해야 한다. <나>가 아닌 다른 생각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것이 무집착 또는 무욕이다. 

<나>를 떠나지 않는 것이 앎 또는 깨달음 지혜(jnana)이다. 그러므로 무욕과 깨달음 지혜는 사실상 같다. 진주를 캐는 사람이 허리에 무거운 돌을 매달고 바닷속으로 뛰어들어 바다 밑에 있는 진주를 캐내듯이, 집착하지 않고 자신의 내면을 향해 깊히 뛰어들면 누구든지 <참나>라는 진주를 얻을 수 있다. 

<참나>의 깨달음에 이를 때까지 본성의 기억을 부단히 견지한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속박되어 있는 나라는 존재는 누구인가? 를 탐구함으로써, 자신의 진면목을 밝히는 것이 곧 해탈이다. 마음을 늘 <나>에 고정시키는 것이 '자기탐구'이며, 스스로를 '존재-의식-지복' 상태의 절대자라고 생각하는 것이 명상이다. 


 : 아무리 '나'를 찾아보아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 그대는 육체를 그대 자신과 동일시하는 그릇된 습관과 눈에 보이는 것만 보인다고 생각하는 것이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보이는 것은 무엇이고, 보는 자는 누구이며, 어떻게 보는가?

오직 하나의 의식만 있을 뿐이다. 그 의식이 '나라는 생각'으로 나타나서 육체와 자신을 동일시하고, 눈을 통해 스스로 투사하여 주위의 사물을 보는 것이다. 사람들은 깨어 있는 상태만을 기준으로 무엇이 보인다든지 보이지 않는다고 판단한다. 감각을 통해 경험한 것만을 확실한 것으로 여긴다. 보는 자, 보이는 대상, 보는 과정이 모두 동일한 의식, 곧 '참자아'의 현현(현현)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고요하게 숙고해 보면 참자아가 눈에 보여야만 한다는 환상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참자아는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다. 그대는 지금 그대가 존재한다는 것을 느끼고 있다. 어떻게 그렇게 느낄 수 있는가? 거울을 놓고 그 속에 비친 그대의 모습을 본 다음에 그대가 존재한다는 것을 아는 것인가? 거울에 비친 그대의 모습을 눈으로 확인하지 않고도 그대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 않은가? 이점을 깨닫도록 하라. 이것이 진리이다. 


 : 생각의 근원을 파고들어가다 보면 일종의 '나'에 대한 자각 같은 것이 생깁니다. 하지만 그걸로 만족할 수 없는 것 아닙니까?

 : 그렇다, 그대가 말하는 '나'라는 지각은 어떤 형태와 연관되어 있다. 아마 육체와 연관되어 있을 것이다. 순수한 참자아는 무엇과도 연관되지 않아야 한다. 참자아는 아무 것도 연관되지 않은 순수한 실재이다. 참자아의 빛에서 육체와 에고가 나온다. 모든 생각이 가라앉아 고요해지면 순수한 의식자체만 남는다. 

잠에서 막 깨어나는 순간, 아직 인식하기 직전에 순수한 '나'가 있다. 다시 잠에 빠지지도 말고 어떠한 생각이 일어나도록 하지도 말고, 그 순간에 순수한 '나'에 머물도록 하라. 확고하게 순수한 '나'에 머물수만 있다면 외부세계가 눈에 보여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때 '보는 자'는 현상의 영향을 받지 않고 순수한 상태에 머문다. 

에고가 무엇인가? 탐구해 보라. 육체는 지각하는 힘이 없다. 따라서 육체가 '나(에고)'라고 할 수 없다. 참자아는 주체와 대상이 구별이 없는 순수의식이다. 그러므로 참자아 역시 에고가 아니다. 에고는 다른 것과 '나'를 구별하기 때문이다. 잠자는 동안에도 '나'라는 에고가 없다. 그렇다면 에고란 무엇인가? 에고는 참자아와 스스로 자각능력이 없는 육체를 연결하는 그 어떤 것이다. 에고는 확고부동한 실체가 아니다. 찾아보면 유령처럼 사라진다. 

어떤 사람이 밤에 자기 옆에 비친 어두운 그림자를 보고 귀신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자세히 살펴본다면 그건 귀신이 아니라 옆에 서 있는 나무의 그림자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 보지 않으면 귀신 때문에 무서워 벌벌 떨 것이다. 그가 해야 될 일은 자세히 살펴 보는 것 뿐이다. 그러면 귀신은 사라진다. 애당초 귀신은 없었던 것이다. 에고도 마찬가지다. 에고는 육체와 순수의식을 연결하지만 실체가 없다. 자세히 살펴 보지 않으면 에고는 계속 문제를 일으키지만, 자세히 탐구해 보면 에고가 실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이와 관련된 또 하나의 이야기가 있다. 힌두교인의 결혼 잔치는 보통 5~6일 정도 계속된다. 힌두교인의 결혼 잔치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 낯선 사람이 잔치집에 왔다. 신부측 사람들은 그를 귀한 손님으로 보고 특별한 대접을 했다. 그것을 본 신랑측 사람들은 그가 신부측과 관련된 귀한 손님인 줄 알고 역시 극진한 대접을 했다. 낯선 사람은 양쪽에서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즐거워 했다. 하지만 상황이 어찌 돌아가고 있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신랑측 사람들은 그가 누구인지 알고 싶어졌다. 그래서 신부측 사람들에게 그가 누구냐고 물었다. 그 순간 그 낯선 이방인은 일이 잘못되는 낌새를 채고 슬그머니 도망가 버렸다. 에고도 마찬가지다. 자세히 조사해 보면 사라진다. 그렇지 않으면 계속 문제를 일으킨다. 


 : '나라는 생각'이 저에게서 일어나는 것은 알겠는데, 참나는 도저히 모르겠습니다. 

 : 그대가 아직 정신적인 개념(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해서 그렇다. 그대는 지금 참나가 아닌 '나라는 생각'과 그대 자신을 동일시하고 있다. '나라는 생각'은 떠올랐다가 가라앉고,가라앉았다가 다시 떠오른다. 그러나 '나'의 진정한 본체는 떠오르지도 않고 가라앉지도 않는다. 그대의 진정한 본체는 늘 그대로 존재한다. 결코 단절되지 않는다. 

그러나 '나라는 생각'은 그렇지 않다. 있다가 없고, 없다가 또 생긴다. 그대의 진정한 본체는 그대가 잠을 잘 때도 있었고, 깨어있는 지금도 있다. 그러나 그대가 생각하는 '나'는 잠을 자는 동안에는 불행을 느끼지 못했는데, 깨어있는 지금은 불행하다고 느낀다. 어째서 그러한가? 자는 동안에는 '나라는 생각'이 없었지만, 지금은 '나라는 생각'이 있기 때문이다. 참자아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거짓된 자아는 드러나 앞으로 나선다. 이 거짓된 자아가 어디서 나오는지 근원을 찾아보라. 그러면 그대는 진정한 그대, 곧 절대적인 실재로 존재하게 될 것이다. 


                     -데이비드 갓맨 편집,정창영 옮김 <있는 그대로> 한문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