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탐구의 실제수행법과 이론 정리(4)

2020. 3. 12. 20:03성인들 가르침/라마나 마하리쉬

"내가 있다(I am)'는 느낌은 우리 모두에게 공통되는 경험이다. 

여기서 "있다(am)'는, 의식 혹은 앎이다. 

이 앎은 외부적인 어떤 것에 대한 앎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앎이다.

이것이 의식(chit)이다. 이 의식이 '우리'이다. 

"우리는 진실로 의식이라네" 라고 스리 바가반은 <우빠데샤 운디야르> 제23연에서 말한다. 

것이 우리의 '있음' (우리의 침된 존재성), 곧 존재(chit)이다. 

이것을 '존재하는 것(實在)이라고 한다.

래서 '내가 있다'에서 '나'는 존재이고, '있다'는 의식이다. 


진아, 곧 우리의 존재-의식의 성품이 '내가 있다'는 순수한 의식으로만 빛나지 않고, 

어떤 부가물과 혼합되어 '나는 사람이다. 나는 라마다, 나는 이것 또는 저것이다.'로서 빛날 때, 

이 혼합된 의식이 에고이다. 

이 혼합된 의식은 하나의 이름과 형상을 붙들어야만 일어날 수 있다. 

우리가 '나는 사람이다, 나는 라마다, 나는 앉아 있다, 나는 누워 있다'고 느낄 때, 

우리는 몸을 '나'라고 착각하고 있고, 그 몸의 이름과 자세를 '내가 이것이고, 내가 이러 하다'고 여기고 있음이 분명하지 않은가? 지금 일어난 '이것이다'와 '이러한다'는 느낌이 '내가 있다'는 순수한 의식과 혼합된 것을 '생각'이라고 한다. 이것이 최초의 생각이다. 

'나는 사람이다. 나는 아무개다'라는 느낌은 하나의 생각일 뿐이다. 

그러나 '내가 있다'는 의식은 하나의 생각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있음'의 성품 자체이다.

'나는 이것이나 저것이다'라는 혼합된 의식은 우리의 '있음'에서 일어나는 하나의 생각이다. 

이 생각이 일어난 뒤에야 혼합된 의식(1인칭), 2인칭과 3인칭들에 대한 앎인 저 다른 모든 생각들이 생겨난다.


1인칭이 존재하야만 2인칭과 3인칭이 존재한다네 !

                                  -실재사십송 제14연-


이 혼합된 의식, 곧 1인칭을 우리의 '일어남' 혹은 에고의 일어남이라고 한다. 

이것이 원초적인 사고(思顧)이다 ! 그래서 이렇게 말한다. 


생각하기는 하나의 사고 작용이지만, '있음'은 사고작용이 아니다. 

                                                    -자기탐구 11연시 제1연-


순수한 존재의식인 '내가 있다'는 하나의 생각이 아니다. 

이 의식은 우리의 성품이다. '나는 사람이다'는 우리의 순수한 의식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생각일 뿐이다! 

이와 같이 무엇보다도 우리의 '있음'과 우리의 '일어남' 간의 (즉, 존재와 사고 간의) 차이를 이해하는 것이 

'나는 누구인가?'의 탐구에 착수하는 구도자들에게 필수적이다. 


바가반 스리 라마나는 자기탑구를 '나는 누구인가?'형태로 할 수도 있고, '나는 어디서 오는가?(Whene am I) 형태로 할수 있다고 조언했다. 

이 두 의문문을 들은 많은 구도자들은 지금까지 그에 대해 다양한 의견을 가졌고, 그 중의 어느 것을 수행하고 어떻게 수행할지에 대해 헷갈려 하고 있다. 

두 문장이 동일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많은 사람들은 피상적인 이해만 지닌 채 그것이 어째서 동일한지 깊히 살펴 보지 않았다.

 

전자의 물음인 '나는 누구인가?'를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 중 일부는 단순히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하고 소리내어 혹은 마음 속으로, 마치 그것이 하나의 진언염송인양 앵무새처럼 되풀이 하기 시작한다. 

이것은 완전히 잘못된 것이다 ! 

이런 식으로 '나는 누구인가?'의 염송을 하는 것은 '나는 브라만이다'등과 같은 큰 말씀에 대해 명상하거나 그것을 염송하는 것만큼이나 좋지 않으며, 그리하여 그것을 가르쳐 준 목적자체를 망치게 된다 !

스리 바가반 자신이 "'나는 누구인가?'는 염송을 하라는 게 아닙니다."라고 되풀이 해서 이야기 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이 두 번째 의문형인 "나는 어디서 오는가?"를 따르고 있다고 생각하고, 

가슴 오른쪽(그들이 영적인 심장으로서 어떤 것을 상상하는 곳)에 집중하려고 애쓰면서 '나는 여기서 나온다'와 같은 어떤 답을 기대한다! 이것은 몸 안의 여섯 차크라 중 하나에 대해 명상하는 고대의 방법보다 결코 나을 것이 없다! 그도 그럴 것이, 몸 안의 어떤 곳을 생각하는 것은 하나의 2인칭 주시(대상적 주시)에 불과하지 않은가? 

우리가 자기 탐구의 기법을 설명하기 전에 그런 오해들을 제거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지 않겠는가? 

따라서 그런 오해들이 어떻게 제거될지 보기로 하자. 


산스크리트어로 '아뜨만(atman)'이라는 말과 '아함(aham)'이라는 말은 둘 다 '나'를 뜻한다. 

'아뜨마-비짜라(ayma- vichara,자기탐구)는 ' 이 나는 누구인가?'를 추구하는 하나의 주의집중을 의미한다. 

그것을 '나-주시', '자기주시' 혹은 '진아주시'라고 할 수도 있다. 

이처럼 여기서 말하는 '나'라는 의식은 1인칭 느낌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말했듯이, '나는 이것이다'나 '나는 저것이다'와 같은 부가물들과 혼합된 그 의식은 에고 혹은 개아인 반면, 부가물들이 없이 '나-나'(혹은 '나는 내가 있다는 것이다)로서만 빛나는 순일무잡한 의식은 진아(Atman), 절대자(Brahman) 혹은 신(Iswara(이라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그렇다면 그것은 1인칭 의식인 '나'가 에고일 수도 있고, 진아일 수도 있다고 말하는 것과 다름없지 않은가?


모든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에고의 느낌(나는 몸이다)을 '나'라고 여기기 때문에 에고에 '자아(atman)'라는 이름도 붙고, 일부 경전에서는 지금도 이를 개별적 자아(jivatman(로 부르기도 한다. 

경전들이 에고에 대한 주시인 '그것은 무엇인가?"나 "그것은 누구인가?'에도 '잔아탐구'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오직 이 이유 때문이다. 그러나 진아, 곧 존재-의식은 어떤 탐구도 필요로 하지 않고, 어떤 탐구의 대상도 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하지 않은가? 

바가반 라마나가 고대의 용어인 '진아탐구'를 사용하기 보다는 그것을 '나는 누구인가?'로 이름 붙인 것은 이러한 결함을 시정하기 위한 것일 뿐이다. 

에고, 즉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1인칭 의식으로 여기는 '나'라는 느낌은 진정한 1인칭 의식이 아니며, 진아만이 진정한 1인칭 의식인 것이다. 그것의 한 그림자에 불과한 에고의 느낌은 하나의 거짓된 1인칭 의식이다. 

우리가 이 에고에 대해 그것이 무엇인지, 혹은 누구인지 탐구해 들어가면 그것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사라져 버리고,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탐구자는 진아로서 진아 안에 자리 잡는다. 


위에서 말한 이 거짓된 1인칭 의식은 진아에서 솟아나 일어나기 때문에, 일어나는 어떤 장소와 시간을 가져야 한다. 따라서 '나는 어디서 오는가?'라는 물음은 '에고는 어디서 일어나는가?'를 의미할 뿐이다. 일어나는 장소는 에고에게만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일어남도 저묾도 없는 진아에게는 어떤 특정한 장소나 시간이 있을 수 없다. 


자세히 살펴보면 항상 알려지는 존재자인 우리만이 있는데, 시간이 어디 있고 공간이 어디 있는가? 

우리가 몸이라면 시간과 공간에 말려들겠지만, 우리가 몸인가? 우리는 지금, 그때, 늘 하나이고 여기, 저기, 도처에서 하나이므로, 무시간 무공간의 빈아인 우리만이 있다네!   -실재사십송 제16연-


라고 스리 바가반은 말한다. 

따라서 '나는 어디서 오는가?'라고 묻는 것은 '에고가 어디서 오는가?'라고 묻는 것이다. 

시간과 공간에 의해 조건지워지는 에고의 일어남에 대해서만 '나는 어디서 오는가?'하는 물음이 해당될 수 있다. 

스리 바가반이 '어디서?'혹은 '어디로부터'라는 단어에서 우리가 이해하기를 기대하는 의미는 '무엇으로부터?'이다. 이러한 의미로 이해될 때는, 어떤 공간이나 시간이 답으로 나오기 보다는 자기 존재, '우리', 즉 실재만이 그 답으로서 체험될 것이다. 반면에 우리가 '어디서?'라는 물음에 대한 답으로 어떤 장소를 예상한다면, 시간과 공간에 조건 지워지는 한 장소는 몸 안의 '가슴 중앙에서 오른쪽으로 손가락 두 개 폭' 위치에서 체험될 것이다. 

하지만 이 체험은 궁극적인 혹은 절대적인 체험이 아니다. 왜냐하면 심장은 진실로 무시간, 무공간, 무형상이고 이름없는 진아의식이라고 스리 바가반이 적극적으로 추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진아 안에 몸이 있는데도, 진아(혹은 심장)가 지각력없는  몸 안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영화화면을 받쳐주는 스크린이 그 화면 안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과 같네 !

                                                          -진아에 대한 5연시 제3연-


'어디서?'라는 물음에 대해 몸 안의 한 장소를 에고가 일어나는 점으로 발견하는 것은 스리 바가반의 가르침이 갖는 목적이 아니며, 그것은 자기탐구로써 얻는 결실도 아니다. 

스리 바가반은 당신이 설하는 가르침의 목적과, 에고가 일어나는 장소를 추구하여 얻는 결실을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선언하고 있다. 


'나로서 그것이 일어나는 곳은 어디인가?' 하고 내면에서 찾아 보면, 

'나'(에고)는 죽을 것이네 ! 이것이 지(知)의 탐구라네.  

                                         -실재사십송 제16연-


따라서 에고가 일어나는 곳을 추구할 때 목표하는 결과는 그 에고의 절멸이지, 몸 안의 어떤 장소에 대한 체험이 아니다. 경전에서는, 또 때로는 스리 바가반조차도 "(가슴 중앙에서) 손가락 두 개 폭의 오른 쪽에 심장이 있다"고 말해야 했지만, 그것은 시간과 공간에 의해서 한정되지 않고 (실로 그와 절대적으로 무관하고) '브라만은 도처에 있고, 브라만은 항상 있으며, 브라만은 모든 것이다'라는 형태로도 한정되지 않는, 하나이면서 비이원적인 것으로서 홀로 빛나는 진아의 성품에 대해 지적인 이해조차 갖지 못하고 늘 " 몸 안에서 진아의 자리는 어디입니까?"라고 질문하는 미성숙한 사람들에 대한 대답으로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심장의 장소는 궁극적이거나 절대적인 실재가 아니다. 


그래서 '나는 어디서 오는가?'의 형태로 자기 자신에게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에고, 즉 '일어나는 나'를 탐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누구인가?'를 탐구할 때 '나'라는 느낌을 그들의 '일어남'이 아니라 그들의 '있음'으로 여기는 구도자들이 있다 ! 만일 그렇게 여긴다면 그것은 진아에 대한 주시이다. 

우리의 '일어남'과 우리의 '있음' 간의 차이를 앞에서 설명했던 것은 이러한 두 가지 탐구 형태 간의 차이점을 분명히 이해하기 위해서일 뿐이다. 지금까지 경전들이 사용해 온 '브라만에 대한 명상'이라는 용어의 올바른 의미를 스리 바가반은 <실재사십송>의 기원시 제 1연 마지막 두 행에서 '심장 안에서 있는 그대로 안주하는 것'(다시 말해서, 진아로서 안주하는 것이 그것에 대해 명상하는 올바른 방법이라는 것) 으로 설명하듯이, <자기탐구>라는 용어의 올바른 의미를 여기서 '자기 쪽으로 향하기"(곧, 자기에게 주의를 기울이기)로 올바르게 설명한다. 


이 두 가지 탐구('나는 누구인가?' 또는 '나는 어디서 오는가?') 중 어느 것에서도 구도자의 주의는 그 자신에게만 집중되므로, '나'라는 말의 침된 의미인 진아 외의 그 어떤 것도 최종적으로 체험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나는 어디서 오는가?'와 '나는 누구인가?'의 두 가지 탐구 모두의 궁극적 결과는 동일하다 ! 

어째서 그런가? '나는 어디서 오는가?'를 추구하는 사람은 '나는 아무개다'라는 형태의 에고를 따라가며, 

그러는 동안 아무런 실제적 존재성이 없는 부가물인 그 '아무개'는 도중에 죽어 버린다. 

이렇게 하여 그는 진아, 곧 남아 있는 '내가 있다' 안에 자리잡게 된다. 


반면에 '나는 누구인가?'를 추구하는 사람은 자신의 진정한 본래적 '있음'(진아) 안에 힘들이지 않고 빠져 죽고, 그 '있음;은 '나는 내가 있다는 것이다(I am that I am)'로서 늘 빛난다. 

그러므로 '나는 어디서 오는가?'로 하든 '나는 누구인가?'로 하든, 절대적으로 필수적인 것은 끝까지 자기주시를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더욱이 진지한 구도자라면, '나'라는 느낌을 에고라 하든 진아라 하든 미리 이름을 붙일 필요도 없지 않겠는가? 

그도 그럴 것이, 그 구도자에게 에고와 진아라는 두 사람이 있는가? 이 말을 하는 이유는, 우리는 누구나 '나는 단 하나이며 둘이 아니다'라는 체험을 가지고 있으므로, 에고와 진아를 '낮은 자아'와 '높은 자아'로 구분하여- 하나의 '나'가  다른 '나'를 추구하는 - 상상적인 두 가지 느낌이 일어날 여지를 주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가 다른 하나의 아는 대상인, 두 개의 자아가 있는가?

모든 사람의 참된 경험은 /나는 하나다'인데 !

                       -실재 사십송 제 33연-


라고 스리 바가반은 묻는다. 

그래서 우리가 끝까지 '나'라는 느낌을 중단 없이 붙들고 가면 그것으로 족하다. 

누구나 일상 속에서 공통적으로 경험하는 '나'라는 느낌에 대한 그러한 주시가 바로 자기주시라는 것이다. 

그것(에고)의 존재성을 의심할 수 없어서, '나는 몸이다'라는 의식을 자신의 기본적 앎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나는 어디서 오는가?' 형태의 자기주시를 하는 (즉, 자기탐구를 하는) 것이 알맞다. 

반면에 자신이 '나는 아무개다'나 '나는 이것이다'와 같은 개인성을 가지고 있다고 여기는 대신,

"'내가 있다"로서 빛나는 이 느낌은 무엇인가?'하고 주의르 ㄹ기울이는 사람은 '나는 누구인가?'형태의 자기 주시 안에 고정되는 것이 알맞다. 

수행 중에 확실히 알고 있어야 할 중요한 점은, 

우리의 주의가 '나'라는 1인칭 단수의 느낌 쪽으로만 향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스리 사두 옴 지음 대성 옮김 <스리 라마나의 길> 탐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