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탐구의 실제수행방법(2)

2020. 2. 21. 10:29성인들 가르침/라마나 마하리쉬


"아아, 감옥에 갇혔다 ! 나는 이 삼각형 방 안에 붙잡혀 있다! 어떻게 벗어나지?"

하면서 어떤 사내가 두 벽이 만나는 구석에 서서 불평하며 울고 있었다.

그는 자기 앞의 두 벽을 두 손으로 더듬으면서 한탄했다.

"출입문도 없고 빠져 나갈 수 있는 구멍도 없다 ! 어떻게 빠져 나가지?"

조금 떨어진 열린 곳에 서 있던 한 친구가 그 한탄을 듣고 그 방향으로 몸을 돌려 친구의 상태를 보았다.

그 열린 공간에는 벽이 두 개 밖에 없었다. 그 벽들은 두 방향만 막은 채 각기 한 쪽이 서로 만나고 있었다.

열린 곳에 있던 친구, 자기 앞의 두 벽만 마주하고 서 있는 그 친구가 세 번째 벽이 뒤에 있다는 그릇된 관념 때문에

자신이 벽이 세 개인 방 안에 갇혔다고 잘못 판단하고 있음을 이내 알아차렸다.

그래서 그가 물었다. "왜 벽을 더듬으면서 한탄하고 있나?"

"이 삼각형 방의 감옥에서 빠져 나갈 길을 찾는데, 길이 안 보여 !"  사내가 대답했다.

친구 : 그러면 자네 뒤의 세 번째 벽을 찾아 보지 그래?

사내 : (뒤를 돌아보며) 아, 여기는 아무 장애가 없군! 이 길로 달아나야지.

(그렇게 말하면서 그는 달아나기 시작했다)

친구 : 아니, 왜 달아나나? 그럴 필요가 있나? 달아나지 않으면 감옥에 갇혀 있게 되나?

사내 : 아하! 그래, 그래 ! 나는 전혀 갖혀 있지 않았군! 뒤에 벽이 아예 없는데 어떻게 내가 갇힐수 있었지? 내가 갇힌 것은 나 자신의 망상에 불과했어. 나는 결코 갇히지 않았고, 지금도 풀려난 게 아니야! 그래서 지금 내가 있는 이 벽 근처에서 달아날 필요가 없어. 뒤를 돌아보지 않은 것이 나의 이른바 속박의 이유였군. 그리고 내가 주의를 뒤로 돌린 것이 실제로 나의 이른바 해탈을 위한 수행이었어! 실은 나는 어떤 투옥이나 석방도 없이, 내가 있는 그대로 늘 남아 있다 !

이와 같이 진실을 알게되자 그는 침묵을 지켰다.

이 이야기에서 두 벽은 2인칭(너,그것,세상)과 3인칭(마음속의 관념대상)들을 의미한다.

1인칭(나)은 사내의 뒤에 있다고 하는 세 번째 벽이다.

2인칭과 3인칭에 대한 주의에 의해서는 전혀 해탈의 길이 없다.

1인칭에 주의를 기울이는 "나는 누구인가?"에 의해서만 에고인 1인칭이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는 올바른 앎을 얻게 될 것이며, 이와 같이 1인칭이 절멸할 때에만 속박과 해탈이 거짓이라는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미친 사람처럼 "나는 속박된 자다" 라고 생각하는 한 속박과 해탈의 생각이 지속되겠지만, '이 속박된 자는 누구인가?'하고 자기 자신을 들여다 보면, 영원히 자유롭고 늘 빛나는 진아만이 존재할 것이네. 이처럼 속박에 대한 생각이 더 이상 머무르지 않는데, 해탈에 대한 생각이 지속될 수 있겠는가 - <실재사십송,제39연>

우리가 세 벽이 세 장소 곧 1인칭, 2인칭,3인칭을 대표한다고 설명했듯이, 그것이 현재, 과거, 미래의 세 시간을 대표한다고 설명할 수도 있다. 현재에 대한 진리가 무엇인지를 알기 위하여 - 과거와 미래에 대한 모든 생각을 피하면서 - 현재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을 통해서도 모든 생각이 가라앉고 '현재'자체가 사라질 것이다. 어째서 그런가?

지금 이전의 한 순간에 일어난 일을 우리는 과거로 간주하고, 지금 이후의 한 순간에 일어날 일을 우리는 미래로 간주한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가 지금 이전이나 이후의 어느 시간에도 한 순간도 주의를 기울임이 없이 지금 존재하는 그 한 순간이 무엇인지를 알려고 노력하면, 이른바 현재 순간의 백만분의 일조차도 과거 아니면 미래임을 알게 될 것이다. 만일 그러한 극히 미세한 과거와 미래의 순간들에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그 둘, 곧 과거와 미래 사이에 무엇이 있는지를 알려고 노력하면, 정확한 현재로서 아무 것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을 알 것이다. 그래서 현재라는 시간의 관념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되어 사라질 것이고, 시간과 장소를 초월하는 자기존재만이 뒤에 남게 될 것이다.


과거와 미래는 매일 경험되는 현재와 관련해서만 존재할 수 있네.

그것들도 일어날 때는 현재였고, 현재일 것이네. 따라서 (세가지 시간 중에서) 현재만이 존재하네.

현재의 진리(즉, 그것의 비존재)를 모르면서 과거와 미래를 알려고 하는 것은 하나(라는 단위의 가치에 대한 인식) 없이 숫자를 세려는 것과 같네. - <실재사십송,제15연>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 항상 알려지는 존재자- 만이 있는데, 시간이 어디 있고 공간이 어디 있는가? 우리가 몸이라면(몸으로 착각된다면) 시간과 공간에 말려들겠지만, 우리가 몸인가? 우리는 지금, 그때, 늘 하나이고 여기, 저기, 도처에서 하나이므로, 무시간 무공간의 진아인 우리만이 있다네 ! - <실재사십송제16연>

따라서 세 장소 중 첫째 장소(1인칭,나라는 느낌)에 주의를 기울이거나, 세 시간 중 현재시간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해탈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다. 스리 라마나의 길인 이것마저도 실은 속박의 제거나 해탈의 성취를 위한 것은 아니다 !

스리 라마나의 길은 오로지 우리가 결코 속박된 적이 없다는 올바른 앎의 깨달음을 통해 해탈에 대한 생각까지도 포기함으로써, 우리의 영원한 순수지복의 상태에 우리가 늘 안주하도록 하기 위한 목적으로 닦여져 있다.

첫째 장소 혹은 현재 시간에만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네.  예리하게,

그렇게 하면 모든 요가를 완수하고 지고의 성취를 이룬 뒤에 진아의 지복을 증기게 될 것이네.

그것을 알고 그것을 즐기라! - 수행의 핵심.

이제 다시 우리의 원래 논점을 다뤄보자.

구도자의 주의가 2인칭과 3인칭 쪽으로 향할 때는 '나'-의식이 확산력의 상태로 신경들을 통해 뇌에서 전신으로 퍼지지만, 같은 주의가 1인칭에게 (내면으로) 집중 될 때는 그것이 반대방향으로 사용되므로  '나'-의식은 확산력의 형태로 작용하는 대신 자기 주시력의 형태를 취한다.(즉, '함'의 힘이 '있음'의 힘으로 변환된다.)

이것이 소위 '나디의 휘저음(nadi-mathana)'이라는 것이다. 나디들 안에서 이와 같이 휘저음(churning,진동)이 일어나면서 나디들 전반에 흩어져 있던 '나'-의식이 도로 회수되어 확신의 출발점이었던 뇌안으로 모이고, 거기서 심장으로 돌아가 가라앉아 그것이 일어났던 근원인 심장, 곧 순수의식 속에 자리 잡는다.  

                               -스리 사두 옴 지음, 대성 옮김 <스리 라마나의 길> 탐구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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