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아릴 수 없음이 불심이다.

2020. 2. 29. 10:08성인들 가르침/초기선종법문

[본문]

 : 법계의 체성은 어디에 있습니까?

 : 일체 모두가 법계처이다.

[해설]

'일체 모두가 법계처'인 것이 곧 법계의 체성이다. 그래서 항상 모든 것이 법계처이고, 차별상 그대로 일상(一相)이며. 그것이 대상(對象)으로 지각(知覺)됨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대상으로 인식됨은 귀신의 경계이고 망령이다.

[본문]

 : 법계 체성 가운데 지계(持戒)와 파계(破戒)가 있습니까?

 : 법계 체성 가운데는 범부,성인과 천당, 지옥이 없다. 또한 시비(是非),고락(苦樂) 등이 없어 항상 허공과 같다.

[해설]

당념 당처를 떠나 깨닫는 자리, 깨달은 자리가 없다.

당념 당처에 여래(如來),진여(眞如), 일심(一心),불성(佛性)이 이미 다 갖추어져 있다.

[본문]

 : 어떠한 것을 모든 부처님의 경계라고 하는지 원하옵건대 설하여 주십시오.

 : 유(有)도 아니고 무(無)도 아니며, 비유(非有)와 비무(非無)를 취하지도 않는다.

이와 같이 해(解)함을 부처님의 경계라 한다.

만약 마음이 목석과 같다면 지혜가 있어도 알지 못하고, 지혜가 없어도 알지 못한다.

불심(佛心)은 마음이 있어서는 알지 못하고, 법신은 모습으로 볼 수 없다.

알아서 이해하는 것은 모두 망상분별이다.

그대가 갖가지로 이해한다고 하드라도 모두 자심(自心)의 비교 분별이며 자심의 망상이다.

모든 부처님의 지혜는 사람에게 설명하여 보여 줄 수 없으며, 또한 숨길 수도 없고, 또한 선정으로 측량할 수 없다.

해(解)가 끊어지고 지(知)가 끊어졌음을 이름하여 모든 부처님의 경계라고 한다.

헤아릴 수 없음이 불심이다. 만약 능히 불심이 이러함을 믿는다면 곧바로 항하사의 번뇌가 멸한다.

이러한 뜻을 항상 지니고 염념(念念)에 불(佛)의 지혜를 염한다면 이 사람의 도심은 날로 커질 것이다. 


 : 어떠한 것을 여래의 혜일(慧日)이 유(有)의 땅에 침몰함이라 합니까?

 : 유(有)가 아닌데 유를 보는 것을 (여래의) 혜일이 유의 땅에 침몰함이라 한다. 상이 없는데 상을 보는 것도 또한 그러하다.   


[해설]

무엇이 있다고 함은 아견(我見)이 있고 그에 따라 대상으로 인식되는 것이 있음을 말한다.

아견이 사라지면 무엇이 있다고 할 바가 없다 (無所有).

있는 그대로에서 무엇이 있다는 생각이 없다.

그래서 무엇이 없다는 생각도 없다(非非有).

모든 것은 있다(有), 없다(無)의 개념을 넘어서 있다.

그래서 모든 존재는 유와 무로 분별할 수 없고, 따라서 모든 사량분별을 넘어서 있는 궁전과 같다고 한다(超量宮)

유(有)에 집착함을 벗어나기 위해 비유(非有)를 설한 것일 뿐인데, 이 비유에 집착하거나 향하면 이 또한 비유라는 하나의 법, 즉 유에 집착한 것이 된다. 비유(非有)이니 비유(非有)도 비유(非有)이다.

그래서 유와 비유 어디에도 마음을 둘 수 없고 향할 수 없다.

어느 한 편에 향하면 이미 마음이 일어난 것이고, 유심(有心), 즉 마음이 있게 되어 버린다.

유(有)라는 마음, 비유(非有)라는 마음, 모두 유의 땅이고, 본연 본심의 혜일(慧日)이 이 유(有)의 땅에 묻혀 버리는 것이다. 이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는 아견에서 벗어나야 하며, 마음이 어디에든 향함이 없어야 한다.

어디에든 일단 향함이 있으면 마음이 일어나게 되어 만법이 생한다. 이미 만법이 생하였다면 이를 돌이켜 봄이 없어야 한다. 만법의 상(相)이 그대로 만법이 아닌 까닭이다. 자취이고 그림자이며, 환영과 같으며, 물속의 달과 같은 까닭이다. 그래서 그 만법에서 단지 향함 없이 인(忍;참음,인내,默心)하고 있을 뿐이다.

이 자리에서 선정과 지혜가 함께 구현된다. 즉 정혜무이(定慧無二)의 행이 이루어진다.

이것이 달마선(능가선)의 요체이다.

                                      -담림 편집, 박건주 역주 <보리달마론>운주사-






 ​